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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吳慶錫]

북촌의 양반자제에게서 희망을 찾다

1831년(순조 31) ~ 1879년(고종 16)

오경석 대표 이미지

오경석(1872년 촬영)

1 개화사상의 비조

오경석은 개화사상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아들 오세창은 자신의 아버지 오경석이 경각에 처해있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동지를 구해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고 회고하였다. 실제로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을 일으킨 청년 정치가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그는 왜 북촌의 양반자제들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였을까?

2 전통적인 역관 가문에 태어나

오경석은 18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원거(元秬)이며 호는 역매(亦梅)이다. 역관 가문 출신으로 마찬가지로 역관 출신 지식인인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다. 이상적은 학문적인 실력이 뛰어나 《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간행하는 데에도 참여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으로 문장과 서화 그리고 금석학에 두루 능한 사람이었다. 오경석은 이상적을 통해서 추사의 학문을 계승하고 있었다.

오경석은 집에서 내려오는 가학(家學)인 박제가(朴齊家)의 실학도 전수받았다. 박제가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서자로 태어나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와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경석의 부친 오응현 때부터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그의 저작을 반드시 읽고 배우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서자들뿐만 아니라 역관들도 사회적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역관 가문인 오경석 집안에서 박제가의 학문에 더욱 공감했을 수 있다.

오경석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정희와 이상적을 이어받아 서화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란 금석학 서적을 발간하였으며 서화의 수집과 완상을 넘어 직접 창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정조경(程祖慶) 등 중국의 문사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이렇게 중국과 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1846년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던 것도 한몫을 하였다.

그는 1853년 처음 사신들을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온 이래 무려 13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는 역관으로서의 공식적인 업무 이외에 중국의 문물을 섭취하고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렇게 중국 학계와의 활발한 교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꽃피웠다. 그는 《삼한금석록》 이외에 《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과《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서화와 금석학에 대한 조예는 아들인 오세창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이란 명저를 남길 수 있었다.

3 서세동점의 현장을 목도하다

오경석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관으로서 중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1853년 처음 북경에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1875년까지 무려 13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이 무렵은 이른바 서세동점의 시대로 중국이 서양 자본주의 나라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다. 그가 중국을 처음 방문한 1853년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영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한지 11년째 되는 해였다. 그리고 그가 중국에 처음 건너간 지 4년 뒤인 1857년에는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1860년에는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북경이 함락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도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북경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러한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보는 공식적으로는 정사와 부사의 이름으로 보고되었지만 실무는 역관인 오경석이 떠맡아야만 하였다. 당시 그는 외교관의 역할을 넘어서 일종의 첩보원 역할까지 해야만 하였다.

서세동점의 파도는 기어코 조선에까지 밀려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천주교도 탄압을 비난하면서 조선을 침공한 사건인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오경석은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중국에 머물면서 현지의 정세를 탐지하여 본국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당시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양요기록(洋擾記錄)》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을 통해 당시 그가 행한 역할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원정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군비도 현지의 무역상으로부터 차입한 것이므로 결전보다는 방어에 주력하여 지구전으로 대응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지쳐서 물러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아울러 저들은 포교 활동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조선 개항을 위한 내응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니 절대로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부득이 통상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에는 저들의 상품을 수입하는 일을 금하고 단지 우리의 상품과 저들의 금‧은을 바꾸는 것만 허용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러한 오경석의 보고는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에 대처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흥선대원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4 개항 불가피론을 제기했지만

오경석이 중국을 드나들 무렵 중국에서는 서양을 막아내기 위해서라고 서양을 알아야만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결과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등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을 알려주는 서적들이 줄줄이 발간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의 것을 본체로 하되 서양의 것 가운데에도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자(中體西用)고 하는 양무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선 서양의 무기와 군사기술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미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상 서양식 외교방법도 익혀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경석도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을 받아들였다. 중국에 갔다 오면서《해국도지》등의 서적을 가져와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때 그의 사상적 동지가 된 인물이 바로 유홍기(유대치)였다. 그는 이러한 서적을 읽으면서 생각도 조금씩 바꾸어 갔다. 서세동점이라는 시대적 대세 앞에서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1871년에 있었던 신미양요 당시 흥선대원군에게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조심스럽게 건의하는 것을 통해 드러났다.

당시 그가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건의한 것은 당시 중국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미국이 다른 여러 열강에 비해서 덜 침략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오랑캐를 이용해서 오랑캐를 제압하는(以夷制夷)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침략적인 미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오경석이 미국과의 개항을 조심스럽게 건의한 데에는 이러한 중국의 분위기도 한몫하였다.

하지만 오경석은 이러한 건의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를 신임하였던 흥선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 그를 지목하여 ‘개항가’라고 부르면서 어떤 말을 하여도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신미양요 이후 최대의 정치적 후원자를 잃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버렸다. 그는 중인이라고 하는 신분적 한계를 더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5 북촌의 양반자제에서 희망을 찾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사상적 동지인 유홍기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동지를 구해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여기서 북촌이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동리로서 당시 집권 엘리트 계층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는 집권 엘리트 계층 출신의 젊은 세대들에게서 기대를 걸었다.

오경석이 이렇게 북촌 양반 자제에게 희망을 건 것은 신미양요 당시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신이 중인으로서 신분적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중인들은 행정적인 실무에만 종사할 뿐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외교도 마찬가지였다. 외교적인 실무는 역관들이 대부분 도맡아 행했지만 생색은 양반 출신 고위 관료들이 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실무를 떠맡았던 역관들을 배제한다는 것이 그를 비롯한 여러 역관의 불만이었다.

오경석은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동지를 구하는 일에 직접 나섰다. 그리하여 그의 문하에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의 젊은 엘리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홍기와 함께 이들을 가르쳐 진취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시켰다. 이들이 이른바 개화당을 구성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이들의 거사에 직접 동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동지 유홍기는 갑신정변 당시까지 생존하여 거사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그가 겪은 중인으로서의 신분적 한계라고 하는 자그마한 날갯짓이 훗날 갑신정변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6 강화도조약의 현장에서

오경석이 이렇게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동지를 구하는 일에 애쓰고 있는 가운데 1875년 일본이 무력시위를 통해 외교관계의 회복을 요구한 사건인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듬해인 1876년 1월 다시 군함 5척을 강화도 앞바다에 파견하여 개국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역관인 그는 다시금 역사의 현장에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양국 대표 간 정식 교섭이 시작되기 전 문정관으로 파견되어 사전 접촉을 하였으며 강화도에서 정식 교섭이 시작되자 조선측 대표인 신헌(申櫶)의 막후에서 외교 실무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이때 오경석은 매우 신중하였다. 그가 한 역할은 단지 조선 측 입장을 일본에 전하고 일본의 생각을 교섭대표인 신헌과 조선 조정에 알리는 것이었다. 강화도에서 외교 교섭이 진행될 때 조정에서는 개국통상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개국통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내용이든 건의를 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건의했다가 ‘개항가’로 몰려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의 외교 교섭 당시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경석이 문정관으로 사전 교섭을 할 당시 일본 측 외교실무자인 미야모토 오카즈(宮本小一)과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밀담을 나누었는데 여기서 그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밀담에서 신미양요 당시 자신이 외교 관계를 맺을 것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했지만 그가 이 말을 듣지 않았고 미국 함대가 몇 차례 포격만을 주고받은 후 떠나 버리는 바람에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회고하면서 이번에 일본은 강화도에 도착하는 대로 곧바로 상륙하여 군사적인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 발언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전에 일본과 내통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 있는 발언이었다. 이 발언의 이면에는 자신의 능력과 식견을 알아봐 주지 않는 조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발언을 통해 당시 그가 조선의 현실에 대해 얼마나 급박하게 생각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급박한 마음은 그의 정치적 제자인 김옥균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그로 하여금 성급하게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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