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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朴泳孝]

근대 국가 수립을 꿈꾸던 왕실의 엘리트, 친일파 거두가 되다

1861년(철종 12) ~ 1939년

박영효 대표 이미지

박영효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화사상의 교육과 출사

박영효(朴泳孝)는 강점 이후 일본의 작위를 받고 식민통치에 협조하며 영화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 인사이다. 19세기의 박영효는 조선왕조의 왕족으로서 개화를 주장했던 정치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든가 일본세력을 끌어들여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는 등 한계를 보이지만, 그래도 조선의 근대화와 이를 위한 개혁을 꿈꾸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효는 1861년 6월 12일 경기도 수원에서 반남(潘南) 박씨 가문의 진사 박원양(朴元陽)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매우 어려웠지만 일가였던 당시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의 주선으로 12세가 되던 1872년 4월 철종(哲宗)의 넷째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을 하며 일약 부마(駙馬)가 되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박원양 역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오르며, 가계도 한층 나아지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영혜옹주가 결혼 후 4개월 만에 죽으면 서 끝났지만 부마로서 박영효의 지위는 계속되었다.

이즈음 박영효의 개화사상 형성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박규수의 집에 드나들며 동학들을 만난 것이다. 북학파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는 조선정부의 사신으로 청국을 방문해 그곳에서 서양의 정치·경제·역사·풍속 등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접하는 가운데 해외사정을 잘 알게 되었으며, 1874년 11월 우의정에서 물러나 자신의 집을 찾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박규수의 문하에는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과 같이 이후 개화파로 활약하게 되는 이들이 있었는데, 박영효는 14세가 되던 1875년부터 박규수의 집에 드나들면서 이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사상을 배웠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1877년 박규수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박규수의 문인들은 박규수의 사후에도 유홍기(劉鴻基)의 지도를 받으며 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박영효는 개화사상을 교육받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 혜민서제조, 판의금부사를 역임하며 관직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며,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비밀리에 ‘개화당’(開化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며 개화사상을 품고 있던 이들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즈음 1882년 9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청국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친청적인 인물들이 대거 기용하였다. 조선정부는 그 수습을 위해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는데, 이때 박영효는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수신사 일행은 박영효 이외에도 김옥균, 서광범을 비롯하여 유혁로(柳赫魯), 변수(邊燧) 등 개화당 소속의 인사가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수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갈 때 선박에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최초로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수신사로서 박영효는 일본에 3개월 간 체류하는데, 이때 수신사들의 활동을 『사화기략(使和記略)』으로 저술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박영효를 필두로 한 수신사 일행은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각국 외교관들과 접촉하는 등 폭넓은 외교활동을 벌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잇달아 영국, 독일 등과 조약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특히 임오군란 이후 극심해지는 청국의 간섭을 견제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구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외교활동과 더불어 박영효는 일본정부의 관리들이나 민간지도자들을 폭넓게 만나는 동시에 일본의 신식문물에 대해서도 시찰하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상을 직접 목도하였으며, 이 경험은 귀국 후 개화정책으로 연결되었다.

2 개화정책의 좌절과 망명

수신사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귀국 직후인 1883년 1월 7일, 박영효는 현재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박영효는 임명된 직후부터 개화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박문국(博文局)의 설치이다. 이는 신문을 간행하기 위한 기관인데, 여기에는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오로(井上角五郞)가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며, 당시 외아문(外衙門)에 있던 유길준(兪吉濬) 역시 신문 발간에 깊이 관여하였다. 근대적 대중매체로서 신문의 발행과 함께 박영효는 한성의 도로를 정비하고자 하였으며 순경부(巡警部)를 설치하여 수도 한성의 치안을 쇄신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박영효의 이러한 시도는 민씨 척족 세력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왕후 역시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결국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이 된 지 3개월 만에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옮겨 갔다. 광주유수로서 박영효가 힘쓴 일은 신식군대의 양성이었다. 박영효는 일본 육군도야마(戶山)학교에서 신식훈련을 받고 돌아온 신복모(申福模)를 교관으로 하여 1천 명의 군대를 양성하였는데, 이들은 이후 갑신정변에서 청국군을 저지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렇지만 서양식 군대의 양성 역시 왕후 민씨 일가의 의심과 압력을 받으며, 박영효는 6개월여 만에 광주유수의 직에서 사임하였다.

광주유수에서 물러난 이후인 1883년 12월 박영효는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다녀온 홍영식(洪英植)을 만나 향후의 일들을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이후 상황은 박영효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친청파 관료들에 맞서 세력을 규합하고 개화 정책의 추진을 위한 자금 마련이 어려웠다. 개화당 인사들은 이 자금을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조달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김옥균이 일본정부와 교섭했지만 1884년 5월 김옥균은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권력에 가까우면서도 개화당에 우호적이었던 민영익(閔泳翊)이 집권세력과 손을 잡게 되면서 개화당이 구상했던 개혁은 실현이 난망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개화당은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고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바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개화당 인사들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을 기해 고종(高宗)을 경우궁(景祐宮)으로 피신시킨 후 반대파를 살해하며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했지만 12월 6일 청국군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의 실패로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과 형 박영호(朴泳好)의 관직은 박탈되었고, 박영효 자신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망명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는 냉담하였다. 조선 내에서 실권이 완전히 사라진 이들의 효용가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박영효는 1885년 5월 서광범,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지만,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와 영어를 배우는 한편 1888년 1월 조선정부의 근대화를 촉구하는 ‘개화상소(建白書)’ 를 발표하기도 하고 1889년에는 도쿄에 있는 조선의 유학생들을 규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1893년에는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세워 조선인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친린의숙 설립 후 박영효는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1893년 말 조선정부에서는 이일직(李逸稙)에게 박영효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내려 잠입시켰지만, 미수에 그쳤다. 이일직은 이후 일본에서 김옥균의 암살도 시도하였다.

3 복권과 두 번째 망명

갑신정변 실패 후 10년이 지난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일본은 진압을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서울로 진격한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 왕과 왕후를 대신하여 대원군을 내세우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내정 개혁을 추진토록 하였다. 이를 위해 박영효는 복권되어 1894년 12월 내무대신(內務大臣)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내각총리대신의 사무를 대리하며 각종 개혁사업을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1895년 7월 7일 박영효가 가까운 시일 내에 왕후를 살해하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박영효가 두 번째 망명생활을 하던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中樞院)에서는 각 부의 장관으로 적합한 인물 11명을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 회원들이 박영효와 서재필을 뽑았다. 그렇지만 고종은 박영효는 반역죄가 있으며, 서재필은 외국 국적을 가졌다는 것을 이유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여기서 고종이 말한 박영효의 반역죄는 1898년 6월 의화군(義和君) 강(堈)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오는데, 박영효가 서울에 있는 안경수(安駉壽)를 사주하여 왕위를 의화군에게 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박영효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조선의 정계 복귀를 위한 공작을 벌였으며, 특히 독립협회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로는 정치자금을 모은다거나 현재의 조선정부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는 등 정권 장악을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박영효의 이러한 공작들은 실패 혹은 발각되었지만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그는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07년 6월 부산에 도착한 박영효는 고종의 부름으로 왕을 알현하며 죄를 용서받고 직첩(職牒: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다시 회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녹봉과 집까지 하사받았다. 또 박영효 귀국환영회가 개최될 정도로 조선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7월 19일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박영효가 궁내부대신에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당시 내각의 수반이었던 이완용(李完用)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박영효는 이에 반대하였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제주도로 1년간 유배를 떠나 관직에서 물러나 국망을 지켜보았으며, 이후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4 합방 이후의 친일행적

조선에 다시 돌아온 이후 박영효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려는 것을 넘어서 일본의 강점을 인정하고 일본의 침략논리에 동조하는 행적을 보인다. 조선에 돌아와 사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07년 7월 박영효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한일동지회(韓日同志會)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으며, 강점 직전인 1909년 6월에는 단군(檀君)과 조선의 태조, 일본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신궁의 건립을 목적으로 하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를 설립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의 친목을 강조하며 신화적·역사적·지리적으로 양국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하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던 당시 강조하던 논리인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다. 이처럼 박영효가 신궁봉경회처럼 조선과 일본의 신화적 연관성을 강변하고자 하는 단체에 앞장섰다는 것은 이미 친일의 길에 깊이 빠져 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박영효는 ‘조선귀족령’ 에 따라 최고위 작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벌여 나갔다.

1911년 1월 합방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사공채 28만원을 받았고, 같은 해 9월에는 ‘천황의 성읍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에 회장으로 취임하여 1918년 5월까지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2년 1월에는 일본인 고위관료과 조선인 관료 및 귀족 등 유지층을 중심으로 경학(經學)과 시문(詩文)의 연구를 목적으로 결성된 이문회(以文會) 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15년 1월에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선전하기 위해 기획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단체에 가담하는 것만이 아니라 1913년 4월에는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7월에는 조선귀족들의 농장경영 등을 위해 조직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普植園) 의 발기인 겸 조합장, 1918년 10월 설립된 조선식산은행 이사와 같이 일본자본의 도입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친일행적은 3·1운동 이후인 1921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친임관(親任官)이 되면서 더해갔다.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日鮮融和)를 위한 동민회(同民會) 의 발기인 겸 고문을 거쳐 1926년 3월 이완용 사망 이후부터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어 1939년 사망할 때까지 연임했으며, 이 기간 중 중추원과의 관련 속에서 진행된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 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1927년 1월 일본 다이쇼 천황의 장례에 조선 귀족을 대표하여 참석했으며 1928년 2월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에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2년 12월에는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는데, 이러한 이력들은 당시 일본으로부터 수작한 조선귀족 가운데에서도 박영효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친일행위의 공을 인정받아 1934년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에서 주는 건국공로장과 만주사변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가 주는 금배(金杯: 금으로 만들거나 도금한 잔)를 받았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박영효는 전시체제에 접어들어 육해군 국방비 500원을 헌금하였으며, 1939년 4월에는 조선군사후원연맹에 금비녀 등 1200여 원 가치의 금품을 헌납하는 한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의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러한 박영효가 1939년 9월 21일 사망하자 일본 정부는 욱일대수장(旭日大綏章)을 추서하여 식민통치에 협조한 그의 공로를 기리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실의 부마였던 박영효는 젊은 시절에는 개화사상가로서 조선의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중심인물이었지만, 국가가 위기상황에 빠지고 국망이 눈앞에 닥친 1907년 이후로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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