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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孫秉熙]

동학의 제3대 교주, 동학을 천도교로 전환하다

1861년(철종 12) ~ 1922년

손병희 대표 이미지

손병희 초상화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동학 입도와 교단 통솔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동학·천도교의 제3대 교주로 자(字)는 응구(應九), 호(號)는 의암(義菴)이다. 22세 때인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당시 동학교단은 손병희를 비롯하여 손천민(孫天民), 김연국(金演局), 박인호(朴寅浩) 등 새로운 인물들이 입도하면서 교단 체제를 정비하고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손병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농민군이 패하면서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 처형되었고, 손병희는 은신하여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동학세력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삼남지방을 떠나 황해도, 평안도 등 북부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들이 북부지방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것은 갑오정권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역시 동학농민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학의 잔존세력으로 알려지면 즉시 처벌되었고, 지속적으로 감시되고 있었다. 동학농민이 겪어야 했던 억압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농민전쟁 당시 동학농민의 공격을 받은 지방의 지주․양반세력은 사적(私的)인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심지어는 재산을 뺏는데 동학농민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하였다. 결국 1898년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지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동학세력은 조직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이었다. 이들은 1896년 1월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의암(義菴), 구암(龜菴), 송암(松菴)이라는 천도교의 도호(道號)를 받고 교단 조직 재건작업을 주도하였다. 최시형은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북부지역에서의 포교활동을 중요시하였으며, 손병희에게 도통(道通: 정통 계승자)을 전수했다. 손병희는 1897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단을 통솔하게 되었다. 교단의 주도권을 놓고 손병희와 경쟁하던 손천민은 1900년 8월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김연국도 1901년 6월 체포되어 1904년 12월 석방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고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반면 손병희는 포교에 전력을 기울여 이후 자신의 인적, 물적 토대가 된 황해도, 평안도 등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주도권을 확립해 나간 것이다.

2 일본에서의 활동과 러일전쟁

손병희는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제정세와 근대 문물을 살피는 가운데 문명개화운동으로 대대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였다. 동학농민운동에서 드러난 동학의 입장은 반봉건(反封建)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노선이었다. 농민적 입장에서 신분제와 지주제로 요약되는 봉건지배체제의 변혁을 꾀하고,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망명생활을 통해 국내 지배층과 외세를 모두 거부하는 동학의 노선이 시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손병희는 서양의 발달된 물질문명을 보면서, 그것을 ‘천지가 크게 변하는 창시(創始)의 운(運)’이라고 생각하였다. 문명화가 세계의 대세라는 것은 국외에 있는 그에게 너무나 확연한 사실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농민층의 ‘반란세력’이 아닌 시세를 아는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동학세력의 노선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내 집권세력으로부터 엄혹한 탄압을 받고 있던 처지에서 동학을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화파세력과 동학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일본을 끌어들여 정치적 입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문명개화 노선으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개화론으로의 전환을 위해 망명개화파,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손병희는, 1902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을 동학에 입교시켜 자신의 참모로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망명개화파세력들을 끌어들인 손병희는 1903년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여 동학의 노선전환을 공식화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이라는 세 가지 싸움인 삼전(三戰)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원의 부원(富源: 경제적 부를 생산할 수 있는 근원이나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재전, 외교관을 양성하여 각국과의 외교를 잘하자는 것이 언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동학을 국교로 하자는 도전에 근본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명개화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한 손병희는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러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리적 관계, 전쟁에 임하는 동기, 군략과 병기문제 등을 들어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가 패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럼으로 한국의 형편상 반드시 러시아와 싸워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전쟁에 이길 만한 편에 가담하여 공동출병 하여 승전국의 지위를 얻어야 하고, 그 지위를 얻은 뒤에는 강화회담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국가만전(國家萬全)의 조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 당국과 한국 정치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뒤에 일본을 위하여 러시아를 치고 다른 한편으로 국권을 잡은 뒤에 제 방면을 혁신하면 우리 한국의 재생의 길은 이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일환으로 일본에 군자금 1만원을 헌금하는 한편, 국내의 동학조직에 일본군을 지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이용구(李容九)와 일본군 통역이었던 송병준(宋秉畯)을 매개로 일본 군부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였다. 일본군의 신뢰획득을 통해 한국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종교, 정치결사로서의 행동의 자유를 얻겠다는 의도였다. 동학은 배일세력이 아니며, 일본군의 군사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 역시 군사 행동상의 안정, 한국 국내 치안유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였다. 일본군의 지원이 확인되자 손병희는 이용구에게 동학세력을 기반으로 한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하였다. 민회 조직은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1904년 9월 진보회(進步會)로 연결되었고, 12월 일진회(一進會)와 합동하였다. 이들은 동양평화를 위해 러일전쟁에 참여한 같은 황인종인 동맹국 일본을 돕는다는 방침을 명확히 하고, 철도부설과 군수물자 운반 등을 통해 일본군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손병희는 일진회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일진회가 1905년 11월 보호국 찬성에 대한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친일행위를 노골화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일진회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이 자신들과 일치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3 천도교 창건과 조직정비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 명의로 『제국신문(帝國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천도교 창건을 알리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리고 손병희는 이듬해 1월 천도교인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하였다. 손병희는 귀국 직후인 1906년 2월 10일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발포하였다. 「천도교대헌」은 제1장에 대도주에 관한 항목을 두었다. 그 내용은 ‘1조 천(天)의 영감으로 계승함, 2조 도(道)의 전체를 통리함, 3조 교(敎)를 인계(人界)에 선포함’이었다. 특히 3조에는 교단 운영과 관련된 ‘종령(宗令) 발포, 공안(公案) 인준, 교직(敎職) 선임’ 등을 대도주의 역할로 규정하였다. 즉 손병희는 「천도교대헌」을 통해 천도교단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와 권한을 ‘합법적’으로 갖게 된 것이었다.

손병희는 「천도교대헌」에 따라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고문실(顧問室) 현기사(玄機司) 이문관(理文觀) 전제관(典制觀) 금융관(金融觀) 서응관(庶應觀) 등의 부서를 두었다. 교단 지도부는 도사(道師) 육임(六任), 연원대표인 교령(敎領)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6년 3월 3일 전국적으로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하고, 연원대표인 교령을 교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교무를 담당하는 임명직 교구장과 천주에 대한 성념(誠念)과 사회에 관한 교화(敎化) 등을 담당하는 종신직 교령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교무행정 기구인 교구(敎區)와 정신교화 기구인 연원제(淵源制)에 입각한 이원적 조직체계가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손병희는 이용구, 송병준에게 “금일 일진회의 지부가 각 군에 배치되어 정계 대소사를 간섭하니 회의 범위 가히 팽창하다 할지나 그러나 지부 직원이 다 시무(時務)에 난숙(爛熟)치 못하고 집무상태에 정당면목(政黨面目)을 보지(保持)치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구시외겁(舊時畏㤼: 옛적을 두려워하고 겁냄)의 여기(餘氣: 아직 남아 있는 버릇이나 관습)로써 갑자기 대기발양(大氣發揚: 큰 기운이 일어남)의 시(時)를 만나 많이 남용과분(濫用過分)하는 자 있음으로 세상의 비방을 초(招: 초래하다)할 뿐이니 이로부터 지방 지부를 폐하고 단(但) 경성본부만 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용구․송병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일진회에 대한 일반민중의 반감이 천도교단에까지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손병희는 1906년 9월 ‘교정분합설(敎政合分說)’을 제시하며, 이용구와 송병준 등을 출교시키고 일진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천도교에서 떠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손병희는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천도교리의 체계화에 노력하였다. 각종 교리서들이 천도교중앙총부 명의로 편찬되었다. 특히 1907년 출간된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인내천(人乃天)을 천도교의 교의로 공식화하였다. 이후 손병희와 천도교단에서는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인내천 교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인내천은 한편에서 천도교 종교의식의 원천이 되어 온갖 도법(道法)과 교화(敎化)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천도교 정치사상의 근저가 되어 온갖 이론과 행동을 규정짓게 되었다. 즉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포덕천하(布德天下: 덕을 천하에 편다는 뜻으로, 세상에 천도교를 널리 보급함을 이르는 말), 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백성을 구제함)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지상천국 건설이란 ‘이 땅위에 영육쌍전(靈肉雙全: 정신과 육체를 모두 온전하게 보존한다)의 천도교적 이상 세계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지상천국은 어떤 특정한 형식과 조건을 갖춘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시대 시대에서 각각 보다 좋은 신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상천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가 현실 사회 문제 개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여건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천도교에서는 새로운 사회(=지상천국)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종교적) 교화는 물론 물질적(=정치적)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종교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의 개혁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곧 ‘천도(天道)’의 완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이 성신쌍전(性身雙全), 교정일치(敎政一致: 종교와 정치는 일치함)라는 용어로 정리되어 1912년 4월 천도교 교리강습소 개소식에서 행한 손병희의 법설을 통해 천도교리로 선포되었다.

4 3·1운동 참여

손병희와 천도교단은 3·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각 기관이나 연원을 대표한 핵심지도자였던 손병희 권병덕 최린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 등 15명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처럼 손병희와 천도교단이 3․1운동의 준비와 확산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은 ‘성신쌍전, 교정일치’라는 천도교리와도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이는 손병희가 3·1운동 전날인 1919년 2월 28일에 대도주 박인호에게 준 ‘금일 세계 종족 평등의 대기운 하에서 우리 동양 동족의 공동 향복(享福)과 평화를 위하야 종시일언(終始一言)을 묵(黙)키 불능함으로 자에 정적(政的) 방면에 일시 진참(進叅: 참여함)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유시문(諭示文)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손병희는 3·1운동 관련 재판과정에서도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 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여, 정치와 종교의 유기적인 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강제병합 후 한국인을 항상 압박만 하고 관리로 채용하지 않는 등 정치적 차별이 심각함을 문제 삼았다. 손병희는 3월 1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상춘원에서 요양하던 손병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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