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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柳麟錫]

의병장으로 위정척사에 앞장서다

1842년(헌종 8) ~ 1915년

유인석 대표 이미지

영정각에 봉안된 유인석 선생 영정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유인석(柳麟錫)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이다.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학통(學統)을 이었고,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충실하였다. 갑오개혁(甲午改革)과 함께 이루어진 의제(衣制)개혁과 단발령, 그리고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 등 일련의 사태에 항거하여 을미의병(乙未義兵)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항일의병활동을 벌였다.

2 화서학파의 학통을 잇다

유인석은 1842년(헌종 8) 강원도 춘성군(오늘날의 춘천)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고흥 유씨(高興 柳氏) 중곤(重坤)과 부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중선의 조부 유영오(柳榮五)의 인도에 따라 당대의 대유학자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다. 유영오와 이항로 사이에 일찍부터 교분이 있었기에 14세 소년이 말석(末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항로 문하에는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같은 학자들이 있었으며 유인석은 이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항로는 주자(朱子)의 학설을 확고히 하면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공맹(孔孟)과 주자의 도통을 이었다고 보아 송시열의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을 자신의 화이론(華夷論)과 연결하였다. 이항로는 중화(中華)는 이(理)를 지향하는 문화로 바른 것(正)이고, 중화와 이질적인 문화는 이(理)를 따르지 않아 사악하다(邪)고 평가하였다. 서양의 학문이 추구하는 바는 통화통색(通貨通色) 이며 이는 인욕(人慾)의 핵심이니, 서양 학문을 따르는 것은 곧 오랑캐(夷狄)만도 못한 금수(禽獸)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명(明)을 중화(中華)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청(淸)을 오랑캐로, 그리고 서양과 그 앞잡이인 일본을 금수로 구분한 이항로의 견해는 위정척사파가 개항 불가론을 전개하는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유인석은 이항로의 문하생으로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고, 평생 그 가르침에 충실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시국이 혼란해지자 고종은 이항로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하여 불러들였고, 이전까지 수차 벼슬을 사양하던 이항로는 마침내 입궐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연로한 스승을 모시고 함께 상경하여 이항로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비판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다시 낙향할 때까지 한 달간 척화론의 현장을 경험했다.

이항로와 함께 벽계(壁溪, 오늘날의 양평)로 내려간 유인석은 스승을 모시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1868년(고종 5) 이항로가 타계하자 유인석은 제자의 도리에 따라 스승을 애도하는 3년 심상(心喪)의 예를 다하였다. 유인석은 1871년(고종 8) 만동묘(萬東廟)를, 1873년(고종 10)에는 조종암(朝宗巖)을 참배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1875년(고종 12) 운요호사건을 기점으로 일본이 무력으로 개항을 강요하기 시작하자 조정 내에서 개항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 분개한 지방 유생들은 집단적으로 개항반대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이를 주도한 것이 화서학파였다. 김평묵과 유중교를 중심으로 개항 반대의 뜻을 담은 연명상소(聯名上疏)가 논의되었고, 유인석, 최익현(崔益鉉), 홍재구(洪在龜) 등이 주축이 되어 상소운동이 일어났다.

1876년(고종 13) 1월 홍재구를 연명상소의 대표자(疏頭)로 삼아, 유인석은 홍재학(洪在鶴) 등 경기·강원 지역의 동문 유생 47인과 함께 김평묵이 쓴 상소문 을 들고 상경했다. 그러나 이미 조정은 개항을 결정한 상황이었고, 연명상소를 올려도 고종의 뜻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끝내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되자 뜻을 이루지 못한 유인석은 초야로 내려가 후학 양성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같은 해 여름, 유인석은 유중교를 따라 경기도 가평 조종암 근방인 자리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유인석은 유중교를 도와 가평 자양서사(紫陽書社)를 개설하고 후학 양성을 시작하여 강학(講學)에 힘쓰는 것은 물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예를 행하고 친교를 쌓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유중교가 고향 가정리로 돌아가자 유인석도 동행하여 가정서사(柯亭書社)를 개설하여 강학하였고, 다시 유중교가 제천으로 옮겨 자양서사(紫陽書社)를 개설하자 유인석은 가정서사를 지키며 후학을 키웠다. 1893년(고종 30) 유중교가 타계한 다음에는 유인석이 제천으로 건너가 자양서사를 맡기도 하였다.

3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이끌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농민군 진압에 실패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요청에 응하자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들어 파병을 단행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김홍집(金弘集)을 총재로 내세워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은 친러정책을 펼쳐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을미사변).

김홍집 내각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대대적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반발을 가져온 것이 의제개혁 과 단발령 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부모에게 받은 몸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을 지켜온 유생들에게 단발령은 불효의 강요이자 전통의 파괴였으며, 의제개혁을 통해 의복제도를 간소화하고, 천한 색으로 여겨온 흑색 의복을 신분과 무관하게 입으라 한 것은 반상(班常)의 구분을 기초로 한 신분사회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인석 또한 이런 시국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유인석은 1895년(고종 32) 5월 2, 3일에 걸쳐 제천 인근 유생들을 모아 대규모의 강회와 향음례를 개최하여 전통 의제를 지키고 예를 다하며 시국을 논하였다. 이 행사는 이후에도 계속 열리는데, 여기에 참가한 인물들은 후일 유인석의 의병활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반발에도 불구하고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발포되자 유인석과 제천 일대의 유생들은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기에서 유인석은 선비가 택할 세 가지 방안으로, 의병을 일으키거나 해외로 망명하거나 자결하는 길밖에 없다는 처변삼사론(處變三事論) 을 설파하였다. 유인석은 당시 모친상까지 치르고 있었기에 청나라로 망명하여 중화를 지키려 하였으나, 안승우(安承禹), 이필희(李弼熙) 등 제자들은 눈물로 의병을 일으켜 싸울 것을 호소했다. 마침내 유인석은 1896년(고종 33) 2월 3일 의병장의 직책을 맡아 복수보형기(復讐保型旗)를 내걸고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출범시켰다. 재야 유생이 의병을 일으키는 뜻을 공자와 주자의 가르침 에서 찾은 유인석은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의 격문을 발송하고, 이는 의병운동을 전국 각지로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유인석은 영월에서 제천으로 입성하여 군기를 정비하고 병력을 보충하는 동시에, 친일적 행태를 보이던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체포·처단하였다. 유인석이 첫 목표로 삼은 것은 충주였는데, 충주는 충청지방의 행정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이며 일본이 개설한 통신선이 지나가는 지역이었다.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은 박영효(朴泳孝)의 지시에 따라 관내에서 단발령 등 개화정책을 실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처단하여 항일이라는 명분을 세우고 일본군도 견제하려 한 것이다.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의 수는 4천을 넘었지만 실제 무장을 갖춘 것은 400여명에 불과했고, 전투경험이나 군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자는 매우 드물었다. 반면 충주성에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 800여명과 일본군 수백 명까지 주둔하여 수적 열세를 만회할 충분한 전력이 있었다. 이에 유인석은 충주성 내의 내응 세력을 활용하고, 수적 우세와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기습을 가해 2월 16일 충주성을 장악하여 김규식을 참수하였다.

충주성 공략이 진행되던 중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루어져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이 단발령의 취소를 선포하고 의병의 해산을 명하자 많은 의병들이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으로서는 개화정책이 중단된 것도 아니고 일본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것도 아닌데 단발령의 철회만을 들어 해산할 수는 없었다. 이에 유인석은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 의 격문을 발송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휘하의 의병장들을 지방 각지로 파견하여 병력을 충원하도록 지시하였다.

충주를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충주성 외곽을 포위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보급이 막히고 전력이 소모되자 유인석은 충주 방어가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3월 4일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호좌창의진이 제천에 주둔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근방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이 합류하여 군세가 커졌다. 3월 중순에 들어 유인석은 향후 진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일본군 병참선을 와해시키기 위해 가흥(佳興)과 수안보(水安堡)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했다. 이때 유인석은 가흥 공격의 선봉을 맡은 평민 의병장 김백선(金百先)이 증원요청을 거부한 안승우를 원망하여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린 것을 이유로 처형했는데, 김백선의 처형은 내부의 갈등과 사기 저하를 불러왔다.

4월에도 호좌창의진의 사기가 떨어지고 내부 동요가 커지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4월 25일 친위대참령(親衛隊參領) 장기렴(張基濂)이 관군 400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에 도착하여 유인석에게 해산을 종용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에 유인석은 반박문을 보내는 등 수차례 서신을 교환하며 논쟁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관군은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고 호좌창의진은 대패했다. 유인석은 패잔병을 이끌고 단양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전력손실은 이미 회복이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에 유인석은 서북지방, 곧 평안도 일대로 이동하면서 병력을 회복하고 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유인석은 장기렴의 추격을 받으면서 서북을 향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강원도 정선에 이르러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 해산이 불가함을 아뢰었다. 8월에 마침내 평안도 땅에 들어섰으나, 이미 민심이 떠나 지원을 얻기 어려운 데다 각 고을의 수령들도 의병을 막아서는 형편이었다. 이에 유인석은 청나라의 지원을 호소할 요량으로 압록강변 초산(楚山)으로 이동하여 다시 한 번 격문을 남긴 후 국경을 넘었다.

4 국내외 의병활동을 지도하다

유인석은 청나라의 지원을 얻어 다시 국내로 돌아와 의병항쟁을 계속하려 했다. 1896년 8월 28일 240명의 의병과 유생을 이끌고 만주에 진입한 유인석은 다음날 회인현(懷仁縣)에 진입하였는데, 이곳 지방관 서본우(徐本愚)는 무장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 땅에 들어오는 것은 국제법 위반임을 들어 무장을 해제시켜, 결국 호좌창의진은 해산하게 되었다.

유인석은 의병 중 21명만을 데리고 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심양(瀋陽)으로 이동하였다. 유인석과 동행한 21명은 원용정(元容正), 유홍석(柳弘錫), 윤정섭(尹鼎燮), 윤양섭(尹陽燮) 등으로 유인석의 일가친척과 화서학파 동문, 그리고 유인석의 제자들로 구성되었다. 심양에 도착한 유인석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들어 군사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약간의 자금을 지원하는 데 그쳤다.

이에 유인석은 향후 의병활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있는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들어갔다. 유인석은 이곳에 망국단(望國壇)과 망조단(望廟壇)을 쌓고 참배하면서 치욕을 씻고 소중화를 회복할 것을 다짐하였고, 향후 의병활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황무지 개간에도 힘썼다. 또한 주민들을 상대로 강학을 펼쳐 애국의식을 고취시켰고, 국내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글을 써서 보내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은 유인석에게 사자를 보내어 죄를 용서하니 속히 귀국하라고 명하였다. 유인석은 귀국길에 올라 초산에서 상소문을 올리고 대죄하였는데, 고종은 이에 대해 “네가 능히 뉘우치고 자수한 것은 가상히 여길만한 일이다. 너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개척하라.”고 답하였다.

몇 달 동안 국내에서 체류하면서 향후의 방책을 강구하던 유인석은 이듬해 2월 문하의 문인과 가솔들을 이끌고 다시 만주를 향해 출발하였고, 6월에 도착하여 중화의 제도와 조선의 문물을 지키는 일인 거지수의(去之守義)에 전력하였다. 유인석은 만주 일대에 의병거점을 마련하는 일에 힘쓰면서, 향약을 실시하여 조선 이주민들에게 충효사상을 심어주고 젊은이를 상대로는 강학을 펼쳤다. 또한 유인석은 저술활동에도 매진하여 고조선 시대부터의 역사적 사실을 모은 『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과 자신의 의병활동을 설명한 「출처설(出處設)」, 당대 시국의 여러 문제점을 논한 「국병설(國病設)」 등을 썼다.

1900년(고종 37)에 중국에서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나고 시국이 극히 혼란해지자 유인석은 다시 귀국하여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향음례와 강습례 등 강학을 베풀면서 유림을 결집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향촌사회의 결속을 강화하고 충효애국정신을 심기 위하여 전국에 통일적인 향약을 실시할 것을 도모하였으며, 계(契)를 조직하여 유생 외에 하급 관리며 일반 백성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국권회복운동의 인적 기반을 마련할 것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04년(고종 41) 2월 일본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을 강요하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국권 침탈 시도를 본격화하자, 유인석은 「칠실분담(漆室憤談)」을 지어 의병 궐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유인석은 제자들의 의병활동을 지지하였고, 자신은 팔도 곳곳을 누비며 중화문화 보존운동을 펼쳤다. 1905년(고종 42) 11월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유인석은 다시 만주로 건너가 뜻을 지키려 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내에서 요양하였다. 1906년(고종 43) 4월에는 「서악문답(西嶽問答)」을 지어 궐기하여 대의를 지킬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듬해 고종이 폐위당하고 정미조약(丁未條約)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침탈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유인석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의병을 모으고 항일투쟁을 벌일 요량으로 원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중풍이 발병하여 계획을 취소하였다. 와병 중에도 유인석은 여러 의병들을 격려하고 작전을 지시하였는데, 특히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서울진공작전이 무모함을 지적하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13도창의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다 대패하였고, 국내 항일의병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말았다. 이에 유인석은 러시아로 건너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두만강 연안 연추(蓮秋, 오늘날의 연해주 하산스키군 크라스키노)의 한인촌으로 이주한 유인석은 「의병규칙(義兵規則)」을 제정하였으며, 「관일약(貫一約) 」을 제시하여 항일투쟁의 정신적 기초를 튼튼히 하려 하였다. 유인석은 또한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집결하고 조직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령에다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직접 군사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고 배후에서 의병활동을 지도하는 역할만을 맡았다.

1910년 7월 연해주 일대의 의병과 함경도에서 북상한 의병조직을 통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창설되고 유인석은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유인석은 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이상설(李相卨)과 연명(連名)으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영사관으로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수포로 돌아가고 8월 22일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고 말았다. 이에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유인석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외교방략을 통하여 광복을 성취할 것을 선언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반일운동에 대해 러시아정부에 항의하고 독립지사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9월 11일 성명회 및 13도의군 간부를 대거 체포하고 한인들의 반일활동을 금지하여, 두 단체 모두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러시아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지사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자 유인석은 다시금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목화촌(木花村)으로 이주한 유인석은 망명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집약하여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동양평화론을 주장하는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914년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망명길에 오른 유인석은 서간도의 봉천성(奉天省) 서풍현(西豐縣)에 도착하였고, 다시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로 떠났다. 날로 건강이 악화하는 중에도 유인석은 『도모편(道冒編)』을 저술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유인석은 이듬해인 1915년 초봄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유인석의 유해는 만주 땅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935년 3월 고향인 춘천 가정리로 이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5 후대에 미친 영향

유인석은 화서학파의 학통을 이은 유학자로서, 자신의 학문 활동에서 보여준 위정척사, 존화양이의 사상을 의병활동을 통해 몸소 실천하였다.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시기에 국권 회복을 외치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일깨운 유인석의 사상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보여준 그의 생애는, 그 자체가 이후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의병항쟁에 관하여 장기적 전략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거점의 확보와 주민과의 협력을 강조한 유인석의 가르침은 명분론(名分論: 일을 꾀하는 데에 있어 명분을 앞세우는 입장이나 주장)과 주전론(主戰論: 전쟁하기를 주장하는 의견이나 태도)에 쉽게 휩쓸렸던 의병활동의 대전략을 바꾸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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