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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申采浩]

역사학자이자 무정부주의 민족주의자

1880년(고종 17) ~ 1936년

신채호 대표 이미지

신채호 사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출생과 상경

신채호(申采浩)는 1880년 음력 11월 7일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於南洞)으로 할아버지인 신성우(申星雨)의 처가가 위치한 당시 행정구역으로 회덕군(懷德郡)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 도리미(桃林)라는 마을에서 한미한 농촌 선비인 신광식(申光植)과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인데 신채호뿐만이 아니라 일제 치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申圭植),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한 신백우(申伯雨) 등과 같은 항일 투사들을 배출하였다.

신채호의 성품과 항일투쟁 활동은 그의 호와 무수한 필명 및 가명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단재(丹齋)로 알려진 신채호의 호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단심가(丹心歌)의 ‘일편단생(一片丹生)’을 줄인 ‘단생(丹生)’, 이를 다시 단재(丹齋)로 고친 것으로, 청결과 지조를 중요시 한 신채호의 삶을 압축하는 것이다. 또 무명생(無名生), 금협산인(錦頰山人), 적심(赤心), 유맹원(劉孟源), 유병택(劉炳澤), 박철(朴鐵), 왕조숭(王兆崇), 왕국금(王國錦)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필명과 가명은 항일운동가로서 계속해서 신분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단했던 삶의 여정을 나타낸다.

신채호의 할아버지였던 신성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개화 사조에 대한 이해도 있었다. 신채호는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는데, 학문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개화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며 학문에 소질이 있는 손자의 장래를 생각한 신성우는 자신과 동문수학했으며 학부대신(學部大臣)을 지낸 신기선(申箕善)에게 신채호를 맡겼으며, 신기선 역시 신채호의 재능을 높이 사서 성균관에 추천했다. 신채호는 19세가 되던 1898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905년에는 성균관박사에 임용되었다 .

신채호가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시기는 대한제국이 성립하는 한편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결성되어 국정의 자주노선을 요구하는 등 자강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던 때이다. 신채호 역시 성균관에 입학한 이후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하며 개화·개혁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활동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적 역량은 성균관에서도 발휘되었다. 당시 성균관에서도 학문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다양한 서적을 독파하던 신채호는 성균관 관장이던 이종원(李種元)의 총애를 받았지만 관직에 뜻이 없다며 출사하지 않았다.

2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성균관박사를 사직한 신채호는 향리로 내려와 신백우, 신규식 등과 함께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열고 인근 젊은이를 모아 교육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청원군 낭성면(琅城面)을 찾아 온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신채호를 알아보고 초청, 신채호는 『황성신문』의 논설기자가 되어 논객으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신채호가 성균관박사가 되던 해는 바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해이다. 이에 장지연은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하여 그 울분을 표했지만, 이로 말미암아 『황성신문』은 정간되었다. 『황성신문』 정간 직후 신채호는 양기탁(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사주가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었기 때문에 일제 통감부의 언론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 여기서 신채호는 ‘일본의 3대 충노(忠奴)’,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 ‘영웅과 세계’, ‘동화(同化)의 비관(悲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20세기 신국민’ 등과 같이 일제의 침략과 친일인사들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수호를 위한 논설을 집필하며 언론구국운동의 제일선에 섰다.

신문 논설만이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을 번역한 것을 비롯하여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1908),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1909) 등과 같은 역사서나 위인전을 번역·저술하였다. 이는 역사가 몇몇 위인이나 영웅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영웅사관(英雄史觀)을 드러내는 한계를 보이지만 신채호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등과 같이 외적을 무찌른 구국의 장군들을 환기시킴으로서 국망이라는 현실에 직면한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 1908년에는 한국의 역사학에 있어 기념비적인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이는 한민족을 주인공으로 하여 역사를 체계화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유교주의 사관과 일본인들에 의해 제기된 식민주의 역사관을 거부·극복한 한국 근대역사학의 효시로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신채호는 이러한 집필활동과 더불어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이론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에도 참여해 ‘청년학우회 취지서’를 기초, 발표하는 등 항일구국을 위한 조직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3 망명과 독립을 위한 활동

국망이 눈앞이던 1910년 3월 신민회는 양기탁의 집에서 회의를 열어 안창호,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신채호 등을 국외로 망명시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신채호는 4월 평북(平北)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오산학교에 잠시 머물 당시 학교의 교사였던 이광수(李光洙)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광수에 의해 어디에 굽히기 싫어하여 세수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한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망명 직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친지에게 빌린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한 질만을 지니고 갔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망명을 단행했던 신민회의 간부들은 칭타오(靑島)에서 1차 회의를 열고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신채호는 무관학교에서 국사와 한문 교육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10년 9월 설립 자금의 부족으로 다른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로 떠났다. 이곳에서 신채호는 이상설(李相卨),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인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서적부장을 맡았으며, 회에서 발행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로 초빙되었으며, 이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부회장으로서 항일의식의 고취와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권업신문』이 자금난으로 폐간되고 건강의 악화로 어렵게 생활하는 중 상하이에서 신규식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상하이에 머물던 1914년, 대종교(大倧敎)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桓仁縣)으로 간 신채호는 이곳에서 약 1년간 체류하며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교 교재로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하는 한편 이곳에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며 역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신채호의 역사연구는 다음 해인 1915년 이회영(李會榮)의 권유로 베이징(北京)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베이징에 머물면서 신채호는 『사상변천론(思想變遷篇)』, 『강역고(疆域考)』, 『인물고(人物考)』 등 역사관련 연구서를 저술하는 한편 생계를 위해 『중화보(中華報)』나 『북경일보(北京日報)』에도 다수의 논설을 썼으며, 자신의 독립사상을 극화한 소설 『꿈하늘』을 탈고하는 등 창작 활동도 병행하였다.

4 임시정부와의 갈등과 무장투쟁론

이처럼 신채호가 독립을 위해 국외에서 활동을 전개하던 중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벌어졌다. 신채호 역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겸 충청도 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임정 조직 당시부터 한성정부의 법통을 따를 것을 주장하는 한편 윌슨에게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청원한 이승만(李承晩)의 국무총리·대통령 선임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임정과 결별하고 1919년 10월 신규식의 지원을 받아 주간신문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반(反)임시정부 노선을 펼쳐 나갔다. 임정에서는 자신들이 발간하던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으로 신채호를 초청하였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임정에 반대하던 동지 40여명을 규합하여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임시정부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신대한』의 발행이 중단되자 1920년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되돌아와 제2회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채호는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여 만주 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다음해인 1921년에는 국내외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을 목적으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여 무장독립투쟁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신채호의 활동으로 베이징은 무장투쟁 노선이 강화되고 반임정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베이징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채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였으며, 결국 이승만은 이해 5월 20일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임정의 개편을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1922년 12월 무장투쟁의 또 다른 지도자로서 의열단(義烈團)을 이끌고 있던 김원봉(金元鳳)은 신채호를 초청, 신채호는 상하이에 가서 1개월 여간 그곳에 머물며 의열단의 폭탄제조소를 시찰하고, 이들을 위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5장 6,400여자로 이루어 진 조선혁명선언은 집필에 들어간 지 한 달여 만인 1923년 1월 발표되었다. 여기서 신채호는 조선 민족의 적은 ‘강도 일본(强盜 日本)’임을 분명히 하고, 이 적을 무찌르는 것은 조선 민족의 정당한 선택이라면서, 일본에 타협하는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등 역시 우리 민족의 적이며,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장하던 임시정부를 비판하였다. 또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길은 오로지 민중의 직접 혁명밖에 없으며, 민중직접혁명을 통해 이족(異族)통치, 특권계급, 경제적 약탈제도, 사회적 불균등, 노예적 문화사상의 다섯 가지를 파괴하고 고유한 조선, 자유로운 조선민중, 민중경제, 민중사회, 민중문화라는 이 다섯 가지를 건설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 문건은 혁명의 수단으로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측면에서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의열단과 같은 의열투쟁 단체들뿐만이 아니라 독립을 바랐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때인 1923년 1월에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향후 진로를 둘러 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약 6개월 여간 계속된 이 회의는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개조파(改造派)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는 창조파(創造派)가 팽팽히 맞섰다. 신채호는 국내에서 수립된 ‘대조선공화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론에 섰지만, 두 파의 대립으로 결국 6월에 회의는 결렬되고 창조파의 주요한 인물들은 임정을 떠났다. 이후 신채호는 창조파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활동을 계속하고자 하였지만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소련 정부가 이를 불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베이징으로 돌아와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5 국사연구, 그리고 최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신채호는 독립운동의 통일을 위한 활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좌절감과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며 불교 사상을 공부하였다. 베이징의 독립운동가들은 신채호를 자주 방문하며 그를 산속 절에 그냥 두지 않았다. 1924년 가을 환속한 신채호는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바로 이때 ‘조선사’ 총론을 완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사관(史觀)을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기록’이라고 천명하였다. 또 1925년 초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신문을 통하여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三國史記中 東西兩字 相換考證)’,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와 같은 고대사 관련 논문을 연이어 발표함과 더불어 10개월 가량에 걸쳐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조선사’ 총론과 더불어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이를 기점으로 조선의 역사를 ‘자주기’와 ‘사대기’로 구분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1925년을 전후하여 발표한 역사업적은 신채호가 뤼순(旅順)감옥에서 투옥되어 있을 당시 발간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에 수록되었다.

한편 ‘조선혁명선언’을 쓸 당시 유자명(柳子明)과 베이징대학 교수 이석증(李石曾) 등으로부터 무정부주의를 소개받은 신채호는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다음해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無政府主義者東方聯盟)이 텐진(天津)에서 결성되자 이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였다. 1928년 4월에는 중국, 조선, 인도, 대만, 베트남 민족대표들이 모여 베이징에서 개최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했는데, 이 대회에서는 자금 마련을 위해 위조 외국환을 인쇄하여 일본, 대만 등지로 발송한 후 현지에서 이를 찾는 방안이 결정되었다. 신채호는 대만으로 가서 자금을 찾기로 하여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의 입국을 시도하던 중 상륙 직전 체포되어 다이렌(大連)으로 호송되었다. 체포 이후 기나긴 공판을 거쳐 1930년 7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라는 죄명으로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뤼순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투옥 기간 중인 1931년 안재홍(安在鴻)은 신채호와 연락을 취해 그가 체포되기 전 지인에게 맡겨두었던 원고를 받아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이를 기재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이다.

1935년 장기간의 투옥 생활의 결과 신채호의 건강은 악화되자 병보석으로 출감될 수 있었음에도 보석의 보증인에 친일 이력이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가출옥을 거부하는 지조를 보였지만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으며, 3일 후 차디찬 감옥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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