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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黃喜]

세종을 도와 왕조의 번영을 이끌다

1363년(공민왕 12) ~ 1452년(문종 2)

황희 대표 이미지

황희 초상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출생과 가문의 배경

황희(黃喜)의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이다. 1363년(공민왕 12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증조부는 황석부(黃石富)이며 조부는 황균비(黃均庇)인데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부친은 판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黃君瑞)였다. 어머니는 감문위 호군을 지낸 김우(金祐)의 딸이었다. 실록 상에는 황희가 황군서의 적자가 아니라 천첩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란 설도 있지만, 황희가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 관직에 진출하는데 출신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정황을 볼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황희의 초명은 수로(壽老)였다가 나중에 희(喜)로 개명하였다.

그의 출사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가 거의 없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명민함이 뛰어나서 한번 글을 보면 대번에 기억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가 고려 멸망과 더불어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고 하는 설도 있는데, 이는 믿을만한 사료에 근거한 내용은 아니어서 신빙하기 어렵다.

2 생애와 주요 업적

황희는 1376년(우왕 2년) 음서로 녹사 직을 제수 받으면서 14살의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383년(우왕 9년)과 1385년(우왕 11년)에는 각각 사마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389년(창왕 1년) 9월 유원(柳源)과 이종학(李種學)이 주관한 문과 시험에서 김여지(金汝知)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합격 다음해에 성균관 학록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 대에 장무습유직에 제수되었고, 1398년(태조 7년) 세자우정자가 되었다가 선원전 건축을 반대한 일로 경원(慶源)의 교수관으로 좌천되었다. 정종이 즉위한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우보궐로 승진하였다. 이후 몇 차례 언론을 펼친 일이 왕의 뜻을 거슬러 몇 차례 파직을 거쳤다. 이후에는 경기도 도사를 역임하고 형조와 예조, 이조, 병조의 정랑직을 거쳤다.

태종이 집권한 이후 당시 지신사였던 박석명(朴錫命)이 황희를 믿을만한 인물로 왕에게 추천하면서부터 황희는 정치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태종 5년) 박석명의 후임으로 지신사로 전격 발탁되었는데, 지신사는 후에 도승지와 같은 왕의 비서실장 직이었다. 황희는 약 5년간 지신사로 복무하면서 태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국왕의 총애에다가 국왕의 비서실장이란 높은 지위까지 더해진 황희는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인사 발령에 있어서 황희의 권한은 막강하였다. 당시 제도는 지신사가 되면 동시에 지이조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지이조사 황희는 인재를 기용할 때 정승이 천거한 사람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황희의 인사권 독점으로 재상들도 불만이 많았고, 이 때문에 황희의 인사 독점을 비판하는 익명서가 여러 번 나붙기도 하였다. 이처럼 황희는 태종대 정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이후 1409년(태종 9년)에는 참지의정부사로 승진하였고, 다시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411년(태종 11년) 병조판서에 제수되고 2년 뒤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5년(태종 15년)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에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신임아래 황희는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종친록』, 『유부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종친은 본래 왕의 후손들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당시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뿐 아니라, 태조의 형제였던 이원계(李元桂)와 이화(李和)의 후손들까지 종친으로 『선원록』에 올라 있었다. 태종은 이러한 내용을 바로잡고자 황희, 하륜(河崙), 이숙번(李叔蕃), 이응(李膺) 등에게 이 일을 비밀리에 지시한 것들이었다. 하륜과 이숙번은 태종에게 각별한 신하였는데, 황희가 이들과 더불어 왕실의 족보 편찬에 참여한 것은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황희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우는 일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던 것이었다.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이미 태종대 여러 차례 각종 비행을 저질러 태종이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1416년(태종 16년) 세자가 구종수(具宗秀)등과 어울려 궁성의 담을 넘어 기생집을 드나드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황희는 ‘아직 세자의 나이가 어립니다’라고 하여 양녕대군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 일은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2년 후 양녕대군의 세자에서 폐위되는 일이 발생하자 다시금 거론되면서 황희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년) 양녕대군의 다른 사람의 첩과 간음하여 임신까지 시킨 일이 발생하자 태종은 세자를 교체할 결심을 굳히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 자리에서 황희는 양녕대군이 적장자임을 강조하며 세자교체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의사대로 결국 충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태종은 이때 황희의 주장이 마음에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 교체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태종은 당시 영의정이던 유정현(柳廷顯)과 좌의정 박은(朴訔)에게 2년 전 황희가 한 발언을 언급하며 황희에게 죄가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후 황희는 그 죄로 인하여 삭탈관직 당하고 남원(南原)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세종 즉위 이후 1422년(세종 4년) 태종의 명으로 황희는 유배가 풀리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다음해인 1423년에는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강원도의 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판우군도총제와 찬성 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도 강원도관찰사의 직임을 계속 겸하였다. 그가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있던 때는 전국적으로 기록적인 흉년이 들었던 시기였다. 관찰사 황희는 강원도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각 고을의 수령들이 불법적으로 환자곡을 거두어들이는 정황을 적발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였고, 아울러 진휼할 곡식을 백성 수에 근거하여 추산한 뒤 이를 국왕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강원도 도내의 호수와 인구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번 기근으로 발생한 유민의 수, 그에 따라 피폐해진 토지의 결수 등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한 후 이에 따라 현재 강원도에 배정된 공물의 종류와 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관찰사 황희의 노력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그가 서울로 다시 돌아갈 때 백성들이 소공대(召公臺)라는 대를 쌓아 그의 은공을 기렸다고 전한다.

조정에 복귀한 이후 의정부찬성 겸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426년(세종8년)에는 우의정에 오르면서 정승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다음해인 1427년(세종 9년)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황희와 함께 맹사성(孟思誠) 역시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이후 이 두 재상은 약 10여 년을 함께 재상의 자리에서 세종을 보필하였다.

좌의정에 제수되자마자 황희는 사위인 서달(徐達)이 저지른 일에 휘말리게 되어 좌의정에서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사위인 서달이 모친을 보시고 지방 고을을 지나다가 고을 아전이 불손하게 대하자 이를 괘씸히 여기어 종들을 시켜 아전을 잡아 매질하였다. 그런데 이를 보던 고을 사람이 이를 나무라자, 아전들이 그 사람까지 매질하다가 그만 사람이 죽어버린 것이다. 황희는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당시 같이 정승의 자리에 있던 맹사성에게 중재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사건은 황희의 청탁대로 별 탈 없이 마무리 되었다가 세종이 직접 조서를 확인해보고 의심나는 부분을 조사하도록 명하는 바람에 발각된 것이었다. 결국 황희의 사위인 서달은 사형은 면하였으나, 당시 두 정승이 이 일로 파면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종은 다음 달 다시 황희와 맹사성을 좌의정과 우의정에 다시 제수하였다.

좌의정에 복귀하자마자 황희는 어머니 상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도 부모의 상을 당하면 관직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국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관원들의 경우, 불가피하게 상복을 벗고 계속 업무를 보게끔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것을 ‘기복’ 이라고 하였다. 세종은 황희를 기복시켜 계속 좌의정으로 업무를 보게 하였으나 황희는 3년상은 자식의 당연한 도리이므로 본인이 자식된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재차 황희를 기복시키려 하였고, 황희는 이번에도 사양하였다. 이렇게 몇 차례 기복의 명과 사양하기를 반복하여, 결국 황희는 좌의정 업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세종의 황희에 대한 신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복귀한 이후 황희는 다시 한 번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 고을의 역리가 인수부 판관 조연(趙憐)을 때렸는데, 역리의 아내가 황희에게 뇌물을 바치고 역리의 처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청탁의 편지를 받아 사건의 담당자인 경기감사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이 일을 사헌부 집의였던 남지(南智)가 세종에게 고하면서 조정의 논란을 불러왔다. 이에 황희는 다시 한 번 사직을 청하면서 본인의 결백을 주장했고, 세종은 사직을 반려시켰다. 이 사건을 전하는 실록 상에는 황희가 과거 친구였던 박포(朴苞)의 아내와 황희가 간통했다는 혐의, 대사헌 재직시 뇌물을 많이 받아 황금대사헌으로 불리던 일등을 언급하며 그가 청렴하지 못한 관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였다.

여러 불미스러운 일과 연루되기는 하였지만 황희는 정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8년(세종 10년) 평안도 각 고을에 성을 쌓는 일이 국정의 현안이 되었다. 당시 평안도는 여진족과 접해 있어 국경 방어의 핵심 지역이었고, 게다가 아직 압록강 유역까지 국경을 완전히 확정하지 못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이런 시점에 각 고을에 성을 쌓아 방어 거점을 튼튼히 하자는 의견이 제시된 것이다. 세종은 이 의견에 대해 평안도에 황희를 파견하여 실상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대책까지 마련하도록 하였다. 황희는 평안도도체찰사 직을 맡아 직접 평안도의 수십 개 고을의 읍성을 살펴보고 새로 성을 쌓아야 할 곳, 합병해야 할 고을 등을 꼼꼼히 살핀 이후 보고를 올렸다. 이에 세종은 별다른 이견 없이 황희의 의견을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평안도 각 고을의 읍성 축성은 이후 세종대 중후반 행성을 축조하고 4군을 개척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세종대 북방개척은 황희의 활약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평안도 뿐 아니라 함길도 6진 개척의 시발점도 황희의 활약에서 시작되었다. 1432년(세종 14년) 여진족의 일족인 우디케족이 다른 여진 일족인 오도리족을 습격하여 그 추장인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기회로 세종은 동북지역의 두만강 유역에 새로운 방어기지를 건설하여 국경 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방어진을 북방으로 전면 배치하는 부담에 따라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경원성(慶源城)의 위치 이전 문제가 이러한 논의의 중심 현안 중 하나였다. 이에 세종은 황희와 호조판서 안순(安純)을 파견하여 직접 확인한 이후 대책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평안도 뿐 아니라 함길도에서도 황희는 국방 문제의 결정에 큰 활약을 했던 것이다.

한편 황희는 당시 교육 및 관리 임용정책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정비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429년(세종 11년) 황희는 우의정이던 맹사성과 함께 교육 및 관리 임용에 대한 장문의 건의를 올리게 되었다. 관원의 자제들은 25세가 된 이후 벼슬에 나아가게 하고 이전에는 모두 성균관에 입학시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으며, 무과 시험에 대한 혜택을 줄여 관원들이 보다 쉬운 무과에 응시자가 몰리는 것을 방지하며, 지방에는 여름과 겨울 도회소를 설치하여 지역 유생들을 모이게 한 후 문장을 연마하도록 한 것 등이었다. 이 역시 세종이 모두 받아들여 시행하도록 조치하였다.

황희는 역사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는데, 1430년(세종 12년) 전대 왕이었던 태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다. 본래 『태종실록』 편찬 업무는 변계량(卞季良)이 담당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였는데, 그 내용이 공정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그에 대한 감수를 당시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작업 1년 만인 1431년(세종 13년) 새로 감수된 『태종실록』 36권이 완성되었다.

이후 『태종실록』을 세종이 열람하여 확인하고자 하는 의사를 비치기도 하였는데, 신료들은 왕이 실록을 열람하게 되면 올바른 역사 편찬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될 것이라 만류하였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경제속육전』의 편찬을 지휘하여 완성하기도 하였다. 『경제육전』은 고려말부터 시행했던 법령들 중에서 앞으로 준수할만한 내용들을 뽑아 만든 법령집으로 태조대 조준(趙浚)이 편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법령들이 늘어나자 이에 대한 증보작업이 이루어져 태종대에 하륜이 한 차례 『경제속육전』을 편찬한 일이 있었다. 세종 중반대에 다시 늘어난 법령들을 정리할 필요가 제기되자 황희로 하여금 한 번 더 『경제속육전』을 편찬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이때의 『속육전』 편찬에서 중요한 점은 영구히 지킬만한 법령들은 『속육전』 안에 넣고, 일시적 법령 등은 제외하여 따로 『등록』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법전에 들어가지 않은 최신 법령이나 일시적 내용들은 『등록』으로 편찬하는 전통을 수립하였다.

황희는 재상으로 복무하면서 세종과 종종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세종이 추진했던 새로운 세금제도, 즉 공법의 도입이었다. 당시까지 수확량에 비례하여 그 1/10을 거두던 답험손실법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세종은 수확량의 상관없이 일정량의 세금을 내는 공법을 구상하고 이를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황희는 수확량이 적은데도 일정량의 세금을 거두면 백성들이 곤경에 처할 것이란 논리로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러한 반대의견으로 공법의 법안을 만드는데 거의 1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결국 확정된 공법은 일정세금이 아니라 1/20의 세금을 내는 제도로 대폭 변경된 것이었다.

이처럼 황희는 사안에 따라 국왕인 세종의 의견에 강력한 반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반대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합리적인 반대에 따라 법안을 수정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다시 묻는 자세를 보였다. 합리적인 반대의견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황희의 역량과, 반대에 귀를 기울이고 포용할 수 있었던 국왕 세종의 합리성과 관용이 결국 요순시대와 비견되는 세종대 치세를 만들어낸 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업적을 남기고 황희는 1449년(세종 31년) 영의정으로 치사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황희는 24년간 정승을 역임하였고, 그 중 정부의 수상이라 할 수 있는 영의정을 무려 19년간 역임하였다. 조선에서 이토록 긴 기간을 영의정으로 재임한 경우는 황희가 유일한 경우였다. 그가 물러날 때 사신은 황희가 ‘너그럽고 후하며 나라 사람의 여론을 잘 수렴하여 당시 황희를 진정한 재상이라 칭했다’라는 논평을 붙여 그가 오랜 기간 재상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설명하고 있다.

3 사후 평가와 가계의 계승

황희는 영의정으로 치사한 지 3년만인 1452년(문종 2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정해졌고, 죽은 지 5일 만에 세종의 배향공신으로 정해졌다. 묘소는 파주(坡州) 감물역 마을에 정해졌는데, 현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이다.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도 황희 개인에 대한 인물평은 매우 극단적으로 갈렸다. 인사권을 전횡하고, 뇌물수수 및 소송청탁, 간통 등의 사건으로 여러 차례 관직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반면 그가 청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다는 평가도 공존하였다. 한 인물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경우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러한 황희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직후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이 『세종실록』 편찬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실록에 기록된 황희의 인사권 전횡, 뇌물수수 및 소송청탁, 간통 등의 일을 과연 삭제할 것인가 놔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당시 논의는 황희가 실제 그랬을 리 없고 당시 사관이었던 이호문(李好問) 개인이 원한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겠느냐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럼에도 역사 기록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원칙을 준수하여 결국 고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황희는 이후 시간이 흘러 청렴결백한 재상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많은 설화와 전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황희는 생전 두 명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첫 번째 부인이었던 최안(崔安)의 딸은 일찍 사망하였다. 두 번째로 양진(楊震)의 딸을 맞이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인 황치신(黃致身)은 판중추원사를 역임하였는데, 9명의 아들 중 황사장(黃事長), 황사형(黃事兄), 황사공(黃事恭), 황사경(黃事敬)의 네 명이 무과에 합격하고 황사효(黃事孝)는 문과에 급제하는 등 5명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두 번째 아들 황보신(黃保身)은 세조대 원종공신으로 봉해졌으나 고위 관직을 역임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관의 물건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아들인 황경형(黃敬兄)은 요직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막내아들 황수신(黃守身)은 의정부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황수신의 아들인 황신[황희](黃愼)은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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