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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兪吉濬]

최초의 재미 유학생, 『서유견문』의 저자

1856년(철종 7) ~ 1914년

유길준 대표 이미지

유길준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박규수의 가르침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는 1874년 벼슬에서 물러나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연암집(燕巖集)』을 강의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해주었다. 유길준(兪吉濬)도 이러한 젊은 양반 자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후일 ‘어렸을 적에 시를 지어 박규수 대감께 보여드렸더니 재주가 이토록 뛰어난데 왜 시무(時務)의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무의 학문이란 북학파(北學派)의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은 개방적이고 실용적 학문을 뜻하는 것이었다. 유길준은 이렇게 박규수의 영향을 받아 과거 준비를 포기하였으며 새로운 사상과 실천을 향한 험난한 여정에 올랐다.

2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이로써 그는 근대에 들어 해외에 유학한 첫 번째 유학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일본과 게이오의숙이 받아들인 첫 번째 외국인 학생이기도 하였다. 그가 게이오의숙에 입학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유길준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와 함께 어윤중을 수행한 사람으로는 윤치호(尹致昊)와 유정수(柳正秀)가 있었다. 어윤중은 애당초 이들을 일본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유정수도 그와 마찬가지로 게이오의숙에 입학시켰고 윤치호는 일본의 계몽사상가이자 기독교도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세운 동인사(同人社)에 입학시켰다. 당시 어윤중이 고종의 밀명에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을 위한 사전작업을 한 것으로 미루어 유길준 등 수행원들을 유학시킨 것도 그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라 왕명에 따른 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길준은 이렇게 신사유람단 덕택으로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지만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일본이 입은 피해를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다시금 수신사(修信使)를 보냈다. 수신사에는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開化黨)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현지에서 이들 수신사 일행과 만났으며 이들과 함께 1883년 1월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즉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에 임명되었다. 이 관청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새로 만들어졌으며 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이 관청의 실무관료로 발탁된 셈이다. 그는 이와 별도로 박영효가 추진하던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을 위한 실무도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신문 창간 작업이 중단되면서 유길준은 주사 직까지 사임하는 등 좌절을 겪었다.

이때 그에게 손을 내민 인물이 바로 그해 7월 보빙사(報聘使)로 임명된 민영익(閔泳翊)이었다. 그는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갈 수 있었다. 민영익은 이후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州) 세일럼(Selem)시의 피바디박물관(Peabody Museum)의 관장인 모스(E. S. Morse)의 개인지도 받았으며 1884년 8월에는 모스의 소개로 대학예비학교인 담머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 입학하였다. 이로써 그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라는 기록도 세울 수 있었다.

3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짓다

유길준이 미국에서 유학한 기간도 일본에서처럼 그리 길지는 못했다.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그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단 이듬해 봄 학기에 등록하였지만 그해 9월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곧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런던, 이집트 포트사이드,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귀국 즉시 포도대장(捕盜大將) 한규설(韓圭卨)의 자택에 감금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그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한패가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1887년 가을부터는 백록동(白鹿洞)에 있는 민영익 별장인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는 행동이 좀 더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개화파(開化派) 정객들의 암흑시대를 견디어 냈는데 이 기간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한규설의 자택에 연금되었을 때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취운정으로 옮긴 이후에는 한층 본격화하였다. 이때 집필한 글로는 「중립론(中立論)」 , 「지제의」(地制議), 「세제의」(稅制議), 「어채론」(漁採論)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들은 대부분 당시 긴요했던 국가정책 차원의 고민이 담겨진 것이었다.

유길준은 연금기간 동안 이렇게 여러 글을 집필하였지만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역시 『서유견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유견문』을 집필하겠다는 발상은 일본 유학 기간에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읽으면서 조선판 서양사정을 집필한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 집필은 연금기간 때 시작되었으며 탈고한 것이 1889년이었다. 탈고 당시에는 필사본으로 가지고 있었고 대중에게 공포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인쇄되어 간행된 것은 1895년 4월의 일이다. 그는 이 책을 일본 교순사(文詢社)를 통해 발행하였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단순한 기행문은 아니다. 그가 서구 근대의 각 분야를 관찰하고 그에 바탕하여 조선의 근대개혁을 기획한다고 하는 전략적 고민을 담은 책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을 많이 활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셋(Henry Fawcett)의 『부국책』(Manual of Political Economy)과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등 여러 자료를 널리 인용하였다. 서론에 해당하는 세계의 지리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국제관계, 정치제제, 인민의 권리, 법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서양 문물을 소개한 후 「개화의 등급」이라는 논설로 결론을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만큼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못했다. 이 책이 발행된 이듬해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망명의 길을 떠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관파천 직후에는 아예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각급 학교에서 교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또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4 왕세자의 머리를 깎은 유길준

유길준은 1894년부터 시작된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숨은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그가 강행한 단발령(斷髮令)이었다. 그가 이를 밀어붙이기 위해 직접 왕세자의 머리를 깎은 장면은 당시 그의 위상과 역할을 어떠했는지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갑오개혁에 초기부터 참여하였다.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신정부를 구성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는 당시 일본군을 따라 입궐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갑오개혁 추진기구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자 여기에 회의원으로 참여하여 안경수(安駉壽), 김가진(金嘉鎭) 등과 함께 많은 의안들을 기초하였다.

유길준은 군국기무처 내에서 김학우(金鶴羽), 권형진(權瀅鎭), 조희연(趙羲淵) 등 소장파 의원들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이들은 그가 1892년 연금에서 풀려난 뒤 자주 어울리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북한 지방의 토반(土班: 여러 대를 이어서 그 지방에서 붙박이로 사는 양반)이거나 무관 출신으로 1880년대 개화기구에서 실무를 담당하면서 성장한 인물들로 외국 여행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유길준과 함께 군국기무처의 개혁사업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유길준은 1894년 7월 28일 내무협판(內務協辦)에 임명됨으로써 정책 입안을 넘어서 집행까지 활동의 폭을 넓혔다.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지만 그가 맡았던 핵심적인 부서는 내무아문(內務衙門)과 내부(內部)였다. 1894년 12월 박영효가 내무대신이 되지만 그는 박영효와는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뱍영효와는 경쟁관계에 있었던 김홍집(金弘集)을 뒷받침하는 참모로서 활약하였다.

삼국간섭 후 왕실과 정부 내에 친러파가 대두하면서 개화파정부가 동요하였으며 그도 한때 의주부관찰사(義州府觀察使)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을미사변(乙未事變) 후 내부협판으로 복귀하였으며 그해 11월 15일에는 내부대신이 되어 이른바 을미개혁(乙未改革)을 강행하였다. 을미개혁에는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등 꼭 필요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시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단발령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전국 각지에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가진 유생들이 단발령의 실시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를 을미의병(乙未義兵)이라고 하는데 그는 내부대신으로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앞장서서 밀어붙였다. 머리 깎는 것을 독려하기 위해 국왕과 세자가 솔선해서 먼저 머리를 깎는 행사까지 펼쳤다. 그리고 그는 이 행사에서 세자의 머리를 깎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단발령에 대한 반발은 커져만 갔고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이를 틈타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그를 비롯한 개화파정부의 대신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5 망명 이후

유길준은 1896년 2월 일본으로 피신하여 1907년까지 10년이 넘는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조선 정부는 그를 비롯한 망명 인사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송환을 요구하였다. 1900년에는 주일특명전권공사(駐日特命全權公使) 이하영(李夏榮)을 통해 일본 외무성에 그의 인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본 망명객들을 중심으로 이준용(李埈鎔)을 추대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었지만 당시 그는 이 음모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이로부터 2년 뒤에는 또 다른 쿠데타 음모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건의 개요는 그가 서상집이란 인물을 포섭하여 국내에 복귀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려 하다가 적발된 것이었다. 그런데 서상집은 애당초 고종과 내통하고 있던 인물이었고 사실은 고종이 파놓은 함정에 그가 빠진 것이었다. 그런데 장호익과 조택현 등 일본으로 유학 온 장교들이 여기에 합류하면서 사건이 커져버렸다. 이들 유학생 장교들은 정부의 푸대접에 분개하여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란 단체를 조직하고 연판장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황제의 폐위를 비롯한 매우 과격한 언사가 들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사건으로 더욱 고종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 당시 그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체포는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김옥균이 그러했듯이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으로 추방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 정부를 통해서 여러 차례 귀국을 타진해 보았다. 하지만 고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1907년 고종이 퇴위한 이후에야 비로소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가 귀국한 후 순종은 그를 사면하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이 관직을 사퇴하면서 평화극복책을 건의하였다. 그가 건의한 평화극복책은 일단 일본의 선의를 믿고 그들의 협조를 얻어 개혁을 실시하여 부강하게 된다면 장차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그가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직시하지 못한 안이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치활동보다는 계몽적인 활동에 열중하였다.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를 조직하여 그의 지론이었던 지방자치의 기초를 구축하려 하였으며 흥사단과 교육구락부를 조직하여 교과서 편찬과 학교 설립 등 교육운동을 추진하였다. 호남철도주식모금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식산흥업운동도 전개하였다.

하지만 그는 1909년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일본에 다녀온 후 생각을 바꾸었다. 당시 일진회(一進會)에서는 한일 강제 병합을 청원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한성부민회에서 일진회원을 축출하는 등 강경하게 맞서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야욕을 이제야 깨달은 것인데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일본의 정책에 비판적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전면적인 반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韓國併合) 당시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제는 한국병합 이후 그에게 작위를 하사했는데 그는 이 작위를 반납한 것으로 그나마 최소한의 명예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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