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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明成王后:明成皇后]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

1851년(철종 2) ~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대표 이미지

건청궁 옥호루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평가가 엇갈리는 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처럼 양 극단의 평판을 가진 사람도 없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명성황후에 대해서 ‘씀씀이에 도무지 절도가 없어서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둔 돈이 모두 동이 났고 이로부터 매관매직의 폐단이 시작되었다’고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일찍이 조선을 방문하여 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바 있는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그의 저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그녀에 대해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생존했던 당시에도 이렇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사망한 후에도 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친정 식구들을 끌어들여서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결국 나라를 그르친 인물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일제의 침략 앞에 희생된 조선의 국모(國母)라는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진정한 모습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2 ‘민비(閔妃)’라고 불린 이유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낙리(蟾樂里) 사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민치록(閔致祿)이며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생부인 민유중(閔維重)의 후손이다. 1866년 16세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그녀가 죽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 붙여진 것이다. 황후란 황제의 부인이란 뜻이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황후가 아니었으니 명성황후란 호칭도 있을 수 없었다. 과거 명성황후 대신 널리 쓰인 호칭으로 민비(閔妃)를 들 수 있다. 민씨(閔氏)의 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이다.

하지만 민비라는 호칭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민씨 성을 가진 왕비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민비(閔妃)라는 용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공식적으로 쓰인 용어가 아닌 셈이다.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명성황후가 생존했을 때의 자료들을 살펴보아도 민비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자료에서는 대부분 ‘왕후(王后)’, ‘중궁(中宮)’, ‘중전(中殿)’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중궁민씨(中宮閔氏)’처럼 민씨를 뒤에 붙이는 경우는 있지만 민비(閔妃)처럼 성을 앞세우는 경우는 없었다.

민비의 용례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10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돌아가신 민비전하(閔妃殿下)의 육순을 맞아 이왕전하(李王殿下)께서 경효전(景孝殿)에서 제사를 지낼 예정이라는 것이다. 순종 황제가 1910년 병합 이후 이왕(李王)이 되었으므로 민비(閔妃)라는 말은 이 무렵 붙여진 호칭인 셈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 뒤에 민비는 다시 명성황후가 되었다. 1920년 7월 10일자 『매일신보』는 돌아가신 이태왕 전하의 존호를 고종태황제로 올리면서 민비전하의 호칭도 명성황후로 승격시키기로 일본 궁내성이 내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제는 명칭을 민비로 격하하였다가 명성황후로 원위치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로도 격하시킨 명칭만이 그대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민비는 별로 기분 좋은 호칭이 아닌 셈이다.

3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

명성황후는 1873년 고종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자신의 친정붙이들과 함께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녀의 친족을 민씨 척족(戚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권력을 과거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권력에 비겨서 여흥 민씨(驪興閔氏) 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녀가 남편인 고종을 제치고 국정을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흥 민씨들이 출세하여 고관대작을 독차지한 점을 보면 과거 안동 김씨 때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과거 안동 김씨 시절에는 왕비의 친정아버지가 국왕의 정치적 후견인(國舅)으로서 권력을 대신 행사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왕비가 되었을 무렵 친정아버지인 민치록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이 점은 국혼(國婚)을 추진한 흥선대원군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여흥 민씨에게는 국왕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종은 과거 안동 김씨 시절과는 달리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여흥 민씨 세도라는 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개인적으로 국정에 상당부분 관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공식 사료에서는 그녀의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매천야록』을 비롯한 여러 야사에는 그녀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오군란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야사의 기록은 약간은 새겨서 읽을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은 신성불가침한 존재였다. 국왕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혹 상소를 통해 국왕을 직접 비판하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1881년 홍재학(洪在鶴)의 상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국왕의 시정을 비판하고자 할 때 대신 공격할 희생양을 찾게 마련이다. 명성황후도 이러한 희생양으로 이용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야사에 나타나는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은 얼마간 과장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고종이 무능한 군주였다는 이미지 즉 고종암군설(暗君說)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고종이 친정 초기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통치행위를 하였다는 연구 성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한다면 명성황후는 고종을 제치고 국정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고종 스스로도 주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명성황후의 의견을 청취했음을 밝힌 바 있다.

4 흥선대원군과의 운명적 대결

명성황후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흥선대원군이다. 그녀의 일생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녀와 흥선대원군이 직접 충돌한 큰 사건을 추리면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오개혁, 을미사변을 들 수 있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인들이 운현궁에 방문하고 난 뒤 더욱 행동이 과격해졌다. 군인들은 궁궐을 습격하고 왕비를 해치려고 하였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심복으로 하여금 군복으로 갈아입고 군중들을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당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의 등에 업혀 궁궐을 탈출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왕비가 이미 죽었다고 발표하였다. 청군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두 사람간의 극한적 대립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두 번째 충돌은 1894년에 6월 21일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함께 입궐하였으며 국정을 총괄하는 일종의 섭정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물리력을 직접 장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해치지는 못했지만 폐비만은 기어코 관철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입궐한 바로 다음날 이러한 취지를 담은 문건을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공사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이때 일본의 반응이 미온적이어서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했고 본인도 뒤에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결국 실각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대결은 1895년에 있었던 을미사변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군경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에도 흥선대원군은 입궐하였다. 명성황후를 해치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미 죽은 그녀를 폐비(廢妃)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의 짓으로 몰아가고자 하였다. 제2의 임오군란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이 국제사회에 드러나 외교적 고립에 처하였을 때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 것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하였다.

이렇게 명성황후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흥선대원군과 충돌하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그녀는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였다. 따라서 그녀와 흥선대원군의 충돌의 본질은 고종과 흥선대원군, 부자 사이의 충돌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이러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 민망하였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5 죽어서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명성황후는 죽어서도 고종에게 도움을 주었다. 을미사변이 초래한 거족적인 분노는 고종이 일본의 감시망에서 탈출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지방 유생들이 봉기하였다(을미의병). 이들은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존한다(復讐保形)’라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이들 지방 유생들은 과거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을미사변이 이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 것이다. 지방에서 유생들이 봉기하자 개화파 정부는 군대를 지방으로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이러한 틈을 노려 궁궐에서의 탈출 즉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고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명성황후의 국장(國葬)도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 회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명성황후의 국장은 여러 차례 연기를 되풀이하다가 그녀가 사망한 지 2년여가 지난 1897년 11월에 가서야 비로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애당초 국장 준비는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제반 절차가 다 마무리되고 마지막 산릉공사만을 남기고 있던 시점에서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궁궐에 갇혀 있던 고종의 구출을 시도한 이른바 춘생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연기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국정 주도권을 되찾았지만 명성황후의 국장은 곧바로 실시되지 못했다. “복수를 하여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춘추(春秋)』 복수론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를 직접 시해한 일본 낭인은 둘째 치고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길준(兪吉濬) 등이 일본에 망명해 있는 상태였다. 복수론은 이러한 원수를 갚기 전에는 국장을 치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1897년 5월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칭제(稱帝: 스스로 황제라고 선포함) 문제도 국장 연기의 사유가 되었다. 칭제 문제가 매듭지어져야만 국가의 오례 중에 하나인 국장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으며 그 한 달 여가 지난 11월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이 종결되었다. 결국 명성황후의 국장은 대한제국의 선포로 귀결되는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 재확립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이 과정에서 ‘황후’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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