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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禹儀]

암흑 속에서 항일투쟁의 불씨를 되살리다

1908년(순종 2) ~ 1932년

윤봉길 대표 이미지

상하이 홍커우 의거 직전 촬영한 윤봉길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독립기념관

1 머리말

윤봉길(尹奉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부대 한인애국단의 단원으로서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재 루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군의 상하이사변 전승기념행사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총사령관을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폭살시키는 의거를 단행함으로써 일제의 대륙침략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세계 만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인들의 반제투쟁의지를 보여주었으며, 향후 임시정부가 중국과 연대하여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2 윤봉길의 유년시절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粱里)의 도중도(島中島)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윤황(尹堭)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의 큰아들로 1908년 5월 19일 태어났다. 봉길(奉吉)은 중국망명길을 떠난 후 스스로 붙인 이름으로,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자는 용기(鏞起)이다. 윤봉길의 집안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 판도공파(版圖公派)로서 증조부 윤재(尹梓) 때부터 시량리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할아버지 윤진영(尹振榮)이 토지의 개간과 치수, 농사일에 크게 힘써 경제적으로 윤택해질 수 있었다. 윤봉길은 동학에 몸담았던 배성선의 딸인 배용순(裵用順)과 1922년 3월 22일 혼인하였다.

윤봉길은 6세에 큰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1살 되던 1918년 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그 여파가 이곳에도 미치게 되어, 3월 3일에 예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 3일 경에는 덕산과 그 인근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덕산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3·1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탄압 현장을 지켜본 윤봉길은 일본인이 되라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보통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인근에 있는 최은구가 설립한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다. 14세 때인 1921년부터 1925년까지는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설립한 오치서숙(烏峙書塾)이라는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매헌이라는 호는 윤봉길이 오치서숙에서 떠날 때 성주록이 자신의 호인 매곡(梅谷)의 매자와, 조선 세조(世祖)를 몰아내고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 했던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의 호, 매죽헌(梅竹軒)의 헌자를 따서 지어주었다고 한다.

윤봉길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도 신학문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아서 돈이 생길 때마다 예산으로 나가 신문물에 관한 책을 사다 보았다. 『동아일보』를 구독하였고, 특히 1920년대 초중반 식민지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계몽잡지인 『개벽』은 한 호도 빠지지 않고 구해 보면서 민족문제와 농촌문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고민하였다.

3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길

윤봉길은 1926년부터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는 한 청년이 인근 공동묘지의 묘표를 모조리 뽑아 와서 자신의 아버지 묘표를 찾아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은 어렵지 않게 묘표를 찾아주었지만, 이 청년은 정작 묘표를 뽑은 자리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아 자신의 아버지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덤 위치까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윤봉길은 이 사건을 겪고 큰 충격을 받고서 무지가 식민지배를 벗어나는 데 가장 큰 공적(公敵)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우선 그는 1926년 동료들과 함께 야학당을 개설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글과 역사, 지리, 산술, 과학, 일어,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다. 1927년에는 야학의 교재로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의 1권은 『조선글편』으로 한글 강의 교재용으로 저술되었고, 제2권은 『계몽편』으로서 조선청년이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제3권은 『농민의 앞길편』으로서 농민이 가져야 할 공동정신과 노동의 의미, 자주, 자유, 평등 사상을 강조하였다. 3권 중 제2권 『계몽편』과 제3권 『농민의 앞길편』은 현재 남아있고, 제1권 『조선글편』은 한국전쟁 시기에 유실되었다가 2011년 4월에 그 중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 책은 윤봉길의 유품과 함께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다.

윤봉길은 야학뿐만 아니라 농민경제의 자립을 위한 농민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부흥운동을 펼쳤다. 우선 1927년 3월 동료들과 함께 두레정신을 바탕으로 한 공생공동체의 건설을 목표로 목계농민회(沐溪農民會)를 설립하여, 농산물의 증산운동, 공동구매조합 운동, 토산품애용 운동, 부업 장려 등을 펼쳤다. 1929년 2월에는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하였는데, 상부상조를 통한 미풍양속의 권장이 설립취지였지만 단순한 친목도모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을 진전시킬 세력기반을 확보하려는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1929년 4월 23일에는 월진회(月進會)가 설립되고 윤봉길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월진회 역시 ‘상애상조(相愛相助)’, ‘근검절약’, ‘양풍미속 함양’ 등을 목적으로 내세웠고, 활동내용에 있어서도 야학교 및 농민강습소의 운영, 강연회를 통한 국내외 정세 및 지식 보급, 공동판매 및 저축증대 사업 등이었다. 월진회는 창립 취지나 활동내용을 보면 단순한 계몽운동단체에 가깝지만, 여기에 참여하였던 정종갑, 정종호, 윤창의 등은 이후에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월진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는 길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와중인 1929년 3월 농민운동의 본부인 부흥원 건물이 완공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28일에 학예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윤봉길이 이솝우화를 각색하여 「토끼와 여우」라는 연극을 상연하였는데,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그가 덕산주재소로 불려가게 되었다. 이 연극은 토끼와 거북이가 빵 조각을 나눠먹으려 하자 여우가 나타나 똑같이 반씩 나눠준다는 핑계로 빵을 다 먹어버린다는 내용이었는데, 일경은 여우를 일제에 비유했다는 구실을 대었다. 윤봉길은 단순한 아이들의 촌극이었다고 변명하여 경고와 훈계만 받고 풀려났지만, 이후 농촌계몽운동이 성공하려면 우선 민족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의 한계에 번민하던 즈음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 12월에 서울과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또 1929년 11월에는 함흥에서 수리조합반대운동(水利組合反對運動)이 일어나, 조합 측의 일본인들이 한국농민 3명을 타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목도하면서 그는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다. 우선 그는 야학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정신과 투쟁에 나설 것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가, 야학은 경찰에 의해 강제 폐쇄당하고 자신은 구속되어 3주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3월 6일에는 오랜 번민 끝에 결국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겨놓고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망명길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3월 8일 평안북도 선천에 다다랐을 즈음 기차 안에서 사복경찰의 검문에 걸려 선천경찰서로 끌려가 열흘 남짓 고초를 겪었다. 3월말 압록강을 넘어 단둥(丹東)을 지나, 4월초에 칭다오(靑島)에 도착했다. 하지만 집을 나왔을 때 월진회의 공금 60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비도 곧 바닥이 났다. 그래서 칭다오에서 한동안 길거리 유랑생활을 하다가 어느 한국인의 소개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의 점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1년여 간 상해로 갈 여비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 5월 3일에야 다시 상해로 출발하게 되었고 5월 8일 도착했다. 5월 중순에 한국교민단 사무소에서 신고 수속을 하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김구(金九)와 이유필(李裕弼) 등을 만났다. 하지만 우선 생계 해결을 위하여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처음에는 인삼 장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중국어도 서툴고 수완이 부족했기에 곧 포기하고, 한국인 박진(朴震)과 중국인이 공동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등을 만드는 종품(騣品) 공장에 취직하였다. 이곳은 한국인 노동자 17명이 근무하던 곳이었는데, 윤봉길은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하고 노동자들끼리 상부상조와 신문 구독 활동을 벌이고 공장주 측에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하지만 1932년 들어 임금문제로 다툼이 생겨 윤봉길은 해고당하였고, 복직투쟁이 일어났지만 안창호와 이유필의 주선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공장주의 반대로 끝내 복직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에서 만보산(萬宝山)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로를 둘러싸고 충돌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때의 충돌은 조선인, 중국인 양측 모두 경미한 부상자가 나오는 데 그쳤는데, 일본 관동군이 국내 신문에 과장·왜곡 보도하도록 조작하여 문제가 확대되었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상황이 위급하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자 조선 내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일제 측의 선동과 은밀한 공작에 의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중국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 관내 지역에서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원 내지 협조가 끊어졌고, 심지어 한국인을 일본의 스파이로 보는 시선까지 생겨났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에서는 특무기관로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김구를 단장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준비하였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단원인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시작으로 의열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윤봉길은 종품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매주 1회씩 김구가 공장을 찾아올 때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시국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김구가 공장을 방문하지 않을 때에는 별도로 밖에서 만나 그와 면담하고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수차례의 만남 속에서 윤봉길과 김구는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윤봉길은 자신도 ‘동경사건’과 같은 일이 있으면 이를 담당할 것이니 자신을 지도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만주국 건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돌리기 위하여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침공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군은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3월 1일 상하이는 결국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상하이사변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한인애국단에서도 일본군에 타격을 입힐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1차로 일본군사령부가 황포강의 훙커우(虹口) 부둣가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이즈모호(出雲號)에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잠수부의 미숙으로 실패하였다. 이어서 훙커우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과 부두의 무기창고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윤봉길은 일본유학생 몇 명과 미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탄약창고의 일자리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중국 국민군 소속이자 상해병공창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폭탄 제조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김홍일(金弘壹)이 숨길 수 있는 도시락과 물병에 넣을 폭탄을 고안하던 중 3월 초에 이르러 중국군과 일본군이 임시휴전을 하여 폭파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김구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기념행사를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식과 더불어 거행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하여 확인하고 이봉창의 의거와 같은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날의 행사는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막대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윤봉길은 이 작전에 자원하였다. 김구는 4월 2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에서 있을 천장절 기념행사의 거사계획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날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혈서로 입단 선서문을 썼다. 다음날인 4월 27일에 양복을 입고 상반신을 찍은 개인사진과 태극기를 배경으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든 사진,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까지 총 3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폭탄 제조는 역시 김홍일이 맡았는데, 이봉창의 도쿄 의거 때에 불발로 인하여 타격을 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작에 신중을 기하였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로부터 도시락폭탄과 물통 형 폭탄을 받아 들고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였다. 이날의 행사는 상하이 거주 일본인 10,000여 명이 동원되었고 일본군인과 각국 외교관, 무관 등이 초청되어 총 20,000여 명이 참관하였다. 행사는 2부로 나누었는데, 1부는 일본군의 관병식 행사로 9시 30분경부터 시작되어 11시 30분경 종료되었다. 2부 행사는 관민합동의 축하식이었다. 개회사와 축사가 진행된 후 일본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가 제창되었는데 모든 참석자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주변 경계가 흐트러지자 윤봉길은 이때가 최적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기미가요 제창이 끝나갈 무렵인 11시 50분경 물통 형 폭탄을 단상 중앙을 향해 던졌고, 정확히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대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이 서 있는 단상 중간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이 때문에 시라카와 대장은 중상을 입었다가 한 달 뒤인 5월 26일 사망하였고 우에다 중장은 오른발 일부를 절단해야 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해군 제3함대 사령관은 실명,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오른쪽 다리 절단의 중상을 입었고,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河端貞次)는 중상을 입었다가 다음날 사망하였다.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와 토모노 모리(友野盛) 상하이 일본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일본군 헌병대에 곧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군경은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상하이 한인 교민들을 무작위로 체포하였고, 안창호, 이유필 등도 검거하였다. 김구는 잠시 피신했다가 상하이로 돌아와 ‘훙커우공원 폭탄안의 진상’을 발표하였지만, 결국 그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윤봉길의 의거로 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후에 중국 국민당정권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윤봉길은 5월 4일부터 일본군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예심 조사를 받기 시작하여, 5월 25일자로 ‘살인 및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해 11월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이 철병함에 따라 윤봉길도 함께 일본으로 압송되어 오사카(大阪) 위수구금소(衛戍拘禁所)에서 구금되었다. 1개월 지나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위수구금소로 압송되고 그 이튿날인 12월 19일 7시 40분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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