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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 최고의 민족 운동 지도자

1878년(고종 15) ~ 1938년

안창호 대표 이미지

안창호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청년 안창호, 신학문을 배우고 미국 유학을 떠나다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草里面) 칠리(七里)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농부 안흥국(安興國)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 대동강 하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아호인 도산(島山)은 그의 고향 도롱섬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8세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여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한 안창호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유년기를 보냈다. 1894년 16세의 안창호는 청일전쟁으로 역사와 전통의 도시 평양이 파괴당한 것에 충격을 받고,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자 서울로 올라와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경신학교(儆新學校)의 전신)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사회로 나온 20세의 청년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畢大殷)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를 맡게 되었다. 평양부 쾌재정(快哉亭)에서 평남 관찰사 조민희(趙民熙)와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면서 청년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황국협회(皇國協會)의 무고와 습격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을 펼쳤다.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선진 교육을 공부하여 교육전문가가 되고자 190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2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안창호는 소학교에 입학해 영어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신보다 먼저 미국에 이주해 온 한인들이 다툼을 일삼아 조소거리가 되고 있음을 목격했다. 이에 1903년 9월 23일 재미 한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조직, 회장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진의를 의심하던 교포들은 그의 계속된 노력에 감동하여 친목회에 가입하고 교민사회를 형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안창호는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 기독교계가 경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한인사회에 전해지자 1905년 4월 5일 상항친목회 동지들과 단합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1905년 11월 20일 순국문판 신문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민 사회에 보급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과 조직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전해들은 안창호와 공립협회 동지들은 1907년 1월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설립하고 북미가 중심이 되어 국내를 비롯한 전 세계 한인사회를 연결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안창호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1907년 2월 귀국하였다.

2 귀국과 국권회복운동 – 신민회 활동

1907년 귀국 후 안창호는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체제는 공화정치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또한 백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新民)는 것이었다. 신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① 신문·잡지와 서적을 펴내어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 각지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정신을 각성시킬 것

③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 각지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할 것

⑤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⑥ 신민회 회원끼리 힘을 더해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⑦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⑧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을 제시했다.

이것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각 주요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리는 등 정치·교육·문화의 여러 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9년 8월 안창호와 신민회 동지들은 건전한 청년들을 각계각층의 중요한 인재로 키우고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창립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 역의 안중근(安重根) 의거와 관련하여 안창호는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어 용산헌병대에서 취조 받고 수감되었다. 그해 말 석방되었지만 다시 재소환되는 등 안창호와 신민회 지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했다. 신민회 회원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닫고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국외의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장기적 독립전쟁론을 구국 전략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결정 하에 안창호는 1910년 4월경 신민회 회원들과 국내를 탈출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3 다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르다 –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안창호의 첫 망명지는 중국 칭다오(靑島)였다. 안창호와 신민회 동지들은 칭다오에서 향후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는데, 이곳에서 강제 병합 소식을 듣고 일시 귀국했다. 그러나 1911년 안창호는 다시 한국을 떠나 북만주로 건너가 밀산현(密山縣)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을 수립했지만 비용 마련이 어려웠고 계획이 여의치 못하여 계획을 변경, 미국으로 향했다.

한편 1909년 2월 공립협회가 미국 본토와 하와이 한인단체를 통합하여 국민회(國民會)를 발족시켰다. 1910년 5월에는 국민회와 북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편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미주 최대의 한인 통일조직이 결성되었다. 1911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도착하자마자 대한인국민회 일로 분주했다. 상항지방회 대의원, 만주리아 지방총회 대표원으로 선임되었고, 1912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만주리아 지방총회 대표 대리로 참가했다. 안창호는 이 회의에서 중앙총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그와 경합한 윤병구(尹炳求)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곧 재기에 성공했다.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대표원회에서 중앙총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1915년 6월 23일 중앙총회 회장 취임식에서 안창호는 동포사회의 단결을 강조했다. “우리민족의 단결이라고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이 대한인국민회 하나뿐”이므로 이것을 보조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 “국가를 광복”하는 것이라 호소했다. 대한인국민회가 부진한 것에 대해 “회원의 개인상 실력이 발전되지 못함”을 지적했고, 중앙총회의 세력 강화와 언론 통합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각 지방회를 순방하며 조직을 유지하는 데 머물렀다.

1911년 말 미국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경제적 실력과 인재 양성이라는 구상을 가다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1912년 북미실업주식회사(北美實業株式會社) 설립과 1913년 5월 흥사단(興士團) 창립으로 나타났다. 그는 망명 직후부터 국내에서 조직했던 청년학우회를 계승하는 단체를 구상했는데, 흥사단은 무실역행, 충의용감, 건전인격,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한 동맹수련단체로서 독립운동의 기반인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안창호는 북미실업주식회사와 흥사단 활동에 주력하면서 그의 민족운동 구상도 장기지속적인 ‘준비’에 보다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와 함께 안창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국제사회 변화에도 대처해 나갔다. 1917년 10월 뉴욕 약소국 동맹회의에 박용만(朴容萬)을 한인대표로 파견했고, 1918년 1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전체회의를 소집해 이승만, 정한경(鄭翰景), 민찬호 3인을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대표들의 파리행은 좌절되었지만, 상하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파견한 김규식(金奎植) 등 파리대표단에게 소요경비 3,500달러를 송부해 그들의 외교활동을 지원했다.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와 대공주의(大公主義)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 긴급위원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재주와 힘을 다하며 생명을 희생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무수한 피를 흘려 일본의 섬을 바다 속에 집어넣어야 한국의 독립이 완전히 성공”할 것이라 하였다. 이를 위해 북미, 하와이, 멕시코 한인동포들은 각종 선전활동과 재정 공급이라는 특별 책임을 수행해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9년 3월 이미 만주와 러시아령 동포 대표자들은 임시정부로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조직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를 선임하였다. 서울에서도 4월 조선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고, 국내 13도 대표들의 국민대표회가 열려 한성정부가 조직되었는데, 안창호는 노동총판에 선임되었다. 역시 상하이에서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임시헌장과 내각 조직을 선포하였다. 여기에서도 안창호는 내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5월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遠東委員) 자격으로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하였고,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하고자 교섭했다. 이외에도 대한적십자회 재건,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조직 및 학교 설립, 언론 선전활동에도 힘썼다. 1919년 8월 이후 한성(서울),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에 수립된 3개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정통성을 가진 통일정부를 상하이에서 출범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에 취임했다. 이 무렵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흥사단 원동위원부 조직에도 박차를 가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와 재정을 공급하는 단체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는 이승만과 이동휘 간의 독립운동 방략, 이념 차이로 내분에 휩싸이자 안창호는 양자 간 조절, 중재에 노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동휘를 공박했고, 이동휘는 레닌의 자금 사건이 터지자 임정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 뒤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委任統治案)을 두고 논란이 거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해임, 탄핵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결코 개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고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베이징에서 반이승만 세력에 의해 반(反)임정운동이 번지면서 임시정부는 분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안창호는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키는 독립당을 결성하고 정당체의 합의에 의해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대독립당(大獨立黨) 운동을 주창했다. 1921년 5월 노동국 총판직을 사임하고,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에 나섰다.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기 전 각 방면의 주장과 이익을 충분히 검토, 토의한 후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고자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23년 1월 3일 국내외의 산재한 각 단체 대표 140여명이 모여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현상유지파’,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창조파’, 중도적 입장의 ‘개조파’로 분열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하이를 떠나거나 독립운동을 포기했지만 안창호는 좌절하지 않고 대독립당 운동과 이상촌 건설운동에 매진하며 독립운동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에도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만들어 재정 위기에 빠진 정부를 후원했으며, 각지에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준비회를 만들어 각 지역별 독립운동 단체를 유일당 체제로 통일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26년 10월부터 1927년 9월까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우한, 난징 등지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안창호는 이념과 노선이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들을 효율적으로 지도해 나갈 현실적 대안으로 유일독립당 결성 노력을 멈추지 않고 만주지역까지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한 가운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은 1928년에는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29년 각지의 촉성회가 해체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그는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종래의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결성한다는 목표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하고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했다.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는 대공주의는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할 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안창호는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 이상촌 건설을 위해 1927년에는 만주지방에 이주한 한국농민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했고, 중국 화중 지방에도 10만 200호의 농촌을 건설하여 포도원(葡萄園)을 경영하고자 했다. 1930년 말에는 생산, 신용의 합작운동을 보급시키기 위해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다음 해에 공평사(公平社)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촌 건설계획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중국침략이 노골화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5 서거, 한국 독립운동의 통합을 모색한 지도자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의거가 일어난 날, 안창호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1932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2월 가출옥하여 서북지방 등 각지를 여행하고, 지인들을 만나 여러 논의를 하는 한편 모범촌 계획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철저한 경찰의 감시에 결국 평양 근처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했다.

일제는 중국 침략을 앞두고 일체의 민족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을 일으켰고, 안창호는 수양동우회 회원들과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8월 15일 예심 종결을 거쳐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졌을 때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위독한 상태에 빠진 안창호는 12월 24일 급히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위하수증과 간경화, 만성기관지염으로 진단받은 안창호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11월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창호는 당대의 객관적 정세를 파악하고 우리 민족이 당면한 고난의 상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합리적 방략을 세우고 공론을 이끌어 내려 노력했다. 또한 민족 개개인의 자기 혁신, 자기 개조를 강조하며 이것이 곧 민족 개조와 혁신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은 그가 가장 강조한 방법이다. 이러한 개인의 혁신과 더불어 ‘대공주의(大公主義)’를 통해 개인이 전체를 위해 통합하고,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자는 민족대통합을 주장했다. 그는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안창호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익 독립운동계는 모두 함께 그의 업적을 추모하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그의 민족통합과 민족혁명 유지를 받들고자 했다. 안창호가 참여하고 주도한 독립운동의 노선과 방략은 한 계파의 것이 아닌 한국 독립운동 전체의 흐름을 형성했고, 그의 정신은 한국 민족운동의 중추적 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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