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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朴珪壽]

자주적 개화를 주장하던 개화 사상의 선구자

1807년(순조 7) ~ 1877년(고종 14)

박규수 대표 이미지

박규수 초상

실학박물관

1 북학과 개화파를 이어준 징검다리

박규수(朴珪壽)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북학을 이어받아 유연하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1862년 농민항쟁과 제너럴셔먼호사건 이 상징하듯이 19세기 조선이 직면한 내우외환에 대처하였다. 국제정세에 밝았으며 개방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조선이 대외정책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은퇴한 뒤에는 북학의 실용적 사상을 젊은 개화파들에게 전해주었다.

2 박지원의 손자로 태어나다

박규수는 1807년 9월 27일 한양 북부 가회방(嘉會坊)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북학파(北學派)의 거두였던 박지원이었다. 그의 아버지 박종채는 박지원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을 집필하는 등 부친의 학문을 정리하는 데 평생을 바쳤으며 이를 아들에게 전수하였다. 그는 당시 여러 실학자들과도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그가 사숙한 선배로서는 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榘), 김정희(金正喜), 이규경(李圭景) 등을 들 수 있으며 윤종의(尹宗儀), 남병철(南秉哲), 김영작(金永爵), 신응조(申應朝), 최한기(崔漢綺) 등 당대 일류 학자들이 그의 사상적 동반자였다.

박규수는 북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중국의 학문적 경향에도 민감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외가 친척인 이정리(李正履)가 1839년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온 것도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위원(魏源)이 지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입수하여 여기에 실린 지도 등을 통해 지구의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 그가 전통적인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구의를 제작하면서 지은 명문인 「지세의명(地勢儀銘)」을 살펴보면 그가 여전히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규수가 자신의 벗 윤종의가 지은 『벽위신편(闢衛新編)』에 대해 논평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서학 즉 천주교를 근본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는 신도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하는 방법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비판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화이론적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적용방법에 있어서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박규수는 순조(純祖)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일찍부터 교유하였다. 효명세자가 머물던 경우궁 후문 너머 계동에 그의 집이 있었던지라 세자가 그의 집에 찾아와 밤늦도록 담론하기도 하였다. 1827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1828년 세자의 명으로 조부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을 바치기도 하였다. 세자가 그를 통해서 박지원의 북학을 받아들여 이를 통치의 바탕으로 삼을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1830년 급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박규수는 이 일에 큰 충격을 받고 과거 응시를 포기하였다. 그가 1848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갈 때까지 18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세자와 교유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서거하자마자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그의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집권세력의 견제를 받아 곧바로 유배를 갈 수밖에 없었고 그도 10년 뒤에 제주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처럼 효명세자의 서거는 당시 의미심장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3 1862년 농민항쟁을 수습하다.

박규수는 1848년 증광시(增廣試: 조선 시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42세의 나이로 뒤늦게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는 그 후 약 30년간 관직생활을 하였는데 이 기간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왕조말의 여러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며 여기에 서양세력의 침략까지 가중되고 있었다. 이제 막 벼슬길에 들어선 그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는 이러한 내우외환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박규수는 184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된 것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용강현령, 부안현감, 곡산부사 등 지방관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854년에는 경상좌도 암행어사를 맡아 지방 서리들과 수령들의 비리를 척결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그의 보고에 따라 많은 탐관오리가 처벌받았으며 반대로 포상을 받은 자도 있었다.

당시는 삼정문란 즉 조세수취 과정에서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여 나라의 근간까지 흔들 정도였다. 백성들로부터 걷은 조세가 지방 서리와 지방관들에 의해 중간에 누수되어 중앙에 상납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부담은 백성들에게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암행어사로서 집중적으로 감찰한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곪을 대로 곪은 삼정문란 문제는 1862년 대폭발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 전국으로 파급된 것이다.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박규수는 안핵사로 임명되어 수습을 맡았다. 그에게 수습을 맡긴 데에는 그가 8년 전 경상좌도의 암행어사로서 활약한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 지역의 사정과 민란의 전개과정, 주도세력 등을 면밀하게 조사한 후 진주농민봉기(晉州農民蜂起)는 백낙신(白樂莘)의 탐욕과 포학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환곡(還穀: 곡식을 사창社倉에 저장하였다가 백성들에게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일)과 도결(都結: 고을의 구실아치들이 공전公錢이나 군포를 사사로이 사용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결세結稅를 정하여진 금액 이상으로 물리던 일)을 지나치게 징수 당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탐관오리는 엄벌에 처하되 난민은 주동자와 가담자를 나누어 가급적 정상을 참작하며, 삼정문란 문제는 비단 진주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구조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 특별기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건의에 따라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고 하는 기관을 설치하였다.

박규수가 안핵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 고종(高宗)이 즉위하였다. 고종이 즉위한 직후 그는 특별히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고종이 익종 즉 효명세자의 대통을 계승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과거 세자와 관계가 깊었던 그를 중용한 것이다. 그는 1865년 경복궁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는 등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개혁정책도 뒷받침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부임하였다.

4 서쪽에서 몰려오는 파도에 의연히 맞서다

박규수가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1866년은 서양에서 몰려오는 파도가 조선에까지 밀어닥친 해이다. 그해 8월 프랑스 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육박했으며 9월에는 강화도를 점령하여 조선정부를 압박한 사건인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그가 관찰사로 부임한 평양에서는 그보다 앞선 7월에 이른바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사건이 일어났다. 그도 서양에서 몰려오는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제너럴셔먼호사건은 미국의 무장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조선군 장교를 구금하는 한편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저지른 사건이다. 당시 평양의 군민은 이 배의 만행에 분개하여 화공을 벌여 이 배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평안도 관찰사로서 이 배에 대한 공격을 총지휘하였다.

이렇게 이 사건 당시 박규수는 단호하게 대처하였지만 늘 강경일변도로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1867년 1월 23일 미국 군함 와추세트(Wachushett)호가 황해도 장연에 도착하여 제너럴셔먼호의 종적을 탐문하고 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그는 이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중국을 통해 미국 측에 전달하였다.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둘러싼 외교교섭은 이후에 수차례 이어졌으며 양측의 무력충돌인 신미양요의 진행과정에서도 외교문서가 오고 갔다.

이러한 외교문서의 작성은 대부분 박규수가 전담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제너럴셔먼호가 미국 선박인지도 몰랐으며 그들이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부득이 응징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저쪽이 호의로써 오면 우리도 호의로써 응하고, 저쪽이 예(禮)로써 오면 나도 예로써 접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통례이다”라고 하면서 시종 당당하면서도 유연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렇게 그가 능동적으로 위기관리를 시도한 것은 국제 정치의 현실에 대해 나름대로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5 조심스럽게 문호 개방을 주장하다

박규수가 중국에 처음 다녀온 것은 1861년의 일이다. 당시는 제2차 아편전쟁의 와중에 영불연합군에게 북경이 점령당한 상태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열하로 피신한 함풍제(咸豊帝)의 안부를 묻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으며 그는 부사의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서세동점의 현실을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가 두 번째 중국에 다녀온 것은 1872년의 일이다. 이번에는 동치제(同治帝)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그는 정사의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양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한창 추진되고 있었다. 그는 귀국 후 중국이 대포와 화륜선 제조 기술을 배워 직접 만들기 시작하면서 서양인은 물러가는 추세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한 안목이 넓어지면서 서양에 대한 즉물적인 적대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부터이다. 고종은 친정(親政)에 나서면서 흥선대원군 시절에 비해서 정책적 차별화 시도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영역이 바로 대외정책이었다. 당시의 외교 현안은 일본과의 서계 문제이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신정부가 구성되면서 이를 알리는 외교문서인 서계(書契)를 쓰시마번(対馬藩)을 통해서 동래부(東萊府)에 보내왔다. 조선정부에서는 이 외교문서가 전통적인 형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양국 간의 외교 마찰이 빚어지고 있었다.

고종은 이 문제부터 전향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 사이에는 신중론이 지배적이었고 아직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흥선대원군은 서계 접수를 맹렬히 반대하였다. 박규수는 우의정으로 있을 때는 조정 내에서 서계 접수의 필요성을 주창하였으며 1874년 9월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는 흥선대원군에게 서신을 보내 설득하려 애썼다. 이렇게 그는 고종의 대외정책 변경을 다각도로 지원하였으며 결국 고종은 1876년 문호개방을 결심할 수 있었다.

6 그의 사랑방에서 형성된 개화파

박규수는 1874년 9월 우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가 되었지만 이 무렵부터는 국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된 1876년 1월에는 연로한 관원들을 대우하는 기관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12월 27일 서울 북부 재동에서 사망하였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그의 행적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대외강경책을 주장하다가 고종 친정기에는 일본과 통교할 것을 주장하는 등 시의에 영합하여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윤식(金允植)은 그가 제너럴셔먼호 당시 강경책을 펼친 것은 당시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을 뿐 그의 본래 생각은 문호를 여는 것이었다고 하여 황현과는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김윤식은 개화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기준으로 박규수를 개국론자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박규수의 문집이 그의 손에 의해 간행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박규수가 원래부터 개국론자였다고 하는 그의 설명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규수는 개화파의 스승이었던 셈이다.

유길준(兪吉濬)도 ‘어렸을 적 한시를 지어 박규수 대감에게 보여드렸더니 재주가 이토록 뛰어난데 왜 시무(時務)의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박영효(朴泳孝)도 1931년 이광수(李光洙)와 행한 인터뷰에서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 대감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그리고 나의 형 박영교(朴泳敎)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집 사랑에서 모였지요’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렇게 박규수의 사랑방은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등 젊은 개화파 정치세력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다. 개화파의 형성과정에 박규수 이외에 오경석(吳慶錫)과 유홍기(劉鴻基) 등 중인 지식인의 역할이 주목되기도 하지만 오경석의 경우 그의 두 번째 사행에 역관으로 참여한 바 있다. 그와도 기맥이 통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조부 박지원의 북학과 개화파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이 그가 맡은 역사적 사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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