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신돌석

신돌석[申乭石]

평민 출신으로 의병의 거목이 되다

1878년(고종 15) ~ 1908년(순종 2)

신돌석 대표 이미지

신돌석 동상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신돌석(申乭石)은 1878년 태어나 1908년 12월까지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30년 생애 중 1906년 4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2년 8개월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벌였다. 주된 활동 범위는 남쪽으로는 영덕(盈德)과 포항, 북쪽으로는 강원도 삼척 남부, 서쪽으로는 영양(英陽)과 청송(靑松)에 이르렀다.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장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일본군의 집중적인 추적과 토벌 작전에도 끝내 잡히지 않았으나, 부하의 손에 살해당하여 생을 마감했다. 해방 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追敍)되었다.

2 출생과 성장

신돌석은 1878년 음력 11월 3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해(寧海, 지금의 영덕군 지역)에서 아버지 신석주(申錫柱)와 어머니 분성 김씨(盆城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본명은 태호(泰鎬), 자(字)는 순경(舜卿)이었고, 우리가 쓰고 있는 신돌석이라는 이름은 아명(兒名)이다.

그의 조상은 영해 지방의 향리 신분이었으나 19세기, 즉 신돌석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대에 이르면 향리의 직책을 맡지 못하는 지위까지 집안이 몰락했다. 그의 고향마을은 대체로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으며, 그가 양반처럼 의관을 갖추었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있다는 일화에서 그의 신분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기운이 셌으며, 목소리가 웅장해서 종종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후 신돌석을 추적했던 적군인 일본군조차 그가 여력(膂力: 근육의 힘)이 강하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그는 만 18세 되던 1896년에 의병이라는 조직에 첫 발을 내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낭인(浪人)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상투를 자르게 한 단발령이라는 두 가지 폭거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을미의병으로, 1895년 연말에 일어나 1896년 가을까지 전개되었다.

1896년 의병 활동 이후 6~7년이 지난 1902~1903년 경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신돌석은 부인인 청주 한씨(淸州 韓氏)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 후에도 집안에 들어앉아있기 보다는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한 일화를 더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 1903년 여름에 그는 청도와 부산에서 일본군과 일본인을 응징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뜻있는 인사를 만나 교분을 쌓기도 하면서 훗날 의병장으로서 우뚝 설 기초를 다져 나갔다.

3 영릉 의진(義陳) 거병(擧兵)

신돌석은 27세가 되던 1904년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에 있는 월송정(越松亭)에 올라 아래의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서 (登樓遊子去行路)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可歎檀墟落木橫)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男子二七成何事)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暫倚秋風感慨生)

이 시는 그의 사상과 신념을 전해주는 유일한 작품이다. 1904년은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시기로, 한국 땅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 고통받고 있었다. 신돌석은 벼랑 끝에 매달린 민족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심경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1906년 4월 신돌석은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장소는 그의 집에서 100미터 쯤 떨어진 주점인 김춘궁(金春宮)의 집 앞이었다. 양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킬 때 으레 서원이나 향교에서 거병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당시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100~300명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돌석은 의병의 이름을 ‘영릉(寧陵)’이라고 짓고, 스스로 영릉의병장이 되었다. 산남 의진에서는 이들을 ‘영해 의진’ 혹은 ‘영해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을미의병 시기에 그는 소년 티를 갓 벗은 청년으로 어른들이 이끄는 의병진(義兵陳)을 따라 힘을 뽐내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직접 자신의 힘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어나가는 주동적인 지도자의 위치가 되었다. 이는 그가 인력 동원뿐만 아니라 의병 조직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무기와 장비, 의복 및 식량 등을 동원할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이다. 또한 그는 을미의병에 참여하면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고, 의병해산 이후에는 전국을 돌며 동지들을 사귀면서 전략을 논의한 경력도 있었다. 지역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국의 동향을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춘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영릉 의진의 규모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신돌석이 직접 지휘한 수는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3~400명 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군경은 300명 선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신문이나 일제의 정보 기록 및 판결문에도 대체로 300명 이내로 기록되어 있다. 좀 더 큰 규모라고 해도 500명 선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1907년 말 이후 활동 후반기가 되면 일본 토벌대의 집중적 공격을 받아 소규모로 나뉘어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일 때부터는 100명 선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영릉 의진의 대부분 병사들은 평민이자 농민이었다. 농민 이외에도 포군(砲軍)이 초반부터 활약한 것으로 보아 일부 직업 포수들도 여기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돌석 휘하에는 양반 출신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우선 신돌석 휘하에서 중견 간부로 활동한 백남수(白南壽)는 한말에 주사(主事)를 지낸 인물이었고, 그 외에도 1908년 8월부터 10월 사이 일본군에 투항한 명단에는 사족(士族)이나 유생(儒生), 양반(兩班), 동몽(童蒙) 등의 계급이 적힌 이름이 여러 명 발견된다. 물론 대다수가 잔반(殘班 : 몰락한 양반)으로 보이지만, 신돌석은 신분사회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인물들을 부하로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의병활동의 전개과정

영릉 의진이 일단 갖추어지자, 신돌석은 첫 공격지로 당시 일본의 전초지기로 육성되고 있던 울진을 정했다. 울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호와 양반집을 다니며 모금하고, 병력과 식량 및 무기를 확보하며 북상했다. 1906년 5월에는 울진에서 일본인이 살던 가옥을 집중적으로 부수고, 일본인의 혹은 일본인이 맡겨둔 돈을 빼앗았다. 일본인의 집을 공격하다가 울진의 관군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06년 6월에는 울진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열고 상당수의 무기를 확보한 뒤, 삼척 남쪽 장호관(莊湖館)을 공격하여 일본 배 9척을 격파하였다.

의진의 공격 대상은 영양·청송·울진·평해·영해·영덕 등의 지역 중심지 관아였다. 특히 관아의 무기고를 털어 화약과 탄환을 확보했다. 당시 군물(軍物)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면직시키려 했던 인물 5명 중에 영양군수 김태응(金台應), 울진군수 윤우영(尹宇榮)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신돌석 의병의 영향이 전국적으로도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이 장악했거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무서·우편소·순교청(巡校廳: 지금의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곳) 등도 영릉 의진의 습격 대상이었다. 일본 어부나 수산업자들도 주된 공격 목표의 하나였다.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울진으로 북상했고, 이를 통해 일본의 어업 침략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일본인 이주정책을 봉쇄하려고 했다.

일본인에 대한 반외세적 활동은 일반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신돌석이 평민 출신 의병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그의 의진에 가담하기도 했다. 애국적 유림 지도자들은 신돌석을 매우 신실한 인물로 인정했고, 그를 지원하는 집안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신돌석 의진은 이동하는 동안 큰 마을에 주둔하고 잠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영릉 의진을 비롯하여 영남 지역에서 연일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통감부는 대한제국 정부에 이에 대한 진압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종이 각 지방의 의병활동을 중지하라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조칙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의병장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이는 신돌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통감부는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세력을 잠재우려 했다. 통감부는 6월 9일 각 지방의 의병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대구와 원주의 진위대(鎭衛隊: 지방의 각 진鎭에 둔 군대)를 동해안 방면으로 파견했다. 대규모 토벌대가 울진과 영해 및 영덕 지역으로 파견된 데다, 남북에서 협곡을 가해오는 것이어서 신돌석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 부대들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의병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더위와 장마를 견뎌내며 태백산맥 허리를 넘나들며 쫓고 쫓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신돌석의 부대를 비롯한 대다수의 의병들은 진위대의 공격을 잘 견뎌냈다.

1907년 1월을 넘기며 혹한기에 접어들자 의병들의 활동은 줄어들었다. 봄을 맞은 4월 이후 신돌석은 다시 자금과 물자를 모으고 의병 모집 활동을 벌였고, 1907년 8월 후반 들어 영릉 의진은 영양군 공격에 나서며 모처럼 다시 공세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은 영양을 공격하고 다음날 영덕 읍내의 일본인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바로 울진으로 이동해서, 장호동에서 전복잡이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을 습격했다.

이런 신돌석 의진의 활동에 대해 일본군은 강도 높은 토벌을 감행했다. 일본군이 울진 부근에 주둔하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무렵, 신돌석은 평해와 영양 사이 태백산맥 속에 들어가서 활동을 지속했다.

한편 1907년 11월에는 이인영(李麟榮)이 “의병 부대를 통일해서 연합 의병 부대와 통합 사령부를 창설하고 서울을 향해 경기 지역으로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보내며 13도 창의군(倡義軍) 결성이 시작되었다. 이에 12월에 경기도 양주에서 의병장들이 모여 협의한 후 이인영을 ‘13도 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도별 의병장을 천거했다. 이때 신돌석은 경상도 대표 교남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한달 뒤의 기록에는 교남 창의대장의 이름이 박정빈(朴正斌)으로 바뀌는데, 이에 대해서는 신돌석의 신분이 평민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가 경기도 양주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5 토벌의 강화와 의병활동의 축소

1907년 말 이후 신돌석 의진의 활동 양상은 많은 변화를 보인다. 우선 규모가 작아지고, 활동 반경도 줄어들었다. 1906년에서 1907년 전반기에는 인원도 많고 물자도 풍부했지만, 후기에 접어들면 모든 상황이 어려워졌다. 관아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직접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입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또한 일본군과 경찰의 집요한 추적과 토벌 작전을 따돌려야 하는 부담 때문에 활동지역이 태백산맥의 오지로 바뀌었다. 주로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태백산맥을 따라 오르내리며 일본군 및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를 벌일 때는 대체로 전체 의진이 한꺼번에 움직였지만, 자금과 인력을 모을 때는 대개 5~6명이 한 조가 되어 활동했다. 물자를 수집하고 병사를 모집하는 일도 공공연하게 하기 힘들어져서 주로 밤부터 새벽까지 어두운 시간대에 활동했다.

일본군에게 신돌석 의진은 참으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으나 끝내 그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마다 신돌석이 워낙 귀신같이 움직여서 토벌할 수 없었다는 변명을 기록할 정도이다. 1907년 겨울에는 신돌석이 경기도와 강원도에 나타났다는 어수선한 정보가 일본군 토벌대에 혼선을 주는 사이, 실제 신돌석은 1908년 1월 2일 새벽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는 영양군을 기습하려 했다. 그러나 중도에 일본군과 마주치자 물러났고, 신돌석 의진의 움직임이 일본군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1월 10일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은 후 신돌석 의진은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사라졌다.

일본군과 경찰은 다시 3차 토벌계획을 세웠다. 작전에 앞서 밀정(密偵)을 파견하여 먼저 정보를 수집했다. 신돌석을 비롯한 의병 지휘자들이 추운 겨울을 일월산에서 보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일본군은 1908년 2월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신돌석을 생포할 물샐틈없는 계획을 세웠다고 자신했으나,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신돌석 의진은 일본군이 압박을 가해오기 직전에 이미 일월산 지역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3차 토벌 작전에서도 신돌석을 잡아들이지 못한 일본군은 신돌석의 아내 한씨를 이용해 회유작전을 펼치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08년 4월 이후에도 신돌석 의진은 군자금을 모금하고 병력을 모으고,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활동을 반복했다. 그러나 1908년 8월 중순 이후 신돌석 의진은 그 활동이 조금씩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군 수비대가 계속 증원되고, 토벌대의 작전이 거듭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일본은 토벌대의 활동으로 의병들의 숨통을 조였고, 1907년 말 공포된 ‘귀순자 면죄 조칙’을 통해 의병 참가자의 귀순을 유도했다. 대열을 이탈하는 인물이 점차 늘어나서 의병 활동도 자연히 위축되고 대규모 전투도 잦아들었다. 신돌석 의진에서도 1907년 말부터 투항자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1908년에는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6 의병 해산과 갑작스러운 죽음

1908년 9월 이후에는 신돌석 의진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병력은 줄어들고 보급도 갈수록 어려워졌으며, 거기다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신돌석은 몇 명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도록 명령했다. 이는 1908년 말 전국 의병이 겪었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이후 신돌석은 만주로 가서 큰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러나 1908년 12월 영덕군 눌곡리(訥谷里)에서 부하였던 김씨 형제들에게 살해당했다. 살해범의 이름은 자료마다 다르게 나오지만 김상렬(金相烈)이라고도 하며 김도룡(金道龍)이라고도 한다. 살해 이유도 한국 측과 일본 측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돌석이 부하와 갈등을 빚은 결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 측 기록은 일본군이 신돌석에게 붙여 놓은 현상금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신돌석의 시신은 12월 12일 영덕군으로 옮겨져 시신확인 작업을 거친 뒤 가족에게 인도되었다. 그의 시신은 태어난 마을 바로 뒷산 봉우리 근처에 묻혔다가, 1971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2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에 추서됐는데, 새로운 상훈법(賞勳法)이 만들어진 뒤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되었다.

신돌석이 사망한 뒤 1년 정도 지나면 의병항쟁은 일제의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크게 약화되면서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된다. 의병 중 일부는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발전하고, 일부는 국내에서 결사체를 조직하여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