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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姜宇奎]

조선 총독 사이토를 저격한 청년 같은 노인

1855년(철종 6) ~ 1920년

강우규 대표 이미지

강우규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장사꾼에서 민족교육운동가로

강우규(姜宇奎)의 본관은 진주,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이며. 다른 이름은 영일(寧一)·강녕(康寧)이다. 1855년(철종 6)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무릉면(武陵面) 제남리(濟南里)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중건(重健)·건형(鍵衡) 두 아들을 두었다. 가난한 농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탓에 누나 댁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그가 20살 되던 해에도 부친이 살아계신 것으로 되어 있고, 아들 중건이 3심에서 강우규의 사형이 확정된 직후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70세에 가까운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그는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에 큰 절의가 있었으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안이 매우 가난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고, 이후 한약방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30세이던 1885년(고종 22)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사하였다. 홍원에서는 생업을 위해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25년간 한약방과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많은 재산이 모이자,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계기는 이동휘(李東輝)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8년 이동휘는 신민회(新民會) 활동의 일환으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선교활동과 함께 학교설립을 통한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이동휘를 만난 그는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입문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영명학교(靈明學校)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곧바로 장남 중건(일명 건하) 부부 등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본인도 이듬해인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처음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두도구(頭道溝)에 자리를 잡은 뒤,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답사하며 이동휘·박은식(朴殷植)·계봉우(桂奉瑀) 등을 만나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그의 집에 2개월간 기거하며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자, 이를 본 그가 안중근의 의거를 가슴 속에 새기면서 후일 의거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정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게 되자, 이를 피해 1915년경 우수리강 건너 길림성 요하현(繞河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가족과 재회하였다 한다. 그가 이곳에 자리한 이유는 남만주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한 그는 처음 몇 호에 불과했던 마을을 100여 호의 마을로 만들면서 신흥동(新興洞)이라 이름하였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Iman)에 협성학교(協成學校)와 조선민회(朝鮮民會), 만주 요하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학교 등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교육에 힘썼다.

2 노인동맹단 요하현 지부장이 되다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하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소식은 바로 3·1운동이었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그는 요하현 신흥동의 동포 400~50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에 가입하고 요하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직후인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김치보(金致寶)의 집에서 조직한 단체이다. 일제문서에 의하면 노인동맹단은 단장에 김치보, 총무에 김순약(金舜若), 의장에 이일(李逸), 서기에 서상구(徐相矩), 그리고 의원으로는 이윤(李崙)·박희평(朴凞平)·한승우(韓承羽)·이득만(李得萬)·윤여옥(尹余玉)·주우점(朱于漸)·강석기(姜錫基)·서상구(徐相矩)·정치윤(鄭致允)·이일(李逸)·박대동(朴大同) 등을 선출하였다고 되어 있다. 노인동맹단은 다른 독립운동단체와는 달리 회원의 나이를 46~70세까지로 연령 제한을 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독립운동 청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한 때문이었다. 노인동맹단은 발족 이후 전단위원(傳團委員)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단원을 모집하였다. 4월 2일 안중근의 백부(伯父)인 안태순(劉泰純)이 소수분(小綏芬, 또는 小秋豊)과 포크라니치나야 지방을 향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4월 3일 차대유(車大有)는 스찬(水淸, 또는 蘇城, 현재의 파르티잔스크), 최시종(崔侍從)은 이만으로 각기 출발하였고, 4일에는 이륜·김영학이 수이푼(秋豐)·니콜리스크(소왕령蘇王嶺, 또는 쌍성자雙城子)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강우규는 요하현 인근이었던 이만지역으로 온 최시종과 만나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3·1운동 직후인 5월경 정세를 살피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동휘의 부친 이승교(李承喬, 일명 이발李發)를 만나 이승교의 소개로 가입하였다는 설도 있다.

노인동맹단은 5월 말 이승교 등 단원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이승교는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였다. 일제는 이승교 등을 체포하였으나 이승교·정치윤은 노령(老齡)이라는 이유로 강제 추방하고, 윤여옥 등 다른 단원들만 이른바 정치범처벌령위반(政治犯處罰令違反)으로 처벌하였다. 추방된 이승교·정치윤 등이 6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자, 노인동맹단은 환영회를 베풀고 향후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한 끝에 6월 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 명의의 한국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3 조선총독 처단을 계획·실행하다

바로 이즈음 강우규는 국내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승교 등 환영식 소식과 함께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신임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이 살던 신흥동 근처 청룡(靑龍)에서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였다. 문제는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폭탄을 비단 수건에 싸서 사타구니에 묶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6월 11일 월후환(越後丸)이라는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그는 14일 함경남도 원산(元山)에 도착하여 최자남(崔子南)을 찾아갔다. 최자남은 1915년 니콜리스크에 거주할 당시 그를 찾아간 강우규를 4개월간 머물게 한 것을 비롯하여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집을 제공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그는 최자남의 집에 한달간 머물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때 최자남의 소개로 허형(許炯)·한은철(韓殷哲)을 소개받기도 하였다. 허형은 평안남도 안주(安州)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인물로, 당시 러시아로 건너가기 위해 최자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월 5일 3·1운동의 책임을 지고 하세가와가 도쿄로 물러나자 곧 신임 총독이 부임할 것을 예견한 그는 8월 5일 허형·한은철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도착 후 허형의 주선으로 안국동(安國洞) 김종호의 집에 머물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정보를 탐문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2일 일본정부에서 예비역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고, 언론에서는 신임 총독의 시정방침과 함께 사진까지 공개하며 대서특필하였다. 언론을 통해 이 소식을 확인한 그는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히는 한편,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8월 28일 거사 장소인 남대문역 근처 박영근의 집으로 숙소를 옮긴 그는 매일 남대문역 앞을 찾아 지형을 면밀히 살피며 여러 차례 현장 상황을 점검하였다.

8월 29일 도쿄를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9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이튿날인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의 의장대와 보병 제78연대 소속 보병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물론 군대와 별도로 경찰을 동원하여 탐문과 삼엄한 경계를 하기도 하였다.

9월 2일 아침, 그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싼 뒤 허리에 묶고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어 허형과 남대문 밖 중국요리점에서 같이 점심을 한 후 거사 장소로 향하였다. 총독 도착 1시간 전, 그는 거사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총독이 귀빈실을 거쳐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귀빈실 근처로 자리를 옮겨 총독의 도착을 기다렸다.

총독을 태운 특별열차는 오후 5시 정각에 플랫폼에 들어섰다. 사이토 총독은 열차에서 내려 1,000여 명의 환영객이 운집한 곳으로 가 악수를 나누고는 남대문역 광장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총독 내외와 정무총감 내외가 탈 마차가 각각 준비되어 있었다.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그는 수류탄을 힘껏 던졌으나, 폭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튄 파편 몇 조각은 총독의 혁대에 박혔으나 총독은 무사하였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중 오사카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末弘又二郞)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의거 직후 그는 담담한 자세로 체포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를 체포하지 않자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허형과 만나 재차 거사를 계획하고 가회동(嘉會洞) 장익규(張翊奎)의 집과 누하동(樓下洞) 임승화(林承和)의 집을 오가며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킨 지 16일 만인 9월 17일 누하동에서 조선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김태석은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의 경부(警部)로, 후일 의열단에서 ‘칠가살(七可殺)’ 대상자 가운데 1명으로 지목되었고,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 친일경찰이었다. 그런데 그의 체포 소식은 2주일이 지나서야 언론에 공개되었고, 대서특필되었다. 놀랍게도 폭탄을 던진 사람이 다름 아닌 65세의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4 재판과 마지막 가는 길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은 강우규에게 사형,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허형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에 대해 허형은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강우규는 곧바로 항고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거사를 도와준 동지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오늘날의 대법원에 해당)에서도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3심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고취지서 역시 그가 직접 작성하였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그가 총독을 처단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상고 기각 후 6개월 뒤인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은 서대문형무소로 사형집행 명령서를 발송하였다. 사형일자는 3일 뒤인 11월 29일이었다. 29일 오전 9시 30분, 서대문형무소측은 종로구치감에 갇혀 있던 그를 데려왔고, 10시 30분 오카모토(岡本) 검사가 입회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때 그는 세상을 떠나며 시를 남겼다. 이른바 사세시(辭世詩)이다.

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有身無國 豈無感想)

처형 직전 그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에서 온 장남 중건이 마련해 준 한복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러나 사형 집행 당일, 그의 장남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었다가 집행이 끝난 후에야 풀려났고, 오후 3시 반경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받을 수 있었다.

한편 상고심에서 강우규의 사형 결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 강씨 종친회는 문중 차원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안장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새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선산에 안장할 경우,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빈소도, 조문도, 장례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들만이 그의 유해를 운구하여 서대문감옥 공동묘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가매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그의 유해가 운구되는 동안에도 쫓아오며 감시를 하자, 화가 난 중건은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해야만 속이 시원하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묘지는 1956년 10월 유지들의 발의로 수유리 산109번지로 묘지를 이장되었다가 반세기가 다 된 1967년 6월에야 비로소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강우규의 남대문역 투탄사건은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투쟁이었다. 이 의거는 이후 의열단(義烈團)으로 계승되면서 1920년대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자리잡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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