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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孫華仲]

전봉준과 함께 새 세상을 꿈꾸다

1861년(철종 12) ~ 1895년(고종 32)

손화중 대표 이미지

손화중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 개요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동학의 대접주(大接主)이자,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주역으로서 황토현·황룡촌 전투의 승리에도 기여했으나,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 동학 지도자로의 성장

손화중은 1861년 전북 정읍에서 아버지 손호열(孫浩㤠)과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 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인 밀양 손씨(密陽 孫氏)는 당시 정읍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았지만, 19세기 이후 이렇다 할 학자나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향반(鄕班)’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그래도 집안은 비교적 넉넉하여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12세 때 고흥 유씨(高興柳氏)와 혼인한 손화중은 20대에 처남 유용수(柳龍洙)와 함께 『정감록(鄭鑑錄)』의 이상향인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다니다가 지리산 청학동에서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다. 입도 시기는 1884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입도 후 2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도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전북 정읍(井邑) 농소리(農所里), 입암(笠岩) 신면리(新綿里), 무장(茂長) 등 여러 곳을 옮기며 포교에 전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고창과 무장 일대에 엄청난 수의 민중들을 동학에 입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1894년 무렵에는 이웃 마을에서도 손화중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전라도 지역 동학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교주인 최시형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점이다. 손화중은 1891년 공주에 은거하던 최시형을 찾아가 만난 이래, 그가 익산·부안·고부 등지를 순회할 때도 만나서 지도를 받았다. 또한 민심을 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1892년 8월의 이른바 선운사 마애불 비기 탈취 사건이었다. “비결(祕訣)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망할 것이오. 망한 후에 다시 흥한다”는 믿음이 전하던 선운사 마애불에서 손화중이 비기를 꺼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 사건은 손화중의 조직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신비성까지 배가시켰다.

이후 1892년 11월에 전북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자 손화중은 많은 교도를 동원하였다. 이를 기회로 삼례 집회 해산 후에는 동학교도들이 무장군수에게 빼앗긴 지목전 천냥을 회수하기도 했다. 또한 광화문 복합상소에도 호남의 대표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고, 그해 말 동학의 조직 개편에서 손화중은 전북 정읍포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손화중은 겨우 33세의 젊은 나이로, 동학 50여 포의 지도자 중 하나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3 동학농민운동의 1차 봉기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룬 손화중의 동학 조직은 고부 민란을 일으키려 한 전봉준의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1888년경 손화중의 조카인 손여옥(孫如玉)을 매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손여옥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해 민란을 결의한 사발통문의 서명자 중 하나였다. 이들은 1893년 11월에 손화중의 힘을 얻고자 집으로 찾아와 거사를 논의했으나, 손화중은 교주 최시형의 비폭력주의와 전략상의 어려움을 근거로 참여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1894년 1월 고부 민란 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동학교도들을 탄압하자, 3월 초에 전봉준은 손화중에게로 피신하여 이후를 도모하였다.

고부 민란에 대한 관군의 대응이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자, 손화중, 김덕명(金德明), 김개남 등 이 지역 동학의 대접주들도 전봉준과 힘을 합쳐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들은 밀사를 시켜 충청도와 금산 지역에도 격문을 보내 호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3월 20일 최시형의 탄신일을 즈음하여 무장의 당산마을 앞 들판에서 거사를 일으키고 무장 포고문을 발포하였다. 이것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1차 봉기이다. 3월 25일 부안에서 열린 백산대회에는 8천여 명의 농민군이 집결했는데, 그중 약 3,500명이 손화중의 세력이었다고도 한다. 무장을 거사지로 선택한 것도 손화중의 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였다니, 대접주 중에서도 최연소자였던 그의 세력과 조직력을 짐작할 만하다.

1차 봉기에서 손화중은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總管領)을 맡아, 김개남은 남원 및 인근의 동학군을, 손화중은 무장·고창 지역과 장성·광주 인근 지역의 농민군을 통솔하였다. 농민군은 무장, 고부, 백산, 황토현 전투, 나주, 장성 황룡촌 등에서 승리하여 공세를 이어갔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농민군의 희생도 컸고, 정부가 청의 군대를 끌어들여 농민군을 진압하려 함을 안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조건으로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5월 초에 철병하였다. 손화중은 김덕명, 김개남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전주 입성 때까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이후 전봉준은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자 금구 원평에 머물며 이를 통솔했고, 손화중은 무장과 영광에, 김개남은 남원에 각각 근거를 두었다.

4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

남원에서 김개남은 곧장 재봉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집강소 체제를 이어가길 원했던 전봉준은 이를 말리려 했고, 손화중도 뒤따라 와서 “우리들이 기의한 지 반년이 되어 비록 한 도(道)가 호응했지만 이름난 사족이 따르지 않고 재물 있는 자가 따르지 않고 글에 능한 선비가 따르지 않는다. 서로 접장이라 부르는 자는 어리석고 천한 무리로 화 만들기를 즐기고 도둑을 일삼는 무리뿐이다. 인심의 향배를 경험해보니 일이 반드시 성공치 못할 것”이라며, 사방에 흩어져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김개남은 끝내 듣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중에도 온건파에 속한 손화중은 농민군의 과오를 인식하고 자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주 최시형도 도를 빙자하여 물의를 일으키지 말 것을 당부하는 「통유문(通諭文)」을 발표하였고, 철병 직후인 5월 전라도에서도 “도인이라 칭하면서 본업인 농업에 힘쓰지 아니하고 민심을 선동하면 이는 곧 반란의 무리”라며 화해하고 근신하라는 통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진압군 파병 요청을 받은 청이 군대를 파견하자, 천진조약(1885)을 핑계로 일본도 6월에 군대를 파견해서는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배제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조선의 전쟁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먼저 6월 21일에 경복궁을 점령한 것이다. 게다가 8월에 일본군 및 개화파를 치도록 촉구하는 대원군의 밀지가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전봉준과 손화중 등도 9월 초부터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충청도에 있던 교주 최시형도 반대의 입장을 바꾸어 마침내 봉기를 허락하자, 10월 12일 농민군은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삼례를 출발하여 북상하기 시작했다. 전라·충청 일대의 농민군이 총동원되어, 전봉준과 손병희(孫秉熙)는 북상하고, 김개남은 북상군의 거점지인 전주에 남아 뒤를 대비하며, 손화중과 최경선(崔景善)은 후방을 수비하는 형태의 작전이었다.

손화중은 9월에도 광주 일대를 지키며 전쟁에 필요한 돈이나 식량을 조달하였다. 이후 북상군에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과 함께 나주와 광주 일대에 남은 것은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해올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전봉준이 논산을 출발한 10월 21일에 농민군으로서는 등에 찔린 가시와도 같은 나주를 공격했지만, 화력의 차이로 참패했다. 이 때문에 공주로 북상하던 주력군이 김개남과 손화중에게 결합을 요청했지만 즉각 합류할 수 없었고, 11월 초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궤멸되었다. 주력군이 관군·일본군·민보군의 연합세력에 각처에서 패배하고 11월 말 원평·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자,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손화중도 12월 1일 농민 군대를 해산했다.

5 체포 및 처형

농민군 해산 후 손화중은 광주에서 고창으로 올라와 이봉우의 재각에 은신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을 생포한 관군이 자수하지 않으면 아들을 대신 처형하겠다고 하자, 손화중은 이봉우에게 자신을 관에 고발하고 상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리하여 손화중은 1895년 1월 6일 수강산 산당(山堂)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인계된 후 나주 감옥에 갇혔다. 이곳에서 손화중이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인’으로 칭하자, 함께 투옥되어 있던 전봉준은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라며 사람을 잘못 보고 거사를 도모했다며 질책했다. 이 역시 양반 출신의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손화중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러한 손화중도 서울로 압송되어,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3월 29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손화중이 “동학당이라 칭하는 비도(匪徒)의 두목”으로서, 고부 군아(軍衙: 군무를 맡아보던 관아)로 들어와 군기를 탈취하고 전라 감영군을 공격했다는 것 등 주로 1차 봉기 때의 활동이 사형 판결의 근거였다. 이를 통해서도 역으로 1차 봉기 때 손화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판결은 그날로 왕의 재가를 얻어, 3월 30일 새벽 손화중은 전봉준·최경선·김덕명·성두환 등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또한 동생 손익중과 처남 유용수도 처형당했고, 조카 손여옥 등 많은 친척들이 처형당하거나 체포령이 내려져 정읍의 손씨들은 각처로 흩어졌다. 이러한 난리 통에 손화중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지만, 직계 자손들은 살아남아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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