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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서산대사)[休靜]

전란에 빠진 국가를 구하고자 승병(僧兵)을 일으키다

1520년(중종 15) ~ 1604년(선조 37)

휴정(서산대사) 대표 이미지

서산대사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관

청허 휴정(淸虛休靜)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다. 명종대 승과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에 제수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승병을 일으켜 승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조선후기 불교교단 최대 계파인 청허계(淸虛系) 법맥의 시원이다.

2 출생과 가계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이고 묘향산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하였다. 금강산 백화암에 있었기 때문에 백화도인(白華道人)이라고도 하고,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직을 사임한 뒤에는 퇴은(退隱) 등으로도 불렸다.

휴정과 관련한 기록은 적지 않다. 그 문도가 워낙 많아 언기(彦機) 등의 제자가 남긴 행장도 있고, 의승장으로서의 혁혁한 활약으로 해남과 밀양의 표충사 등에 제향되면서 비석도 여러 기 세워졌다. 이들 행장과 비문의 내용을 참고로 휴정의 생애를 간략하나마 살펴볼 수 있다.

휴정은 1520년(중종 15) 3월 26일에 평안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속가의 성은 완산(完山) 최씨(崔氏)이고 속가의 이름은 여신(汝信), 자는 현응(玄應)이다. 고조할아버지가 태종[조선](太宗) 때에 등과한 이후로 창화(昌化)로 옮겨가 살아서 창화를 고향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김우(金禹)가 연산군에게 죄를 얻자 함께 관서지방의 안릉(安陵, 안주의 옛 이름)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안릉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세창(世昌)은 천거를 받아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로 지내며 시(詩)와 술을 즐겼다. 어머니는 김씨(金氏)인데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꿈에서 한 노파에게 대장부의 잉태를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깼는데, 그 다음해에 휴정을 낳았다.

3 성장과 출가

휴정은 출생 이후 불가(佛家)와 인연이 많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3세 때 사월 초파일에 어떤 노인이 와서 어린 스님을 만나러 왔다며, 대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이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라고 해서 어려서는 운학이라고 불렸다. 어려서 놀 때도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기와와 돌로 절을 세우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휴정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고 효심이 깊었다고 하나 9세와 10세 때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가 된다. 고을의 군수 이사증(李師曾)이 이를 불쌍히 여겨 하루는 어린 휴정을 자기 집으로 불러다 놀게 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시와 문장에 능한 그 총명함을 보고 서울로 데리고 가 성균관에 입학시켰다. 3년간 성균관에서 글을 익힌 휴정은 15세 되던 해에 진사시험에 응시하였다가 거듭 낙방하였는데, 분한 마음에 동학 몇 사람과 함께 호남지역으로 내려가 지리산 화엄동, 연곡동, 칠불동, 의신동 청학동 등의 절과 암자들을 유력하였다. 이로 인해 불서들을 두루 열람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심공급제(心空及第)한 자가 모름지기 대장부이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이 구절과 관련된 일화가 「상완산로부윤서(上完山盧府尹書)」에 전하는데, 과거 급제를 목표로 공부하다가 실패한 휴정에게 숭인(崇仁)이라는 승려가 찾아와 “그대의 기골이 청수한 것을 보니 정녕 보통사람은 아니로구나. 심공급제(心空及第)로 마음을 돌려 세상의 명리를 좇는 마음은 영영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서생의 업은 종일토록 애쓰고 애써도 백년의 얻는 바가 단지 한갓 헛된 이름이 뿐이니 실로 안타까워 할 만 한 것이다.”라고 하여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 머리를 깎고,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 불경을 배웠다고 한다.

4 활동과 업적 : 승과 합격, 그리고 승병장

1552년(명종 7)에는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 서산의 승과 합격은 조선시대 불교정책에서 눈에 띄는 사건이다. 선교 양종이 혁파되고 승과가 실시되지 않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1550년(명종 5) 문정왕후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승과가 부활하고 양종이 복구되었는데, 이 때 승과에 합격한 이들은 주요 사찰의 주지나 승직을 역임하고 이후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된다. 승과 부활 후 식년에 해당하는 1552년(명종 7) 승과에 합격하여 이후 교종판사와 선종판사의 양종 판사직을 겸하고 선종 본사였던 봉은사의 주지를 맡게 되는 인물이 바로 휴정인 것이다.

이후 휴정은 대선(大選), 주지(住持), 전법(傳法), 교종판사, 선종판사 등의 직위를 지내다가 1557년(명종 12) 어느 날, “내가 출가한 본래 뜻이 어찌 이런 것들에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승직을 모두 그만두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제자 유정과 함께 관아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곧 무죄 석방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한양을 함락하고 선조[조선](宣祖)가 평양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가는 상황이 되자 선조는 묘향산에 사신을 보내에 휴정을 부르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할 방도를 물었다. 이어 휴정은 당시 7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약속하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벼슬을 받는다. 이어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도를 모으자 유정이 관동에서 칠백여 승려를, 처영이 호남에서 천여 명의 승려를 이끌었고, 휴정이 그 문도와 자원자 승려 천오백 명을 이끄니 모두 합하여 오천여 명이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로 결집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남쪽으로 도주하는 왜구를 쫓아 추격하였다. 군대가 안성에 진을 쳤을 무렵 휴정은 심신의 노쇠함이 군대의 왕성한 기세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문도인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과 처영(處英)에게 최선을 다 해 싸울 것을 당부하며, 특히 유정에게 승군 전체의 통솔권을 맡기고 묘향산의 은거처로 돌아갔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휴정의 공로를 크게 평가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내렸다.

1604년(선조 37) 정월 13일에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였는데 세수는 85세이고 법랍은 67세였다.

제자 원준과 인영 등이 다비하여 사리를 수습하였는데, 이를 나누어 보현산 안심사와 금강산 유점사에 부도를 만들고 17세기 중반 해남 대둔사에도 그 부도와 비석이 세워졌다.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활동은 근왕을 위한 충의의 공적으로 인정받아 받아 1738년 밀양의 표충사, 1789년 해남 표충사(海南 表忠祠),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사액되고 공식 향사가 이루어졌다.

휴정은 특히 시에 능한 승려로 알려져 있었으며 저술로는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설선의(說禪儀)』, 『회심곡(回心曲)』 등이 있다.

5 법맥의 계승 : 문도의 양성과 청허계의 대두

휴정은 최고의 승직인 양종판사와 팔도도총섭을 역임하였을 뿐 아니라 선조에게 최고의 존칭까지 하사받아 당시 교단에서 높은 위상을 가졌고 사회에서도 큰 명성을 떨쳤다. 때문에 그 문도도 전국적으로 매우 많았는데, 비문에 의하면 제자가 천여 명에 이름난 이가 칠십여 명이라고 하였다.

사명유정이나 뇌묵처영, 의엄(義嚴) 등의 승병장들이 휴정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언기, 원준(圓俊), 원철 등 수많은 문도들이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이후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조선후기 불교 교단의 계파는 선종의 법맥 전승과 더불어 법통과 계파 인식을 공유하였는데 이들 청허의 문도에서 형성된 일명 청허계는 조선후기 최대 계파가 되었다.

이들은 간화선(看話禪)을 중시하면서도 선과 교를 겸수하는 수행체계를 정립하였다. 휴정은 선, 교, 염불의 종합적 수행방향을 설정하는데 이는 경절문(徑截門), 원돈문(圓頓門), 염불문(念佛門)의 삼문으로 제시되어 그 문도들에게 계승되었다.

그의 문도 가운데 편양언기가 제기한 ‘임제태고법통설(臨濟太古法統說)’은 광범위한 교단의 지지를 받으며 조선후기 불교계의 주된 법통설로 자리잡으며,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대한불교 조계종의 공식 법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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