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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항일 만세 운동의 아이콘이자 한국인의 영원한 누나

1902년(고종 39) ~ 1920년

유관순 대표 이미지

유관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출생과 입교

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음력 11월 17일(양력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木川郡) 이동면 매봉산 아래 지령리(芝靈里, 속칭 지렁이골)에서 테어났다. 이곳은 유관순만이 아니라 조병옥(趙炳玉)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유관순의 생가와 조병옥의 생가는 두 집 건너로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은 유윤기의 장남으로 1863년 태어났다. 1894년 청주 한씨(淸州 韓氏)와 혼인하고 3년 만인 1897년 첫 딸 계출(癸出)을 낳았지만 얼마 후 부인이 사망하고, 이듬해 쯤 전주 이씨(全州 李氏) 규수(圭壽)와 원(元)씨 사이에서 1875년에 태어난 이소제(李少悌)를 새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재혼 후인 1899년 5월 장남 유우석(柳愚錫)을 얻은 데 이어 유관순과 둘째 아들 유인석(柳仁錫, 1904년 12월 7일), 막내아들 유관석(柳寬錫, 1911년 1월 10일)을 얻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라 할 수 있던 당시에는 일본으로 대변되는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서구의 종교와 사상,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였다. 특히 기독교가 급속히 확산되며 신도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다양했다. 기독교에서 제공하는 교리에 감화되는 이들도 있었지만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제공한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누리기 위한 이들도 있었으며, 서세동점의 불안한 시대에 신변의 안전과 재산의 보호나 은닉 등과 같은 세속적인 이익을 좇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 가운데 항일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조선을 침략하고 합병을 단행한 일본 제국주의는 미국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민족해방에 뜻을 둔 이들 역시 다수 기독교로 개종했던 것이며, 기독교로 개종한 민족해방 운동가들에게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조선인 신도의 증가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좋은 조건이었다.

유관순이 태어난 지령리에도 기독교회가 상당히 일찍 들어섰다. 이에 대해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자신의 육촌 할아버지가 세브란스 의사였던 감리교 선교사 미국인 케이블과 친교가 있었기 때문이며, 일찍부터 지령리의 한 초가에 종과 십자가를 달고 예배당으로 사용했다고 회고하였다. 같은 마을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趙仁元) 역시 한학(漢學)을 배우게 했던 부모의 소망과 달리 케이블 목사가 지령리에 와서 선교를 하자 입교를 하고 열성적으로 교회 일을 보며 지령리 교회의 속장으로 활약하며 선교에 힘썼다고 한다. 이처럼 지령리에 기독교가 전파되자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유관순 일가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입교하게 되었다. 유관순의 숙부인 유중무(柳重武)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며 지령리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선교에 힘써 외국인 선교사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1909년에는 지령리 교회의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유관순의 가문은 이른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발 빠르게 새로운 문물을 접하였다. 유관순에게도 동네 교회는 배움터이자 놀이터로서 기능하였다.

서구화가 진전되던 시대에 기독교로의 개종은 서구 문물과 신식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시골이었던 지령리에서 신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도시로의 유학생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은 기독교의 이른 전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령리 교회의 속장(屬長: 구역별 모임인 속회屬會를 맡아 인도하는 교직)이었던 조인원이 자신의 아들 조병옥을, 한문을 배우는 서당을 그만 두게 하고 케이블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공주의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유학 보낸 것은 그 시초를 이룬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른 시기에 개종한 유중무 역시 신앙 활동을 통해 근대화라는 시대적 조류를 읽어내고 근대 문물의 섭취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아들 유경석(柳京錫)과 딸 유예도(柳禮道) 및 조카 유우석과 유관순을 공주 영명학교와 서울 이화학당에 유학시켜 신학문을 배우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과 유관순을 둘러싼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2 서울로의 유학과 3·1운동에의 참여

유관순의 고향인 지령리 일대의 새로운 교육에 대한 열의는 강점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비록 국가는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조선총독부와 일본인들도 서구인인 선교사들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며, 선교사들은 지방의 학생들을 도시의 미션 스쿨(mission school)로,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관순은 이화학당을 다녔는데, 이 역시 공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샤프 부인의 주선을 통한 것이었다. 유관순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에서 ‘사 부인’으로 일컬어지는 샤프 부인의 본명은 앨리스 제이 햄몬드(Alice J. Hammond)이다. 그녀는 1900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후 감리교 목사인 로버트 아더 샤프(Robert Arthur Sharp)와 결혼하여 사애리시(史愛理施: 샤프 앨리스) 혹은 ‘사 부인’이라 불렸는데 여성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05년 그녀는 선교를 위해 남편과 함께 공주에 내려온 직후 공주에 보통과 4년제와 중등과 2년제인 명선여학교를 세우고 열성적으로 선교와 교육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유관순 역시 샤프 부인의 주선으로 1915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생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이화학당에는 유관순의 사촌언니인 유예도가 이미 다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기숙사 방을 사용하였는데 어린 유관순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타지 생활의 외로움이나 어려움을 언니인 유예도가 많이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유관순과 함께 생활을 했던 친구들의 회고에 따르면 유관순은 교비생으로 학교를 다녔던 만큼 학교생활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을 돕는 것에 열심이었고, 또 혼자서 기도실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도를 올리며 봉사에 열심인 생전 유관순의 면모는 해방 직후 발간된 『유관순전』 이래로 그녀를 그리는 소설과 영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외에도 유관순의 학교생활과 관련하여 많이 회자되는 것은 주말마다 정동교회(貞洞敎會)의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3·1운동의 준비 장소 가운데 하나였던 곳인데, 유관순은 1915년 이화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이래로 이곳에서 예배를 보며 당시 담임목사였던 손정도(孫貞道), 이필주(李弼柱)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신앙심과 애국심을 더욱 키웠다고 한다.

한편 유관순과 같이 학교생활을 한 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유관순은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해 들어왔다고 한다. 유관순이 입학했을 때 이화학당은 유치원을 포함해 보통과(4년제), 고등과(4년제), 중학과(4년제)는 물론 1910년에는 대학과(5년제)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유관순이 보통과를 졸업하던 191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는 각각 4년제 이화여자보통학교와 3년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리되었으며, 유관순은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다음 해인 1919년 1월 22일 고종(高宗) 황제가 붕어(崩御)하였다. 당시 고종의 급작스러운 붕어를 둘러싸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고, 특히 일본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는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3월 3일이 국장일로 결정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바로 이를 기해 3·1운동이 벌어졌다.

3월 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이화학당은 교문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의 참여를 저지하였다. 유관순은 친구들과 담을 넘어 만세 시위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인파에 휩쓸리고 수비대에 쫓겨 학교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4일 후인 3월 5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전개된 학생들의 만세 시위에 유관순은 서명학(徐明學), 국현순, 김복순, 김희자 등 이화의 급우들과 함께 참여했으며,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은 경찰에게 붙들려 남산에 있는 경무총감부에 끌려갔다. 다행히도 이때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경무총감부로 와서 학생들의 인계를 강력히 요청하였기 때문에 무사히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가 폭증하자 서울의 각급 학교에서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이화학당 역시 3월 10일을 기해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자 이화의 학생들은 고향으로 가야 했으며, 유관순 역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3 병천면에서의 만세운동과 옥중투쟁

유관순이 고향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14일 고향 인근의 목천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을 받아 지령리에서도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3월 16일 주일예배가 끝나고 유중권과 유중무, 조인원 등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이고, 아우내 장터를 중심으로 6개의 마을을 아울러 거사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유관순과 유예도가 주변 지역으로의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또 마을의 부녀자들은 태극기를 그리며 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유우석을 가르쳤던 김구응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조인원, 유중권 등과 함께 운동의 준비와 동지 규합에 열심이었다. 유관순 역시 주변으로의 연락을 위해 수십 리의 길을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걸어다지며 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지령리를 중심으로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이 준비되던 당시 주변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월 20일에는 입장(笠場) 장날을 맞아 사립 광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를 벌였으며, 3월 28일 입장의 장날에는 직산 금광회사의 광산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다. 이튿날인 29일에는 천안 읍내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행진하였으며, 30일에는 입장에서 3백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는데, 이러한 지역들은 유관순의 연락활동과 관계된 지역이라고 한다.

약속한 4월 1일 오후 한 시, 수천의 장사꾼들이 아우내 장터를 덮었고,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수천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며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은 시작되었다. 당시 판결문에서는 조인원과 함께 유중권, 유중무가 만세를 불렀다며 당시 운동이 조인원 집안과 유관순 집안이 함께 주도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군중이 만세를 부르자 아우내 장터 근처의 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이를 진압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이들이 칼을 맞고 쓰러지자 만세를 부르던 시위대는 흥분하여 주재소를 향했고, 이에 일본의 헌병들은 더욱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의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던 유관순을 찌르고 깃대를 부러뜨렸다. 이때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인 유중권과 이소제는 일본 헌병이 발포한 흉탄에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유관순의 부모만이 아니라 운동의 준비에 열성적이었던 김구응과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도 목숨을 잃었으며, 총칼을 앞세운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 후 유관순은 동생들이 걱정되어 동리로 돌아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미결인 상태로 1개월가량 공주형무소에 복역하다가 1919년 5월 9일 1심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았다. 3·1운동의 주도자였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를 대표했던 손병희(孫秉熙)가 3년 형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유관순에게 내려진 형량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유관순을 비롯해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1심 판결에 불복, 항고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유관순은 3년 형을 언도받았는데, 다른 이들은 상고를 하였지만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유관순이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저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우연히도 이화학당의 교사로서 유관순의 스승인 박인덕(朴仁德) 역시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해방 후 박인덕에 의해 유관순의 옥중투쟁이 알려지게 되었다. 유관순은 옥중투쟁으로 구타와 고문을 당해 건강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당시 박인덕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여 만세를 그만 부르라고 충고했으며 유관순은 이를 받아들여 한동안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3·1운동이 발발한 지 정확히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을 기해 유관순은 다시 만세를 외쳤으며, 이러한 유관순에 호응하여 수많은 수감자들도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간수들은 이러한 유관순을 구타했는데, 이때 유관순은 방광이 파열되는 상처를 입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한편 1920년 4월 28일 일본 정부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인 방자(方子)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5천여 명의 정치범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고, 이때 유관순도 사면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 당시 허리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옥중에서 제대로 된 치료는 고사하고 변변한 식사도 못한 채 계속된 투쟁으로 인한 구타와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나간 유관순은 가석방이 이루어지기 전인 1920년 9월 28일 18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관순이 죽었을 때 유관순의 부모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오빠 유우석도 수감 중이었고, 사촌오빠 유경석 역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도피 중이었기 때문에 유관순의 사망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15일이나 지난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수습해 갔으며, 이틀 후인 14일 생전 이화학당 재학시절 유관순이 주일마다 찾았던 정동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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