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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

을사늑약의 치욕에 죽음을 택하다

1861년(철종 12) ~ 1905년(고종 42)

민영환 대표 이미지

민영환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민영환(閔泳煥)은 고종(高宗) 시기의 대표적인 척신(戚臣)으로 자(字)는 문약(文若), 호(號)는 계정(桂庭)이다. 고종의 외가이자 처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가문을 배경으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과 국내 정치세력의 동향이 변화하는 와중에서 민영환은 두 차례 특사로 서양의 여러 나라를 순방했고, 꾸준히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정부의 개혁 사업을 주도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직후, 민영환은 일제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며 조약 파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서 순국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 여흥 민씨 가문의 실력자로 떠오르다

민영환은 형조판서(刑曹判書) 민겸호(閔謙鎬)의 장남으로 태어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큰아버지 민태호(閔台鎬)의 양자로 들어갔다. 생부 민겸호의 누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의 아내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이며, 양부 민태호의 딸은 순종(純宗)의 왕비가 되었으니 실로 당대 제일의 척족(戚族) 가문의 일원이었던 셈이다.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이 퇴진한 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閔升鎬)를 중심으로 여흥 민씨가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실력자였던 민승호가 1874년(고종 11) 폭탄이 장치된 우편물에 의해 사망하자 민규호(閔奎鎬)가 부상하게 된다. 1878년(고종 15) 민규호가 병사하면서 민겸호가 전면에 등장하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민영익(閔泳翊)이 부상하지만 민영익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하다가 1886년(고종 23) 실각하고 만다. 이후부터는 민영환이 여흥 민씨 척족의 대표주자로 대두하게 된다.

민영환은 16세 때인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이듬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가문을 배경으로 이례적인 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급제 후 3년 만인 1881년(고종 18)에 정3품인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1882년(고종 19)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생부 민겸호가 살해당하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하였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양부 민태호까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청나라의 조선 속방화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국내 정치도 김홍집(金弘集),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 친청(親淸)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는 정책을 시도하고,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3년의 복상(服喪)을 마치고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발탁된 민영환은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친러파의 주요인물로 부상하였다. 민영환은 경제, 기술,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했다. 내무부 산하에 설치된 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 기기국총판(機器局摠辦),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병권을 장악하고 군사 분야의 개혁에 역할을 맡아 해방총관(海防摠管),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등을 역임한 것이다. 민영환은 양무사업의 중심에 있던 군사 관련 업무를 주로 관장하였으며, 『천일책(千一策)』을 집필하여 주변국에 대한 경계와 부국자강을 통한 국가 기강의 확립을 강조하며 자신의 개혁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민영환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 세력이 주도한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무부가 폐지되자 사임한다. 갑오개혁 정권에서 고종과 민씨 세력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894년(고종 31) 12월 체포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 전봉준은 공초(供招)를 받는 과정에서 민영준(閔泳駿), 고영근(高永根), 민영환 3인은 내직매관(內職賣官)하는 자들로, 이런 탐관오리들을 내쫓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거병하였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당시 세도를 떨치던 여흥 민씨의 실정(失政)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매우 컸으므로, 여흥 민씨의 대표자인 민영환이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거론된 것으로 생각된다.

3 특사가 되어 두 차례 서양을 탐방하다

갑오개혁 이후 친일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자 민영환을 비롯한 민씨 세력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민씨 세력은 이완용(李完用),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등 친미적 성향의 인물들과 연합하여, 여기에 다른 친러 인사들과 구미 외교관, 선교사까지 모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구성하고 활동했다. 정동구락부에서의 활동을 통해 민영환은 본격적으로 구미(歐美)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민영환의 외교활동에 기초 자산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해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았던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반환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규합된 친미, 친러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갑오개혁 후 실세로 등장한 박영효(朴永曉)를 실각시키고 박정양(朴定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후 고종은 대미외교를 위하여 최측근인 민영환을 주미 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임명하나,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민영환은 미처 부임도 하지 못하고 사임하고 만다.

을미사변 이후 재차 친일 정권이 성립되자, 이에 반발한 명성황후계의 친미·친러 인사들은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다. 정동구락부의 일부 인사들도 이에 호응하였으나 서리군부대신(署理軍部大臣) 어윤중의 즉각적 대처로 고종 탈취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 정동구락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사되면서 친일 정권은 무너지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고종은 민영환에게 외교관의 역할을 부여했다. 새로 즉위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단을 보내달라는 러시아의 요청에 따라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임명하여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민영환은 4월 1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나가사키, 도쿄, 밴쿠버, 뉴욕, 런던을 거쳐 5월 20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민영환은 26일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3개월 동안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고종의 친서를 황제에게 전달하고 러시아 각지를 순방하였다. 8월 20일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민영환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10월 21일에 귀국하였다. 민영환은 7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세계 일주를 한 셈인데, 이는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이었던 까닭에 국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의 기록을 정리한 여행기가 『해천추범(海天秋帆)』이다.

귀국한 민영환은 바로 군부대신(軍部大臣)에 임명되어 러시아 군사 교관에 의한 군사 양성을 주관하고, 900여명의 장병에게 러시아제 무기를 제공하여 3개월간 훈련시킴으로써 장래 고종이 환궁할 경우 궁궐을 경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이듬해인 1897년(고종 34)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했다.

고종의 환궁이 이루어지기 전, 민영환은 다시금 외교 특사로 임명되었다.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서, 또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사절인 특명대사(特命大使)로도 임명된 것이다. 1897년 3월 26일 제물포에서 출발한 민영환은 먼저 러시아에 도착하여 국서와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나머지 5개 나라를 순방한 후 다시 러시아에 돌아와 외교 사절로서 외국에 머물러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민영환은 러시아에 이어 영국에 도착한 후 갑자기 미국으로 가버렸다. 이러한 명령 위반 때문에 민영환은 7월 30일자로 면관(免官)되었다.

민영환은 두 차례의 외교 활동을 통하여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서양의 근대 문물을 흡수하고 사상의 폭을 넓혔다. 그는 상해, 일본, 캐나다, 미국 그리고 유럽을 거치면서 서양 도시의 발달을 목도하였고, 많은 근대 시설을 견학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사, 교육, 정치 체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독립신문』은 “종래의 민영환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국가 중흥의 일익을 담당할 것을 희망하였으며, 민영환은 『독립신문』과의 대담을 통해 서양 방문을 통해 “당초 꿈도 못 꿀 일을 많이 보았다”고 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민영환은 점진적이지만 실질적인 문명 진보를 추구하면서 광무개혁(光武改革)에 깊이 관여한다.

4 개혁을 도모하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 민씨 세력과 친러, 친미 세력은 갑오개혁의 급진성과 외세의존성을 비판하면서 고종을 중심으로 하는 점진적 개혁사업인 소위 광무개혁에 착수했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자주 독립을 확고히 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민영환은 군사 개혁과 황권 강화를 주도하였다. 또한 민영환은 독립협회(獨立協會),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지지하면서 민중으로부터 개혁의 동력을 얻고자 하였으며,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흥화학교를 설립하였다.

(1) 군사 개혁과 황권 강화 활동

민영환은 1899년(고종 36) 이전까지는 의정부(議政府)를 중심으로, 이후에는 궁내부(宮內府)를 중심으로 고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개혁안을 상주했으며 그 중 군제 개편안이 채택되었다. 민영환은 친위대의 증설, 시위대(侍衛隊) 편성, 무관학교(武官學校)의 개교, 원수부(元帥府)의 설치 등 군제개혁사업을 담당하였으며, 육군 부장(副將, 오늘날의 중장에 해당)으로 원수부 회계국 국장을 맡아 군대의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민영환은 군악대 설치와 국가(國歌)제정을 주도하였으며, 황실 상징인 어기(御旗), 황태자기(睿旗), 친왕기(親王旗) 제작에 나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 전력했다. 민영환은 국가의 주권(主權)을 곧 군주권(君主權)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자주 독립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주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대에 널리 공유된 것으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민영환이 민권의 문제를 경시하였던 것은 아니다.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을 축하하는 만민연(萬民宴)에 참석하여 수많은 군중이 황제를 찬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았으며, 고종에게 서양의 정치 전범(典範)을 수용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영환의 태도는 황권(皇權)을 강화하면서도 중추원(中樞院)을 통해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민권 신장을 도모하는 절충적 개혁안을 마련하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2) 독립협회 후원 활동

민영환은 같은 맥락에서 독립협회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민영환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독립자강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개혁 성향의 관료들을 옹호하고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민영환의 태도는 『독립신문』으로부터는 ‘애국·애민의 정성(情性)’으로 찬양받았으나, 고종의 측근에 포진하고 있는 친러 보수 세력의 반감을 사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민영환은 모함을 받아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독립협회와 대립하던 황국협회(皇國協會)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이후 독립협회가 친러 보수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이를 의회 설립 운동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자 민영환은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영환은 관민공동회에도 참여하여 헌의육조(獻議六條)를 발표할 때에는 독립협회의 회원임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협회의 활동을 후원함으로써 민영환은 황권의 강화와 함께 민권의 신장도 도모하였다. 비록 민권 신장의 수준을 두고 견해의 차이는 있었으나, 민영환은 독립협회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하고 고종이 황권을 더욱 강화하자 민영환은 이러한 흐름에 협력하였지만,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나갔다.

(3) 교육 활동

민영환은 정부의 개혁 사업에 동참하면서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이를 실천하였다. 특히 그는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앞서 『천일책』에서도 서양의 교육제도에 관심을 보인 바 있었다. 민영환은 임병구, 한우, 정교 등과 서울 흥북문 앞 상원동에 사립학교인 흥화학교(興化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또한 교육 진흥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여, 학문을 일으켜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주장하고 서양 각국에 유학생을 보낼 것을 역설했다.

5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하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친일 세력이 득세하는 상황 속에서, 민영환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고 친일 세력과 정면 대립하였다. 내부대신, 학부대신(學部大臣) 등 요직을 번갈아 맡아오던 민영환은 일본을 등에 업은 친일 각료들의 견제로 한직인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자주성을 상실하고 만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였으며, 유생과 전직 관료들은 끝없이 상소를 올리는 상소 투쟁을 개진하였다.

민영환은 조약이 체결될 무렵 경기도 용인에서 전실부인(前室夫人)의 묘를 이장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하였다.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조약 파기의 방법을 의논한 민영환은 백관(百官)과 함께 연명상소로써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대답을 받기도 전에 일본 헌병들은 소두(疏頭 : 상소 대표자) 조병세를 체포하고 백관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민영환은 스스로 소두가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두 차례 더 연명 상소를 올렸다. 끝까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영환은 죽기를 각오하고 궁중에서 머무르며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소두 이하 전원을 구속하여 문초하라고 명하기에 이른다. 민영환을 비롯한 백관들은 황명에 의해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에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된다.

민영환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하고 국민을 일깨우기로 결심했다. 민영환은 머물고 있던 의관(醫官) 이완식(李完植)의 집을 나서 본가로 향해 가족들을 잠시 만난 후, 다시 돌아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유서를 작성했다. 1905년 11월 30일 동 틀 무렵, 민영환은 하인을 밖으로 내보낸 뒤 자결하였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 홍만식(洪萬植), 이상철(李相喆) 등 관료들뿐 아니라 군졸이나 인력거꾼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사들이 잇따라 순국하였다. 고종은 민영환에 예를 다해 장례지낼 것을 명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6 결어

민영환은 여흥 민씨 척족의 실력자로 오랜 기간 권세를 누리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민영환은 아관파천 전후 외교활동을 통해 시세(時勢)를 깨닫고 국가 중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종래의 세도가(勢道家)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후원함으로써 민권의 신장을 지지한 것은 민영환의 개혁적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을사늑약이라는 국가적 치욕 앞에서 민영환은 자신의 목숨을 던짐으로써 황제와 국민에 사죄하고 국민을 각성시켜 이후 항일 투쟁과 독립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충정로(忠正路)의 이름은 민영환의 시호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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