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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魚在淵]

목숨을 바쳐 미국 함대를 격퇴하다

1823년(순조 23) ~ 1871년(고종 8)

어재연 대표 이미지

어재연 장군 초상화

e뮤지엄(강화역사박물관)

1 머리말

어재연(魚在淵)은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를 맞아 강화도 광성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을 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무관이다.

2 생애와 관직생활

어재연은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는 성우(性于)이다. 1823년(순조 23) 아버지 어용인(魚用仁)과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 俞氏) 사이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이 없었으나, 할아버지 어석명(魚錫命)은 인동부사(仁同府使)까지 지냈다. 어재연의 형인 어재호(魚在濠)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동생인 어재순(魚在淳)은 형 재연을 따라 신미양요에 백의종군으로 참가하였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이후 어재순은 그 공로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로서 부사(府使) 한택리(韓澤履)의 딸이다.

어재연은 어렸을 적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힘이 센 장사로 알려졌다. 1841년(헌종 7)에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음력 10월에 총융초관(摠戎哨官)이 되면서 무관으로서의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47년(헌종 13)에는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었으며, 1850년(철종 원년) 음력 5월에는 평양중군(平壤中軍)이 되었다. 그런데 어재연이 광양현감에 아직 재임하고 있었을 때 전라도 일대 각종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적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1850년 8월 이 조운선이 과적과 악천후로 인하여 난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에 대한 문책으로 1851년 음력 4월 충청북도 제천에 유배되었다가 1852년(철종 3) 음력 4월에 풀려났다. 1853년 4월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이후 내금위장(內禁衛將), 훈국별장(訓局別將), 풍천부사(豐川府使), 도감천총(都監千摠), 대구영장(大丘營將), 장단부사(長湍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 3) 음력 3월에 공충도(公忠道: 현재의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제수(除授)되었다. 이 해에 조선정부가 조선에 입국해 있던 프랑스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신자를 처형하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였고, 이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강화도로 올라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충도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어재연은 이곳의 방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쓰고, 또 천주교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후 1866년 음력 11월에는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발령받아 4년여 동안 재임하였다. 1871년 음력 2월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어 금위영중군(禁衛營中軍)에 임명되었지만, 곧 병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해 음력 4월에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같은 달 14일 특별히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곧바로 출진하였다가 4월 24일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해 순절(殉節)하였다.

3 귀감이 되는 목민관

어재연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을 때마다 지방행정을 잘 처리하여 귀감이 되었다. 비록 1847년 첫 지방관이었던 광양현감으로 있을 때 조운선 선적의 실수로 인하여 유배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지방관에 부임할 때마다 지방의 폐해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다.

풍천부사에 재직하였을 때는 바닷가 주변 마을에 염분으로 인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자 새로 양전(量田)을 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다시 부과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1859년(고종 10) 방어사(防禦使)의 이력(履歷)을 허락받았다. 대구영장 재직 시에는 좀도둑 단속을 잘 하여 백성들이 편안케 하였다. 이때 고종이 즉위하면서 1864년(고종 1) 각도 관찰사에게 어진 관리[良吏]를 선발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어재연이 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곧이어 장단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곳은 개성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로 가는 요로였기 때문에 중국 사신이나 고위 관료들의 행차가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각종 연회 등 경비지출이 많았는데, 이를 틈타 아전들이 세금 포납과 과중한 조세 징수, 불공평한 과세를 행하였고, 따라서 백성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어재연은 이곳에 부임하자 세금 비리를 근원적으로 밝혀내고 또 수세상의 감면 혜택을 공정히 베푸는 등 조세행정을 바로잡았다. 그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 내리는 옷감)를 하사받았다.

1866년 음력 11월에는 회령부사로 발령받았다. 이곳은 국경지대로 조선상인들과 중국상인들 간의 거래를 둘러싼 갈등이나 국경주변의 도적떼 출몰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쟁단(爭端: 다툼의 실마리)이 끊이지 않았다. 어재연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국경시장을 일시 폐쇄함으로써 중국상인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도적패거리를 엄히 단속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1869년에 이르러 어재연은 회령부사로서의 임기가 다 되어 교체되어야 했는데, 백성들이 어재연이 계속 지방관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여 이례적으로 1년 유임되었다.

4 신미양요와 어재연의 순절

1866년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평양의 군민들과 충돌하여 선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한 응징과 손해배상 청구, 그리고 조선의 개항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신미양요).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가 군함 5척에 병력 총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하여, 음력 4월 1일(양력 5월 19일)에 충청도 해미(海美) 앞바다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북상하면서 조선 해안을 측량하였는데, 미국 함대의 접근 소식은 곧 조선정부에도 알려졌다. 결국 조선정부는 4월 13일 대표 3인을 함대에 파견하여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측은 강화해협 탐측을 실시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고, 다음날 실제로 탐측을 강행하였다. 미국 측 탐사대가 강화도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수병이 포격을 시작하였고, 탐사대도 응사하여 쌍방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군의 대포는 미국 측의 대포에 비하여 성능이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진지에서 철수하였다.

상황이 이와 같이 위급하게 돌아가게 되자, 조선정부는 빈자리로 남아 있던 진무중군 자리에 급히 어재연을 임명하고, 제반 임명 절차를 생략한 채 서둘러 강화도로 파견하였다. 4월 15일에 어재연은 훈련도감 2초(哨: 1초는 125명)와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의 각군 1초씩을 선발하여 총 5초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출발하였다. 이튿날 광성보에 도착하자마자 총 1,000여 명에 이르는 군사를 수습하여 광성보 소속의 3개 돈대에 조정 배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대포 143문을 총동원하여 재배치함으로써 항전 태세를 강화하였다.

미 함대 수뇌부는 손돌목에서의 포격전에 대해 조선군이 미국 함대에 불법적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것으로 규정하고, 조선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리고 10일 이내에 조선정부가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을 경우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다는 서신을 장대 끝에 매달아 율도 해안에 꽂아 두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 측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4월 17일 미 함대 측에 친서를 보내어, 손돌목에서의 충돌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조선군 수비대의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미 함대 측은 조선에서 적절한 사과를 취할 것을 재차 요구하며 만약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결국 조선정부와 미 함대 측과의 교섭은 결렬되고, 마침내 음력 4월 23일(양력 6월 10일) 미 함대는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날 미 함대와 조선군과의 최초의 전투는 강화해협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던 초지진에서 시작되었다. 초지진 수비대는 미 함대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상륙을 저지하고자 하였지만, 화력의 열세로 인하여 오히려 진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다수의 사상자만 남기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미 함대가 새벽 초지진의 북쪽에 위치한 덕진진을 공략하여 조선수비대는 다시 패퇴하였다.

어재연이 방어태세를 갖춘 광성보에는 4월 24일 정오가 지난 무렵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광성보는 전방에서는 미 함대의 강력한 포격을 받았고, 후방에서는 덕진진에서부터 쳐들어온 미 상륙부대의 곡사포 공격을 받아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다. 미 함대 측은 해상 지원부대의 함포사격이 끝나자 미군 상륙부대가 돌격을 개시하였고, 급기야는 광성돈대 부근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광성진의 조선수비대는 함포 및 곡사포 공격으로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전하였다. 하지만 끝내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재연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미 함대 측은 광성보 전투에서 단지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밖에 내지 않을 정도로 손실이 가벼웠다. 하지만 미 함대는 강화도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화력을 소비하여 더 이상 상륙작전을 감행할 여력이 없었다. 그에 따라 4월 25일 일단 모함(母艦: 이동 기지 역할을 하는 군함)이 있던 작약도로 철수하였다. 4월 27일에는 조선군 포로를 조건 없이 석방하며 교섭을 진척시키고자 하였지만, 조선정부 측에서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였다. 결국 미 함대 측은 더 이상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5월 26일 작약도에서도 완전히 철수하였고, 이로써 신미양요는 종결되었다.

어재연은 4월 28일 광성보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병조판서와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또 그의 아우인 어재순도 형 재연과 함께 광성보에서 항전한 공로를 기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후 어재연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척화(斥和)의 본보기로서, 또 국권 침탈의 위기 상황에서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킨 영웅으로서 예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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