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효종

효종[孝宗]

청에 대한 복수를 꿈꾸다

1619년(광해군 11) ~ 1659년(효종 10)

효종 대표 이미지

효종 영릉(寧陵) 능침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봉림대군에 봉해지다

효종 이호(李淏)는 1619년 인조[조선](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둘째 아들로 탄생했다. 인조의 첫째 아들이자 효종의 친형이었던 사람이 바로 소현세자였다. 1626년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631년에는 장유(張維)의 딸, 후일의 인선왕후(仁宣王后)와 결혼했다. 효종의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이며, 시호는 명의(明義)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을 호위하여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 때, 봉림대군은 아버지 인조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양반 가족 등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인조일행도 남한산성에 들어와 김류 등의 건의에 따라 곧바로 강도로 향하였으나, 이튿날 눈보라 등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인조와 소현세자 일행은 강화도로 들어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머물게 됨으로써 봉림대군 등이 머문 강화도의 방어는 검찰사 김경징, 강화유수 장신(張紳) 등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금과 몽고의 군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대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세가 불리해지자 후금의 강화 요구에 응하여 강화도는 함락되고 말았다. 1637년 2월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례를 치르고, 정축화약이 맺어졌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은 소현세자와 함께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이 때, 청에서는 조선에 포수 등의 병력과 농군, 무기 등 다양한 요구를 하였는데 이 때 심양관의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는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또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요구에 따라 종군하기도 했으며, 특히 1644년 청군의 입관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전투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를 포함한 심양관의 거의 모든 인원이 포함되었다. 이 해에 청이 성공적으로 명을 물리치게 되자 1645년 2월, 8년 만에 소현세자가 귀국했고, 5월에는 봉림대군이 조선으로 돌아왔다.

2 형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되다

소현세자는 동생인 봉림대군보다 3개월 먼저 귀국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대한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인조에 의해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귀국한 이후 약 두 달 만에 병으로 치료를 받던 중 창경궁 환경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같은 해 5월에 봉림대군이 돌아오자, 인조는 원손인 소현세자의 큰 아들을 세손으로 삼기를 청한 주위의 의견을 물리치고 9월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창경궁 명정전에서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봉림대군은 자신이 세자를 잇는 것이 옳지 않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는 효종의 능력이 뛰어난 점을 들어 형을 잇게 하고 형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아낄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말과는 달리 소현세자빈인 강빈을 사사하고 손자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이 조치는 조야의 대부분에서 반대하였지만, 인조의 강경한 태도로 시행되었다. 나중에 국왕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은 이 사건에 대한 발의를 금지하기도 했다. 봉림대군은 친형과의 관계로 인해 정통성에 문제가 없지 않았으나, 1649년 인조가 창덕궁 인정전에서 승하하자, 5일 후 조선의 17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실록』의 첫 기사는 효종의 덕과 재능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한데, 이는 소현세자의 동생으로서 왕위를 이었던 정통성 문제 때문인 듯하다.

3 왕이 되어 반청인사를 기용하다

효종은 즉위 직후 청과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을 내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줄 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당시 집권세력은 낙당과 원당, 한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낙당의 영수였던 김자점(金自點)은 청과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낙당과 대립하고 있던 원당은 원두표(元斗杓)를 영수로 하고 있었는데, 국왕의 의중을 파악하고 신임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김육(金堉)을 영수로 하고 있던 한당은 경세관료형의 인물들이었는데,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효종 2년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등 외척으로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밖에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 당시 산림(山林)으로 불리던 서인계의 명망가들이 산당을 형성하였다. 효종은 왕위계승상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초기에는 산림 세력을 중용했다. 이들은 김자점 등 친청 성향의 훈구세력을 실각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효종은 이후 이들의 낙향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아 실제 정국 운영의 핵심 인사로 활용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효종은 반청적인 색채가 뚜렷한 훈신들을 중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귀(李貴)의 아들이자, 이시백(李時白)의 동생인 이시방(李時昉)이었다. 이시방은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역모 사건 직후 수어사가 되었던 인물로 적극적인 반청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효종은 즉위 후, 이시방을 수어사로 재기용하였는데 이는 김자점 등의 친청세력을 의식한 조치였다. 효종은 원두표와 이완(李浣)도 중용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반청적인 자세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원두표는 원당의 영수로서 사림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문신이지만 군사적인 문제에 밝았다. 이는 원두표의 할아버지 원호(元豪)와 아버지 원유남(元裕男)이 모두 명망 있는 무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운데 원호는 당시 한당의 영수인 김육의 증조부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인물이기도 했다. 원두표는 효종 즉위 후 병조판서로 발탁되었고, 효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다. 이완은 전형적인 무신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이수일(李守一)은 선조[조선](宣祖) 연간부터 인조 연간에 이르기까지 여진 관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무장이었다. 이완은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군사문제에 관한 효종의 자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4 군비증강책에 힘을 쏟다

효종은 1652년을 기점으로 군비증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즉위한 직후인 1650년에 이시방을 수어사로 삼아 수어청(守禦廳)의 정비에 착수한 바 있었다. 이는 유사시 국왕의 보장처 역할을 했던 남한산성을 우선적으로 강화한 조치임은 물론이다. 이 때 총융사에 속한 죽산(竹山)을 남한산성에 소속시키고, 청주(淸州)와 충주(忠州)의 군사는 본도로 환속시킴으로써 수어청은 경기도(京畿道)의 광주(廣州)와 양주(楊州), 죽산, 강원도(江原道)의 원주(原州) 등 4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652년에는 수어청의 아병(牙兵)을 포수와 사수로 절반씩 편성하여 전력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군비증강은 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김자점 등의 일파가 청에 조선의 상황을 알림으로써 청에서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정세가 우려된다’는 명분으로 하삼도 일대를 정비할 뿐, 본격적인 군비 확충을 시도하지 못했다. 이시방 등도 왜국의 정세가 우려된다는 핑계를 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청조가 중원의 통치에 여념이 없게 되고, 또 대조선 강경론자들이 실세하면서 조선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효종은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여 어영청(御營廳)을 조직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 어영군의 편제는 대장 1원과 중군 1원 외에 도제조와 제조 각 1원, 문무낭청 각 1원으로 조직화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과 비슷한 규모로 확장되었다. 1652년에는 어영군의 병력을 증강시켜 정군만 2만 1천을 확보하고 각기 3~4명의 보인을 지급하여 총 10만에 가까운 규모로 성장했다. 어영군은 총 21번으로 나뉘어 2개월을 기준으로 1천 명씩 교대근무하는 번차제도를 확립했다. 특히 보인 가운데 1명은 자보라고 하여 번상 왕래 비용을 충당하게 하고, 2명은 관보라고 하여 어영청에 조세를 납부하게 함으로써 어영군의 체류 비용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섬의 목장을 관리하여 말을 확보함으로써 어영청에 기병을 설치하기도 했고, 이후 유혁연(柳赫然)에 의해서 대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별파진(別破陣)이라는 특수부대도 창설되었다. 이를 통해 어영청은 정식 관청으로 설치되었고, 이후 가장 모범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한편, 효종은 금군에 대한 정비도 서둘러 600여 명의 금군을 기병화하였고,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으로 구성된 내삼청을 개편하여 좌·우 별장을 두고, 국왕의 좌우 호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금군에 좌우 별장을 두었다.

또 호조의 반대를 무릎 쓰고, 금군의 규모를 1천 명으로 확충하는 조치를 취하여 친위군을 확보하고자 했다. 효종은 어영청의 제도가 정비된 이후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옮겨 개혁에 착수하게 했다. 이완은 1654년에 이르기까지 마군 100명, 보군 1천 명의 증액을 추진하였다. 당시 훈련도감의 병력이 5천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이 조치로 인해 7천 명을 상회하게 되었다. 효종은 훈련도감의 병력을 1만 이상으로 확대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이 뒤따라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효종은 지방군에 대한 강화도 함께 추진했다. 우선 지방에 영장(營將)을 파견하여 지방군의 훈련과 지휘를 담당하게 하였다. 결국 1654년 효종은 원두표의 의견을 받아들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 영장을 파견하여 군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다만, 청의 감시를 의식해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을 제외한 지역에는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행하였다. 그밖에 강화도에 대한 방어책도 마련하여 1658년까지 8개의 진과 보를 설치하기도 했다. 효종은 군사재정 마련을 위한 조치도 추진하였는데, 노비추쇄를 강력히 시행하여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효종대에는 공납(貢納) 개혁으로 시행된 대동법(大同法)의 운영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여기에는 기존에 하삼도에서 거두던 월과(月課)의 총약환가(銃藥丸價)를 대동미에 산입하여 재정 조달책의 변통을 추진하였다. 효종은 무리할 정도의 군비증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는 적지 않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이어져 이후에 여러 폐단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효종의 군사력 확충은 공세적 전력의 마련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인 차원에서 두드러진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어 북벌론(北伐論)과의 직접적인 연관성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주도하려는 의지와도 관련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북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망하다

효종은 북벌을 표방하고 군비확충사업을 추진했다. 애초부터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아버지 인조도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낼 것(復讎雪恥)’을 생각했지만, 청의 압력으로 인해 본격화하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인조가 굳이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효종이 북벌의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상무적인 기질이 강하여 무예를 연마했고, 봉림대군 시절 심양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수차례의 전투에 종군하기도 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효종은 청군의 전력을 잘 이해했을 것이고 또 지형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는 송시열과의 대화 속에 잘 나타나는데, 여기서 효종은 청이 중원을 점령한 이후에 군사적 문제보다 내치에 주력하고 있으므로 북벌의 호기라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청은 여러 내부 정책을 통해서 중원통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또 한족은 남명 정권을 세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청조에 대항하고 있었다. 효종은 조선이 기회를 노려 산해관 밖을 공격한다면 중원의 호걸들이 내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공격의 1차 대상으로 설정한 만주 지역에는 수많은 물자와 조선인 포로들이 있어 그들의 호응도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효종이 강력한 북벌을 표방하고 군비확충에 힘을 기울인 데에는 자신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효종은 ‘자신의 당대’가 아니면 북벌의 추진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현종[조선](顯宗)은 깊은 궁중에서 자라나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자신은 군사적인 일을 행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세자는 장차 덕으로 국가를 통치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효종의 북벌 구상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었지만 청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팽배해 있던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일정한 상승 작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효종이 강력히 추진하던 군비확장사업이 신하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자아내고, 흉년·자연재해 등의 재정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산림세력을 등용하여 북벌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효종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았다. 특히 송시열은 수신론을 강조하여 북벌을 사실상 만류하였다. 송시열은 춘추대의(春秋大義), 복수설치(復讐雪恥) 등을 내세웠지만 이는 유교적 명분·의리의 표현에 가까우며 정치적 이념 선전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군비증강사업에 제동이 걸린 상황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이 사망하게 되면서 북벌 정책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효종은 1659년 5월 4일 41세의 일기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묘호는 효종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