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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吳世昌]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전환하다

1864년(고종 1) ~ 1953년

오세창 대표 이미지

오세창 사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손병희의 참모로 동학의 노선 전환을 뒷받침하다

동학은 1904년에 극적인 노선 전환을 하였다.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동학은 전통적으로 반개화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동학교단이 1904년 문명개화를 표방한 것이다. 동학교단에서는 교도들로 하여금 진보회(進步會)라는 사회단체를 조직하도록 하였으며 개화노선을 채택한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16만명의 교도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선전환을 당시 동학 교단에서는 갑진개화운동이라고 불렀다. 이는 3대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가 주도한 일이었지만 그의 참모로서 이를 뒷받침한 인물이 바로 오세창(吳世昌)이었다.

2 아버지 오경석

오세창(吳世昌)은 1864년 7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경석(吳慶錫)이다. 오세창은 자신의 아버지 오경석이 과거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얻어 이들을 통해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경석은 역관(譯官) 신분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제약이 없는 양반 자제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유홍기(劉鴻基)가 이러한 오경석의 뜻을 이어받아 실천하였으며 유홍기가 가르친 인물이 바로 김옥균(金玉均)이었다. 따라서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경석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오세창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1879년 역과(譯科)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사역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오경석이 그가 역과에 급제하던 해인 1879년에 이미 사망한 점도 그가 정변에 가담하지 않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는 일을 맡았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창간되었다가 갑신정변 당시 박문국의 인쇄시설이 파괴되면서 발간이 중단된 바 있다. 1885년 5월 박문국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기계를 도입하고 인원을 보충하여 신문을 발행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 결과 1886년 1월 25일 새로 세워진 박문국에서 『한성순보』를 『한성주보(漢城周報)』로 제호를 바꾸어 속간할 수 있었다. 오세창이 박문국 주사로 임명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박문국은 1888년 7월 7일 폐지되고 『한성주보』도 폐간되었다. 이후 오세창이 무엇을 하였는지는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3 개화파 정객 오세창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오세창의 관직 생활이 재개되었다. 갑오개혁 초기 이를 추진하던 기관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였다. 오세창은 1894년 6월 26일 군국기무처의 낭청(郎廳)으로 임명되어 갑오개혁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와 함께 군국기무처 낭청으로 유정수(柳定秀)와 김인식(金仁植)이 임명되었는데 김인식은 그와 마찬가지로 박문국의 주사를 거친 인물이며 유정수는 1881년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바 있는 인물이었다. 오세창은 이듬해 1월 공무아문참의(工務衙門參議)를 맡았으며 4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고 9월에는 통신국장을 겸임하는 등 갑오개혁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 개화파 정권이 붕괴하면서 오세창도 관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권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에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후의 삶이 순탄할 수 없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할 때 간사원으로 참여하였지만 계속 활동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97년 8월에는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일본공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업학교 부속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직을 맡기도 하였지만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이렇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던 오세창의 삶은 1902년 결정적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유길준과 관련된 역모(逆謀)사건에 휘말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고종이 서상집(徐相潗)이란 인물을 이용하여 망명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나아가 이들을 유인하여 일망타진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당시 국내외로 세력을 확충하여 국내로의 복귀를 도모하고 있던 유길준이 여기에 휘말린 사건이다. 오세창은 갑오개혁 당시 유길준과의 인연 때문에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세창은 도중에 서상집의 거동에 의심을 품고 일본으로 도주하여 가까스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다카지마 류조(高島隆藏)로 이름을 바꾸고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개화파 정객으로서의 그의 삶은 결국 망명으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4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다

오세창은 1902년 일본에서 망명 중이던 동학 3대 교주 손병희를 만나 그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 무렵 그와 함께 동학에 입교한 인물로 권동진(權東鎭)과 양한묵(梁漢黙)을 들 수 있다. 권동진은 무관출신으로 거문도첨사(巨文島僉使)로 있을 때 을미사변에 연루된 혐의로 일본에 망명한 인물이며 양한묵은 갑오개혁 당시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로 있다가 1897년 사직하고 일본에 건너간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개화파에 속하는 인물로서 동학에 입교하면서 동학교단 내에 이른바 ‘문명파’를 형성하였다.

손병희가 이들을 끌어들인 것을 보면 일찌감치 동학의 노선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병희는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갑진개화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근본적인 노선전환을 선언하고 나섰다. 갑진개화운동의 직접적 이유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국내에 동학의 합법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동학이 일본에 적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문명개화를 표방한 것이다. 오세창은 이러한 갑진개화에 있어서 핵심 이론가였던 것이다.

오세창은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천도교에서 펴낸 일간지인 『만세보(萬歲報)』의 사장과 중동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가 결성될 때 여기에 참가하여 부회장을 맡은 점이다. 그가 대한협회에 가입한 것은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권동진 등과 함께 천도교의 대표 격으로 여기에 참가한 것이었다. 천도교는 일진회에서 탈퇴할 때 정교분리를 내세운 바 있는데 일진회와 분리가 완료된 후 다시금 조심스럽게 정치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천도교의 정치적 행보를 오세창이 떠맡고 있었던 것이다.

오세창이 부회장으로 있던 시절 대한협회와 일진회의 연합이 시도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천도교의 정치노선이 일제와의 정면 대결을 지향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보다는 오히려 보호국 체제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뿐 아니라 당시 대한협회 전체가 타협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과의 합방을 주장했던 일진회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5 3·1운동에 참여하다

오세창의 1910년대의 활동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제의 무단통치 때문에 국내에서 일체의 정치 사회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의 폭도 천도교 교단 내로 국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10년대 천도교 교단 내에는 추진되고 있던 이른바 삼갑운동(三甲運動)에 그도 상당 부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오세창을 비롯한 천도교 교단이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재개한 것은 1818년 후반기에 들어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에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가 누구보다 기민하게 움직였는데 여기서 큰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바로 오세창이었다.

오세창은 최린(崔麟), 권동진 등과 함께 천도교 교단 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별도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와 접촉하여 두 줄기의 독립운동이 한데 모일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이러한 준비작업 끝에 1919년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그도 천도교를 대표하여 여기에 서명하였다. 그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선언서를 낭독한 즉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오랜 재판 끝에 1920년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는 그에게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1921년 12월 23일 만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6 서화가(書畫家) 오세창

오세창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 더 이상 전면에서 나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들어 천도교 내부에서는 보수 세력과 혁신 세력,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그는 이러할 때 교단의 원로로서 통합을 위한 중재에 나서곤 하였지만 그 이상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그의 활동은 서화에 집중되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인 오경석 때부터 금석학과 서화에 조예가 깊은 집안이었다. 오경석은『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삼한방비록( 三韓訪碑錄)』,『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수의쾌독(隨意快讀)』등의 책을 지은 바 있다. 이러한 집안 전통 때문인지 그도 일찍부터 서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화와 관련된 그의 경력으로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1918년 서화협회를 조직한 일이다.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서예 부문에 직접 출품하여 수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서화를 창작하는 것보다 고서화를 수집, 정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이러한 작업의 결과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근역인수(槿域印藪)』,『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畵彙)』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이 가운데 『근역서화징』은 역대의 서화가 1,117명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집대성한 일종의 서화가 인명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근역인수』를 비롯한 나머지 책들은 수많은 고서화와 인장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오세창은 전통시대의 서화를 갈무리한다고 하는 또 하나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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