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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魚允中]

갑오개혁의 주도자, 친일파라는 오명으로 피살되다

1848년(헌종 14) ~ 1896년(고종 33)

어윤중 대표 이미지

어윤중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어윤중, 동래 암행어사에 임명되다

어윤중(魚允中)은 1880년 1월 11일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다. 국왕으로부터 받은 봉해진 서신을 열어보니 ‘일본 조정의 의논과 국세 형편, 풍속 인물, 교빙 통상 등의 대략을 염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너는 일본의 선박을 빌려 타고 그 나라로 건너가 대장성이 관장하는 사무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듣되 시간에 구애받지 말며 낱낱이 탐지해서 별단으로 조용히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그를 이른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개화 정국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갑오개혁 때도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화파 정객으로서의 그의 생애는 불행히도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2 개화파 정치인, 어윤중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제치고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친정(親政)에 나서면서 대외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80년대에 들어서면 수신사, 영선사, 신사유람단을 연이어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신진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어윤중도 그러한 신진 정치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사유람단에는 뒷날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하는 홍영식(洪英植)도 참가하였으며 『서유견문』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도 당시 수행원이었다. 이에 앞서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金弘集)과 영선사로 중국에 파견된 김윤식(金允植)도 이때 새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이들 신진 정치세력을 통틀어 개화파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개화파는 다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는데 분화의 계기는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에 가담한 세력이 급진개화파이고 나머지는 온건개화파인 셈이다. 어윤중은 이 가운데 온건개화파에 속했던 인물이다. 그와 함께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홍집과 김윤식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김홍집은 끝까지 그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였다.

어윤중 등 온건개화파는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4년 추진된 갑오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한때 가세하였지만 이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간에 탈락하였으며 갑오개혁을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졌던 것은 그를 비롯한 온건개화파였다.

3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막후에서 활약하다

어운중의 정치적 활약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된 그를 비롯한 신사유람단 일행은 3월 하순 경 동래부에 집결하였다. 일행은 4월 28일 일본에 도착하여 약 3개월간 각 관청을 분담하여 시찰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여러 관청 가운데 국가 재정을 관장하는 대장성을 담당하였는데 귀국 후 시찰한 내용을 『일본대장성시찰기(日本大藏省視察記)』란 제목으로 보고하였다.

어윤중은 신사유람단 일행이 대부분 귀국한 뒤에도 일본에 남았다. 그것은 그가 출발할 때 모종의 특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7월 2일 홍영식과 함께 일본 주재 청국공사인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의사가 있음을 전달하였다. 하여장 공사는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을 통해 이를 권유한 바 있는데 그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 그리고 9월 1일에는 3차 수신사로 임명된 조병호(趙柄鎬)가 본국으로부터 도착하여 그에게 중국으로 건너가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대외정책을 총괄하고 있던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대미수교를 구체화하라는 밀명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어윤중은 9월 10일 자신의 수행원이었던 유길준과 윤치호를 더 공부하도록 일본에 남겨둔 채 상해를 거쳐 천진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곳에서 영선사 김윤식과 합류하였다. 그와 김윤식은 10월 10일 이홍장을 만났으며 그를 보좌하는 막료(幕僚)이자 해관총독이었던 주복(周馥)과 조미조약(朝美條約)의 초안을 검토하는 등 실무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이러한 정지작업을 마친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대기하고 있던 수신사 조병호와 함께 귀국하여 국왕에게 복명하였다.

어윤중은 이듬해인 1882년 2월 이조연과 함께 문의관(問議官)으로 임명되어 다시 천진으로 건너갔다.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중국의 기기창(機器廠)에 파견된 공장(工匠) 들을 감독하는 것 이외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문을 검토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천진에서 이홍장을 만나 그의 중개로 미국 대표와 접촉하려 하였지만 미국 대표인 슈펠트(Robert W. Shufeldt)가 이미 조선으로 출발하는 바람에 이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조미조약은 같은 해 4월 6일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이 조약문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조미조약 체결의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다.

4 청국과의 외교관계를 조정하다

어운중의 두 번째 중국행 당시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청국과의 외교관계를 재조정하는 일이었다. 주요한 내용으로는 해상 교통이나 무역ㆍ어업 따위에 대한 제한을 두는 해금(海禁)을 철폐하여 중국과 해로를 통한 무역의 길을 여는 것과 북경에 조선의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서양 여러 나라와 근대적 조약을 맺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일본과도 새로운 방식으로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조선도 청국과의 외교 관계를 조금이나마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외교 교섭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이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에 비해서 청국은 사대(事大)의 전통은 가볍게 변경할 수 없다고 하면서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청국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천진에 있었다. 군란이 일어나자 김윤식과 함께 조선에 진주하는 청국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 다시 문의관이란 직함을 띠고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중국에서 수행한 가장 중요한 임무가 바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이었다. 이 장정은 10월 17일 체결되었는데 조선측 수석대표는 조영하(趙寧夏)였고 차석대표는 김홍집이었지만 그도 조약문에 문의관의 자격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실무적으로는 그가 이 조약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타결된 장정의 내용은 애초에 이 문제를 제기한 조선의 의도와는 반대로 매우 불평등한 것이었다.

어윤중이 담당한 청국과의 외교교섭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무역장정이 체결되던 무렵인 1882년 10월 12일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에 임명되었다. 서북경략사란 서도와 북도 즉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를 관장하는 직책이다. 따라서 국방과 함께 외교도 직무의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서북경략사로 부임한 이후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경계인 한만국경(韓滿國境)을 재조사하는 등 청국과의 외교 교섭에 나섰다. 이러한 외교 교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과 중국 간의 육로 무역에 관한 규정을 재조정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교섭 결과 1883년 중국 봉천과 조선 변경 백성들 간의 무역규정이 체결되었으며 이듬해인 1884년에는 중국 길림과 조선 백성들 간의 무역규정이 체결되었다. 두 무역규정이 체결됨으로써 청국과의 무역질서의 재조정이 완료될 수 있었다.

5 깐깐한 재정전문가 어윤중

어윤중은 신사유람단에서도 일본의 국가재정을 관장하는 대장성의 시찰을 담당하였으며 그의 관직 생활을 통틀어 특히 재정 문제에 밝은 실무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그에게 대장성을 맡긴 데에는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을 때 현지를 조사한 후 올린 12개조의 개혁안을 통해 조세와 재정 문제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개혁안에서 수취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과 함께 궁중에 소속된 궁방전(宮房田)과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둔 아문둔전(衙門屯田)을 개혁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어윤중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대장성에서 시찰한 내용을 국정개혁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 감생청(減省廳)에서의 활동도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감생청이란 불필요한 관청과 관직을 혁파하는 것을 통해 국가재정 절감을 도모하기 위해 1882년 10월 세워진 임시 관청이다. 그가 이 관청의 책임자였는데 직무의 성격상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기 쉬웠고 실제로 왕가와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들의 저항 때문에 제대로 된 행정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려 애썼으며 그 덕에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사고야 말았다.

어윤중은 갑신정변 당시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후 중용되지 못했다. 그가 정변 당시 박영효의 아버지인 박원양(朴元陽)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죄로 관직을 사퇴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는 아니었지만 당시 집권세력인 민씨 척족(戚族)들에 의해 의심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가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1893년 동학 교단이 벌인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때문이었다. 그는 보은집회 당시 민심을 무마하고 주민을 진제하기 위해 국왕이 임시로 파견한 양호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어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강온 양면전술을 동원하여 해산에 성공하였다. 그를 선무사로 임명한 것도 집회가 열린 보은이 그의 고향이기도 하였지만 그가 깐깐하고 청렴한 원칙주의자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재정전문가답게 탁지부(度支部)의 대신(大臣: 군주 국가에서 장관을 이르는 말)을 맡게 되었다.

6 갑오개혁, 독배를 들다

어윤중은 갑오개혁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였다. 그와 손발을 맞춘 인물은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이었는데 그는 어윤중에게 시종일관 탁지부 대신을 맡겼다. 갑오개혁은 당시 조선을 크게 바꾼 근대개혁이었지만 자주성이란 측면에서 문제가 없지 않았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정부는 애시 당초 일본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개혁의 내용 가운데에도 상당 부분은 일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개화파 정부를 이끌었던 김홍집은 이러한 제약 아래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탁지부 대신을 맡았던 어윤중도 이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보통은 일본의 뜻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였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일본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가 당시 불거진 300만원 차관 문제였다. 일본은 갑오개혁 당시 300만원의 차관을 조선에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종의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인물이 당시 조선주재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당시 탁지부 대신이었던 그도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지는 못했다. 다만 차관액 전액을 은화로 도입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하여 이노우에의 애를 먹였다.

갑오개혁은 그 경과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1894년 11월 새로 내각에 참여한 박영효와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 1895년 들어 삼국간섭으로 왕실과 조정에 친러파가 등장하면서 개화파 정부는 결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이 무렵 그도 일시 일선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다시 탁지부대신에 복귀하였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 개화파 정부가 붕괴하는 와중에 그는 고향으로 피신하다가 용인에서 난민에게 피살되었다.

나라의 근대 개혁을 위해 총대를 멨지만 친일파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역사의 무대에서 쫓겨난 셈이다. 그는 1910년 6월 30일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에 추증(追贈)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는 등 형식상 명예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무렵은 이미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의 배후에 일본이 도사리고 있었으리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이 또한 또 하나의 오명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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