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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安連]

근대 의학의 전파자이자, 미국의 국익에도 충실했던 의사

1858년 ~ 1932년

알렌 대표 이미지

알렌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조선에 오기까지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 선교사이자 의사, 외교관으로 활동한 미국인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온 알렌은 우리나라에 근대의학을 전파한 선구자이기도 하며, 미국의 외교관으로서 당시 조선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반청, 반일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던 외교관이기도 했다.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Ohio) 주 델라웨어(Delaware)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알렌은 고향에서 초․중등 교육을 마쳤으며, 1881년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Wesleyan)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1년간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83년 3월 신시내티(Cincinnati) 마이애미(Miami) 의과대학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1883년 1월 알렌은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해외선교활동을 지원했으며, 선교본부는 조만간 의사자격증을 따게 될 알렌을 곧바로 중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임명 직후 알렌은 동급생인 프랜시스와 결혼하고(1883년 5월 17일),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알렌이 부임하기로 한 곳은 베이징(北京)이었지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1년 정도를 허비하였다. 북장로회 중국 선교부는 만성적으로 의료 선교사가 부족하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 선교사로서 파견된 알렌이 선교활동을 시작하지 못한 채 떠돌다가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은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내부 사정과 알렌의 개인적 상황이 결합된 결과였다. 알렌의 부임지를 담당하던 선교사가 사임하겠다던 자신의 입장을 번복함으로서 한 개의 선교지부에 2명의 의료 선교사가 근무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때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조선 행을 지원했지만 선교본부에서는 이미 중국에서 언어를 비롯하여 선교 경험을 가진 이들이 조선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상하이에 머물던 알렌은 그곳에서 만난 해관 의사 핸더슨(W. A. Handerson) 등으로부터 의사가 필요한 서울로 갈 것을 권유받고 있었다. 이에 1884년 6월 알렌은 조선에 의사가 필요한지를 타진하고 조선 행을 선교본부에 요청한 결과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1884년 9월 6일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를 떠난 알렌은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 이틀 후인 9월 22일 서울에 들어왔는데, 이로서 조선에 처음으로 정주 선교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2 한국에서의 의료 활동

당시 서울에는 서양인들을 진료할 만한 양의가 없었기 때문에 알렌은 크게 환영받았다. 한미수호조규를 체결하고 초대 조선 주재 미국특명전권공사(朝鮮駐在美國特命全權公使)였던 푸트(Lucius Harwood Foote, 복덕福德) 와 아내는 당장 자신들을 진료해 줄 수 있는 알렌을 크게 반겼으며, 9월 23일 알렌은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알렌은 외국 거류민을 위한 의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조선에서 알렌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것이다. 정변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민영익(閔泳翊)은 조선해관 총세무사인 묄렌도르프(P. G. Von Möllendorff, 목인덕穆麟德)의 집으로 옮겨와 있었으며, 그 치료를 위해 알렌은 한밤중에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민영익은 얼굴, 목, 등, 팔꿈치 등 온몸에 깊은 자상을 입었으며 지혈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태였는데, 알렌은 서양 의학의 방식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하였으며, 5일과 6일에도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민영익을 왕진하였다.

이때 정변으로 인하여 서울의 상황은 급박하였다. 조선에 주재하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정변을 일으킨 이들과 그들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으며 결국 12월 6일 청국군은 일본군과 충돌하고 조선인들은 일본인 상점과 주택을 파괴하며 서울 일대는 전쟁터와 같이 변모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묄렌도르프와 독일 공사, 영국과 미국의 공관원 등 서구인들은 모두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도피하였다. 이때 서울에 남아 있는 서구인은 알렌과 그 가족 외에는 없었으며, 알렌은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민영익의 집을 거의 매일 왕래하며 치료를 계속하였고, 결과 이듬해인 1885년 2월이 되면 민영익은 물리치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민영익을 치료한 결과 조선에 상주하는 외국인으로서 알렌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갑신정변 당시 알렌이 치료한 것은 민영익만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당시 부상을 당한 청국군들도 알렌의 치료를 받았다. 갑신정변이 발발한 12월 10일부터 다음 해 1월 말까지 알렌은 무려 43회나 청국 군영으로 왕진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주조선 청국 관리와 가까워져 청국공사관의 전속의사가 되었다. 알렌의 진료는 청국군에만 머물지 않았다. 민영익의 병세도 호전이 되었고 청국군에 대한 치료도 마무리될 즈음인 1885년 2월 3일부터는 일본 공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 를 3일간 왕진하며 곤도와 가까워졌고 이를 계기로 일본 공사관에서 연간 500달러를 받고 의료봉사 활동을 하였다.

또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알렌은 고종을 알현하게 되었다. 민영익을 치료한 지 2주일 쯤 지나 고종은 알렌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사하였다. 이후 고종과 왕후는 알렌에게 진료를 의뢰하였고 1885년 3월 27일 알렌은 입궐하여 고종과 왕후를 알현하여 진료하였다. 당시 왕과 왕후는 유사 천연두를 앓고 있었으며 알렌은 이를 치료하여 왕의 신임을 얻고 임금과 왕족의 진료를 맡는 왕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이러한 알렌의 행보는 향후 외교관으로서 그의 활동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가깝게는 한국 최초 서구식 병원 제중원의 탄생을 낳았다. 민영익의 치료에 대하여 조선의 왕실에서도 관심을 보이자 알렌은 조선에서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의 설립을 시도하였다. 이는 조선인들에게 서구의 의료와 의학을 가르치는 것이자 알렌 자신이 조선에 온 본래 목적인 해외 선교의 구체적 방안이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병원의 설립을 통하여 조선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려는 계획이기도 하였다. 1885년 1월 27일 알렌은 미국 대리공사 포크(George Clayton Foulk, 복구福久)의 추천서신과 함께 ‘병원설립안’(朝鮮政府京中設建病院節論)을 조선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러한 미국 공사와 알렌의 동향에 대해 당시 서울에서 외국인공동체를 주도했던 묄렌도르프와 독일 공사 측은 자신들의 위상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고, 1882년에 철폐된 혜민서(惠民署) 소속의 관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잃게 될까봐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정부는 민영익의 도움을 받고 있던 알렌의 병원설립 계획을 하나 둘 진행하였다. 2월 중순 병원의 적임자로 김윤식(金允植)을 임명하고 갑신정변의 주도자로서 정변 당시 죽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을 개조해 병원으로 사용하게 하는 한편 고종의 윤허가 내려진 것이다. 조정에서는 서양식 병원의 개원을 알렸으며, 준비를 마친 1885년 4월 9일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서양식 의료가 시작되었다. 한편 이유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개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광혜원은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만이 아니라 의학교도 설치하여 서양식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알렌의 관직은 오르고 왕실의 그에 대한 신임은 더해 갔다. 제중원이 개원한 후 미국 북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 혜론蕙論),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元杜尤), 북감리회의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시란돈施蘭敦)이 합류하여 진료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1885년 10월 알렌이 조직한 ‘미국 북장로회 지부’의 서기(헤론), 회계(언더우드)로 병원의 유지․운영만이 아니라 선교 활동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알렌은 이들과 선교 방법 등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었으며 1885년 9월 2일 선교본부에 자신을 부산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를 정도로 불화를 겪었다.

한편 1887년 8월 조선정부는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기로 하고 박정양(朴定陽)을 전권대신으로 파견하면서 알렌을 외무비서관(參贊官)으로 임명하여 박정양을 보좌하게 하였다. 이에 알렌은 같은 해 10월 26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이후 알렌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활동하는 외교관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3 조선으로의 재입국과 외교관으로서의 활동

사실 외교관으로서 알렌의 역할은 박정양을 보좌역으로 미국으로 파견되기 이전부터 나타난다. 갑신정변 이후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할 정도로 조선정부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고 있었다. 고종이 신임하던 알렌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반청외교에 자문을 하며 자주외교를 위해 외국에 공사관을 설치할 것을 진언하였으며, 1887년 박정양의 주미공사 파견과 이후 미국에서 공사관 개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 직접 관여하였다. 그렇지만 이에 대하여 위안스카이가 강하게 반발, 조선정부를 압박하자 박정양은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며, 알렌 역시 1889년 6월 조선정부의 외교관리로서의 직책을 사임하고 다시 내한하였다.

한국에 돌아온 알렌은 다시 선교활동을 벌여나갔지만 다른 선교사들과 이미 갈등을 겪었던 터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미국정부는 오랫동안 조선에 체류하며 현지의 실정에 정통할 뿐만이 아니라 조선왕실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던 외국인으로서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알렌에게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직을 제안했다. 이에 알렌은 선교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외교관으로서 활동을 벌여 나갔다.

당시 청의 내정간섭에 혐오감을 품었던 알렌은 일본이 주장해 온 ‘조선의 절대적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알렌의 생각은 1895년 을미사변을 기화로 반일친러를 기조로 하는 대한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러한 알렌의 변화는 일본의 배신행위에 대한 분노, 조선왕실에 대한 사명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미국의 주한 외교관으로서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조선정부에 대하여 ‘공평한’ 외교 원칙을 표방하며 영토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고종은 이러한 미국의 힘을 빌려 당시의 위기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알렌은 이러한 점을 잘 이용하여 서울의 전기, 전차, 경인철도, 광산 등의 산업부문에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아시아 최대의 금광인 평안북도의 운산광산의 채굴권을 미국의 모오스(J. R. Morse)가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알렌이었다. 알렌은 청일전쟁 이후 친미적 성향의 인물로 내각을 채우고자 하였으며, 결국 자신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던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친미내각의 성립을 이끌었다. 이러한 친미 내각성립과 더불어 운산금광 채굴권을 모오스에게 넘겨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명성황후였다. 왕후가 알렌이 10년간 조선정부를 위해 봉사한 것에 대한 답례로서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넘겨주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일이 원활했던 것이다. 이러한 왕후를 일본인이 살해하자 알렌은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고 고종(高宗)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러일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알렌은 1897년 주한 미국 대리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에는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어 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정부와 알렌의 생각이 달랐다.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의 기조는 불간섭정책이었다. 이는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점차 친일정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그 보상으로 한반도를 넘겨주고 아시아에서 우월권을 인정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주한 미국의 공사로서 이러한 친일정책은 현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며 1903년 9월 미국으로 들어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알렌은 러시아가 만주를 평정하고 막대한 자본을 들여 항구와 철도, 도로 등을 건설했기 때문에 절대로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을 것이며, 항구․철도․도로의 건설로 엄청난 상업시장이 발생하였고 그 개방을 약속한 만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친러반일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렇지만 알렌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알렌은 이에 불복하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정부를 비판하였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미국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묵인하는 것이 반대하였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한국에서 미국공사관 철수를 결정한 미국정부는 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알렌을 해임하였다. 1905년 6월 알렌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알렌은 다시 의사로서 활동하고 집필에도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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