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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李奉昌]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청년, 일본 정계를 뒤흔들어 놓다

1901년(고종 38) ~ 1932년

이봉창 대표 이미지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들고 서 있는 이봉창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이봉창(李奉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부대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첫 번째 단원으로서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고, 비록 실패했으나 이 거사를 통하여 한국 민중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려 이후 강력한 항일투쟁에의 밑거름이 되었다.

2 충실한 식민지 청년으로 성장하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에서 아버지 이진규(李鎭奎)와 어머니 밀양 손씨(密陽 孫氏)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이봉창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있다. 백범 김구(金九)가 도쿄 의거의 전말을 밝힌 선언서 「동경작안(東京炸案)의 진상」에서는 그의 집안이 원래 수원에 선조로부터 많은 땅을 물려받았는데, 철도부속지로 편입되어 일제에 의해 강탈되어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서울 용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봉창이 도쿄 의거 후 체포되어 일본경찰에게 진술한 「신문조서」에서는, 원래 그의 아버지가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경영하면서 조선왕실의 건축을 청부받을 정도로 상당한 자산가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투병과 홍수로 인한 손실, 사기 피해 등이 겹치면서 점차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봉창은 8세부터 서당을 다니다가, 11세 때인 1911년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文昌)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하였다. 이때는 이미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지게 되어, 아버지는 소실과 함께 집을 마련하여 따로 살게 되었고, 이봉창은 할머니와 어머니, 형의 부부 등과 함께 살게 되었다. 생활비는 형 범태(範泰)가 겨우 마련하여 살아가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봉창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곧 일자리를 찾았다.

처음에는 용산구 원정(元町, 현재 원효로)에 있는 일본인 과자점(菓子店)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17세 무렵 한강통(漢江通, 현재 한강로)에 있는 약국 점원으로, 다시 19세에는 용산역의 말단 임시직인 시용부(試用夫)로 일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은 그가 약국 점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3·1운동에 대해서 그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이봉창은 반일의식이나 특별한 민족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그냥 평범한 식민지 청년이었다. 이봉창은 용산역에 들어간 후 빠르게 승진하여, 1920년 1월 정식 역부(驛夫)가 되었고 2월 전철수(轉轍手)를 거쳐 10월부터 연결수(連結手)로 근무하게 되었다. 승진에 따라 월급도 크게 올라 경제적으로 조금씩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봉창은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무리 일을 잘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과 봉급, 상여금 등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는 상황에 크게 불만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체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주색(酒色)과 도박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조선인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과 또 거액이 되어버린 유흥 빚을 퇴직금으로 탕감하려는 목적에서 1924년 4월 사직하고 말았다.

당시는 실업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곧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이후로 거의 1년 반의 기간 동안 직업 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그동안 금정(錦町, 현재 용산구 효창동)의 관왕묘(關王廟) 보존을 위해 봉사를 하거나 금정청년회 활동 등을 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각지에서 청년회가 많이 조직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항일운동단체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금정청년회는 단지 지덕체(智德體) 삼육(三育)의 장려와 상호부조와 야경, 위생을 목적으로 창립되었으며, 일본인 소유의 가옥을 임차하여 사무소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온건한 청년단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봉창은 일제 최초의 근대적 인구센서스라고 할 수 있는 1925년의 간이국세조사에서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국세조사위원의 선발자격은 엄격했는데, 조사위원은 도지사의 추천에 의하여 조선총독이 임명하도록 규정했다. 아마도 이봉창은 금정청년회를 후원하는 용산 지역의 유지들이나, 용산역에 근무하던 시절 일본인 동료들로부터 인정받아서 조사위원으로 추천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가 종료된 이후에는 조사를 잘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성부청(京城府廳)으로부터 상금 10원과 나무잔을 선물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봉창은 조선인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용산역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식민지인으로서 일제 정책에 협조적이었다.

3 민족차별을 절감한 일본 생활

이봉창은 용산역에서 나온 이후 일본행을 생각하였다. 이는 누군가로부터 조선에서는 차별대우를 받지만 일본 내지(內地)에서는 오히려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가족, 특히 어머니를 두고 떠나올 수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용산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후지하타(藤旗)라는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국인 식모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자, 조카딸인 은임(銀任)을 소개시켜주면서 함께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1925년 11월 그는 조선을 떠나 오사카(大阪)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일본에 오면 곧 좋은 일자리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대부분 거절당했다. 1926년 2월에 어느 가스회사에 취직되었는데,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들이 편의상 일본식 이름을 쓰는 관행에 따라 이때부터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스회사에 취직한지 7개월 만에 각기병에 걸려 쉬다가, 이듬해 4월에야 건강을 회복하였다. 잠시 효고현(兵庫県)에서 간장가게에 취직했다가 다시 1개월 만인 5월 초에 오사카(大阪)로 돌아와 가스회사에 복직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3~4일 결근했다는 이유로 2~3일에 한 번씩 강제로 쉬게 하자, 부당한 취급에 화가 난 이봉창은 다시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이봉창은 부두노동자나, 석탄 짐꾼, 공장 잡역 등을 전전하였다. 이와 같은 생활 속에서 이봉창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절실하게 체감하면서도, 현실을 체념하며 스스로를 일본인과 똑같은 일왕의 백성이며 조선인이지만 더욱 일본인다운 ‘신(新)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봉창은 더욱 괴리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28년 11월 교토(京都)에서 거행되었던 히로히토(裕人)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유치장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에 즉위식을 보러 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검문했는데, 이때 이봉창은 단지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와 함께 감금된 일본인들은 대부분 다음날 풀려났지만 경찰들은 편지 내용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열흘이나 그를 감금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봉창은 ‘신일본인’이 되려고 하였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자신을 식민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하였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나 연줄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게다가 차별로 인한 울분과 진짜 일본인이 되고픈 욕망이 뒤섞이며 괴로워했다. 번민 속에서 생활에도 자제력을 잃어 오랫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일본인 행세를 하며 도쿄(東京)에도 갔지만,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사카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30년 11월 어느 날 그는 누군가로부터 상하이(上海)에 가면 프랑스 조계(租界: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어서 조선인들을 돌봐주고, 영국 전차회사에서 조선인들을 우대해서 써준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에 지쳐있던 이봉창은 좋은 일자리와 차별 없이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1930년 12월 6일 일본에서 출발하였고, 나흘 만인 10일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4 김구와의 만남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조직

상하이에 도착한 후 그는 우선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국말을 할 줄 모르고 상하이에서 지인도 없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전차회사 취직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려는 목적에서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임시정부의 소재지도 몰라서 찾지 못하다가 겨우 어떤 한국인 덕분으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931년 1월 초순의 어느 날 저녁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처음 이봉창을 보고 일본말을 섞어서 대화하며 행색도 일본인에 가까운 차림이라 경계하다가 결국 일본의 밀정(密偵)이라고 생각하고 내쫓았다.

당시 임시정부 건물의 2층에 있던 김구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내려왔는데, 이봉창의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를 임시정부 청사 주변의 여관에 묵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수차례 이봉창을 만나 그에 대해서 탐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구는 이봉창이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에 오랫동안 살아서 도쿄의 지리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세 번째 만남에서는 이봉창이 일왕 즉위식에 간 적이 있으며 무기가 있었으면 처단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가 일왕 처단 의거의 적임자로 판단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처음에는 단지 일본인들의 조선인 차별에 대해 울분을 느끼는 정도였고 상하이에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지만, 김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다져갔다.

이후 1년여 간 준비에 들어갔는데, 이봉창은 완벽하게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임시정부나 상하이 한인교민단과는 멀리하였으며 3~4개월에 한 번씩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김구에게 형편을 보고하거나 일왕 처단 준비 상황 등을 논의하였다. 김구는 우선 장래의 거사를 위해서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이봉창에게 임시정부나 교민단 출입을 가급적 삼가고, 또한 일본인 거주지역에서 살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봉창은 일본에서 사용하였던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취직도 하여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하여 생활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국내외 독립지사들이 힘을 합쳐 건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서양 열강들의 무관심,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등으로 인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크게 침체되었다. 게다가 1930년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임시정부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1931년 7월 2일에는 일제 측의 계략에 의하여 중국 길림성(吉林省) 만보산(萬寶山)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들 간에 수로를 둘러싸고 충돌한 사건(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는 사실상 가벼운 충돌에 불과했는데, 일본 관동군(關東軍)과 재만주(在滿洲) 일본영사관에서 조선의 언론에 조선인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처럼 알렸고, 이러한 보도를 접한 조선에서는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불신감이 팽배하였다.

이어서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킴에 따라 조선인들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첨병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중국인들의 관심과 지원이 끊어지게 되면서 고립된 처지에 빠졌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한인들이 일제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에서는 산하에 비밀 특무대인 ‘한인애국단’을 설치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김구가 이봉창의 도쿄 의거 직후에 쓴 「동경작안(東京炸案)의 진상」이라는 글에서는 이봉창이 한인애국단에 첫 번째로 가입한 단원이라고 밝혔는데, 아마도 김구가 이봉창을 만나면서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 의거

이봉창의 거사는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폭탄 준비는 중국군으로 복무하며 상하이병공창(上海兵工廠) 병기주임을 맡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이 담당하였다. 거사를 위한 자금은 김구가 재미 한인교포들과 독립운동단체에 편지를 발송하여 마련할 수 있었다. 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이봉창을 만나 거사 준비가 다 마쳤음을 알렸다. 그리고 중국 지폐로 300불을 주며 일본에 갈 여비와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이었던 사진관에 이봉창을 데려 가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거사에 사용할 폭탄을 들고 사진을 촬영하였다. 다음날부터 이봉창은 상하이 생활을 정리하는 한편 김구와 세밀한 거사 계획을 논의하고 폭탄 사용법 및 휴대방법,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의 대응법 등에 대해서 숙지하였다.

12월 17일 이봉창은 몸에 폭탄을 숨기고 배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19일 고베를 거쳐 22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12월 28일 그는 신문에서 이듬해 1월 8일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있을 육군 관병식(觀兵式) 행사에 일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와 함께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1월 8일에 꼭 상품이 팔릴 것’이라는 전보를 작성하여 김구에게 발송하였다. 거사 결행 일을 알리는 전보였다.

1월 8일 이봉창은 일왕이 하라주쿠(原宿)를 지나 요요기 연병장으로 지나갈 때 거사를 결행하려고 했으나, 연병장 주변 경계가 너무 심하여 욘타니미츠케(四谷見附)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신문팔이 소년에게서 일왕이 사카타니미츠케(赤坂見附)를 통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갔지만, 일왕 행렬은 이미 지나간 후였다. 그래서 일왕이 환궁할 때를 기다렸지만, 이마저도 놓치고 거사의 실패를 낙담하였는데 뜻밖에도 일왕의 환궁행렬이 우회하기 때문에 지름길로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주변 사람의 말에 따라 급히 사쿠라다문(櫻田門) 앞 경시청(警視廳)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일왕 행렬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에 섞여서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44분 일왕이 탔을 것이라고 생각한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두 번째 마차는 일왕이 아니라 궁내대신(宮內大臣)이었던 이치키 기도쿠로(一木喜德郞)가 타고 있었고, 그나마 수류탄도 예상보다 화력이 약해서 두 번째 마차의 밑바닥과 바퀴에 약간의 손상과 바로 뒤를 따르던 말에 약간의 출혈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자진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이봉창은 1932년 6월 27일까지 총 9차례의 예심신문(豫審訊問)을 받았다. 공판은 9월 16일부터 9월 30일까지 진행되어 ‘대역죄’의 명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아 10월 10일 이치타니(市谷) 형무소에서 오전 9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봉창의 의거 이후 일제는 이봉창 의거의 배후에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재한 프랑스조계지(租界地)의 프랑스공무국(公務局)에 김구 체포에 협력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김구는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피해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서 이봉창의 동경의거(東京義擧)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어서 한국독립당에서도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국독립당 선언은 중국의 신문에 게재되고 여타 한인독립운동단체에 의해서 중국 관내 각 지역에도 우송되었다. 이 선언서에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포악성과 이봉창 의거의 정당성을 밝히고 앞으로도 독립운동이 계속될 것을 천명하였다. 중국 언론들은 즉각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전하면서 그를 ‘의사(義士)’, ‘지사(志士)’로 표현하며 그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사형공판 이틀 전인 9월 28일에 「동경작안의 진상」을 작성하여 중국의 통신사에 배포하였다. 결국 이 내용은 10월 15일 상하이의 『신강일보(申江日報)』와 남경의 『중앙일보(中央日報)』에 보도되었다. 이 글은 이미 1932년 4월 29일에 있었던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의거와 함께 중국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만보산사건 이후 악화되어 있던 한중 간의 관계가 이봉창의 의거로 인하여 크게 전환될 수 있었다. 비록 임시정부는 일제의 거센 탄압을 피하여 오랫동안 근거지를 옮기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지만,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서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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