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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李相龍]

서간도 독립군 운동을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1858년(철종 9) ~ 1932년

이상룡 대표 이미지

이상룡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이상룡(李相龍)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한일병합 이후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와 독립군기지 건설과 독립전쟁 준비에 노력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2 이상룡의 출생과 성장

이상룡은 1858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아버지 이승목(李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이다. 본명은 원래 상희(象羲)였으나, 1911년 서간도에 망명한 뒤 계원(啓元)으로 그리고 다시 상룡(相龍)으로 개명했다.

그의 집안은 고성(固城) 이씨로서, 조선 개국공신이자 세종대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여섯 번째 아들인 이증(李增)이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들어온 이후 이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상룡이 태어난 임청각은 그의 18대 조상인 이명(李洺)이 의흥 현감을 사직하고 안동으로 들어와 지은 집으로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중앙선 철도부설 때 일부가 철거되어 현재는 50여 칸만 남아있지만 여전히 한국 전통 가옥의 명성을 잇고 있다. 현재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상룡은 18세가 되던 1876년부터 영남 유학의 거두 김흥락(金興洛)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김흥락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직계 종손이자 퇴계 이황(李滉)의 학통을 정통으로 계승한 유학자로서 그의 문인들 중에서 많은 학자, 의병, 독립운동가가 탄생하였다. 이상룡은 28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온갖 부정이 이루어지던 상황 속에서 낙방하고, 이후에는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3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을미사변) 이어서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반포되자 각지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안동에서도 이상룡의 외삼촌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한 안동의진(安東義陣)이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병법과 무기에 관하여 여러 방책을 제시하였다. 권세연에 이어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이 된 후 경북 7개 읍의 의진이 연합하여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는 태봉을 공격하였는데, 일본군보다 열세한 전투장비와 병술로 인하여 크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즈음 정부에서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렸고, 선유사(宣諭使)가 임금의 뜻을 알리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다른 의병부대는 자진해산하기도 하였으나 안동의진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이상룡은 김도화에게 더 많은 희생은 훗날 큰일이 닥쳤을 때 인재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설득하여 결국 의진은 해산하였다. 이후 이상룡은 안동에서 향약을 실시하여 의병활동과 관군의 진압 등으로 인하여 불안해진 이 지역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자마자 곧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정부를 압박해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상룡은 충의사(忠義社)라는 의병조직에 가입하였고, 1905년 음력 2월부터는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구축하면서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를 규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자 이상룡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다가 가야산의 의병진지 구축작업과 군사훈련에 매진하였다. 가야산 진지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1908년 초 이상룡은 거창군의 일본군 진지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오히려 일제에 매수된 첩자의 밀고로 인하여 가야산 진지가 일본군의 습격을 당하였다. 1908년에 이르러서는 이상룡뿐만이 아니라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군사를 일으켰던 을사의병들과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등 각지의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심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룡은 의병활동으로 국권을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즉 이미 국력이 약하여 타국의 군대가 나라안을 유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무력을 키워서 그들을 물리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룡은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고, 애국계몽운동에서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상룡은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시절부터 서양 서적이나 잡지, 신문을 열심히 탐독하면서 서양 근대사상이나 문물, 세계정세 등에 대해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나아가 유인식(柳寅植) 등이 중심이 되어 1907년에 안동에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08년 말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 교육 보급, 산업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폐습의 교정 등을 목적으로 한 범국민적인 계몽운동단체였다. 대한협회는 1908년 11월 각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지들을 대상으로 지회설치를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는데, 안동에서는 이상룡이 화답하여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1909년 봄 가야산의 의병진지와 관련하여 이상룡이 안동경찰서에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지만 안동사람들이 강하게 항의시위를 하여 한달 만에 풀려나고 1909년 3월 안동지회를 결성, 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신분‧지위‧연령 등에 관계없이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교육과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하지만 점차 친일화된 대한협회 본회가 각 지방 지회의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리고고 또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연합하려고 하자, 이에 이상룡은 크게 반발하며 안동지회를 독자적으로 운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국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면서 일제가 일체의 정당 및 단체를 해산하면서 대한협회 안동지회 역시 해산되었다.

4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국권을 빼앗기자 이상룡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장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에 고심하였다. 그런데 1910년 11월 신민회(新民會)의 간부인 주진수(朱鎭洙)와 황만영(黃萬英)이 그를 찾아와 신민회에서 만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전해주었다. 이 소식을 듣자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가산을 처분하고 거느리던 노비를 모두 풀어준 후, 1911년 1월 우선 서울로 가서 서간도 지역 독립군기지 개척을 총괄해온 양기탁(梁起鐸)을 만나 망명과 서간도에서의 활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신의주에서 가족들과 결합하여 1월 27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안동현(현재의 단둥시)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단 서간도 회인현(懷仁縣) 항도천(恒道川)에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에 관한 『한만관계사(韓滿關係史)』를 저술하였고, 가족들이 다 모인 1911년 4월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英), 이시영(李始榮) 등이 자리잡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한인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기지를 경영할 단체로서 경학사(耕學社)가 조직되었는데, 이상룡이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경학사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채택하여 척박한 만주지역에서 한인들의 생계 방도를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고, 군사훈련을 통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11년 5월에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912년 서간도 지역에 뜻하지 않게 대흉년이 들었고 풍토병으로 고통받는 한인들이 속출하게 되자 경학사 역시 운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망명지사들은 유하현 삼원보에서 약 90리 떨어진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옮겨 황무지를 개척하고 1913년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다. 부민단의 최초 단장은 허혁(許赫)이었으나, 곧 조직을 정부조직의 기능을 띠도록 재정비하고 만주 인근 한인 거주 지역을 총괄할 수 있도록 지방조직을 새로 정하였다. 명칭도 부민회(扶民會)로 고치고 이상룡을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그는 중국 당국에 중국 거주 한인들의 정치·경제·법률적 권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 가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돈으로 중국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한인들이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고, 춥고 척박한 만주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볍씨를 구하여 보급하는 등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일에도 힘썼다. 또한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각지에 여러 한인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다.

5 서간도 독립군을 이끌며

세계 1차대전 이후인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우며 식민지국가의 해방을 논의하였으며,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자·농민의 국가가 들어섰고 다른 약소민족(弱小民族)의 자결권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 질서 재편의 움직임 속에서 국외 한인들도 독립운동 준비단계에서 실천단계로 전환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는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한 것으로서 북간도, 서간도, 미주(美洲), 노령(露領), 베이징 등지의 유력 무장독립운동가와 명망가 39명이 서명하였다. 3·1 만세운동을 전후하여 발표된 많은 독립선언서와 달리 이 선언서는 무장투쟁을 한국의 독립운동방략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이 선언서의 서명에 참가한 이상룡은 이제 선언서의 글귀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상룡은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할 필요성도 있고, 3·1운동으로 조국 해방에 대한 열기가 고조된 만큼 본격적인 독립군단을 조직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서간도의 각 지역 한인사회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단체 대표를 불러 모아 협의하여 각 단체를 해체하고 하나의 단체로서 한족회(韓族會)를 설립하였다. 또 한족회는 산하에 군정부(軍政府)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을 지휘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해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이상룡은 서간도의 대표 한 사람을 파견하여 장래 계획에 대해서 논의하도록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을 통제‧지도하는 최고기관으로 자임하고, 만주에서는 독립군을 지휘할 군정부를 설립하도록 한다는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정부 수립을 상하이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군정서로 고치기로 하고 한족회 업무도 군정서에서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북간도 지방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함께 서간도 지방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임시정부 산하 군사기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총책임자인 독판(督辦)에 이상룡이 추대되었고,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沰),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등이 발탁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우선 1919년 5월 3일 신흥강습소가 발전된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편하여 독립전쟁을 담당할 독립군과 간부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대원들을 파견하여 암시장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전쟁을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서로군정서는 1920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무장활동을 개시하였다. 대원들을 압록강을 넘어 평안북도 강계(江界), 자성(慈城), 벽동(碧潼), 위원(渭原) 등으로 파견하여 일제의 경찰분소와 면사무소 습격, 친일파 처단 등을 벌였다. 당시 서북간도 지역에는 서로군정서뿐만 아니라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나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 등 많은 독립군 단체들이 일제에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일제 측은 중국 군벌을 회유‧압박하여 합동으로 한국 독립군을 색출하는 한편, 1920년 8월에는 ‘간도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을 수립하여 일본군 제19‧20사단 1만 5천여명을 간도로 출병하였다. 이에 독립군 연합부대는 10월부터 봉오동, 청산리 등지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청산리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촌락을 수색하여 한인들을 학살하는 참변을 일으켰다.

이후 서로군정서 총사령관 지청천은 안도현(安圖縣) 밀산(密山)으로 올라가 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는데, 이상룡은 여기에 따라가지 않고 초토화된 한인사회의 복구와 서로군정서의 정비, 서간도 독립군 기지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이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청원한 바 있고 또 대통령 지위를 남용한 사례가 드러나면서 내부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상룡과 서로군정서는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로 가기로 선언하고,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였다.

1922년 초가 되자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때마침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돌아온 양기탁이 독립운동단체의 통일문제를 제기하면서 1922년 2월 대한독립단, 광한단(光韓團), 서로군정서 등이 통합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대한통군부는 독립군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수십만이 넘는 한인들을 보호하고 자치활동도 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대한통군부에 반대하던 세력과 만주 지역의 한인 자치단체들까지 통합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8월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여 남만주 전역을 포괄하는 통일운동단체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왕조를 부활하려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들이 공화주의자들과의 대립으로 이탈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통의부와 대립하게 되자,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 일명 백광운白狂雲)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남만주 통합의 구심으로 삼기로 하고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교섭하였다. 임시정부 측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2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일명 참의부)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이 제안은 남만주 독립운동단체를 통일시키기보다 오히려 통의부를 재차 분열케 하는 결과만 낳았다.

이상룡은 이때 독립군기지 건설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독립운동단체의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하여 각 단체 대표들을 소집하고 각종 회의를 개최하며 운동의 방향을 지도하였다. 참의부가 건설되자 양기탁 등 통의부를 중심으로 1924년 7월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조직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주창하였고, 그해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다.

6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되다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부터 외교노선 중심의 운동방략과 극심한 내부분열로 인하여 서로군정서에서 독자노선을 가겠다고 밝힌 바 있었으나, 참의부가 건설되면서 이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반감은 매우 커졌다. 이에 임시정부 측에서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와의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고 임시정부의 침체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만주 측 인사를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25년 5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유필(李裕弼)과 법무총장 오영선(吳永善)이 파견되어 정의부, 북만주의 신민부와 교섭하였다. 이때 임시정부는 정의부 측에 임시정부 최고 책임자는 정의부 측 추천 인물을 임명하고 각료 반수 이상을 정의부 인사로 임명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을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논의하였는데, 이때 임시정부 최고 책임자로 이상룡을 추천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9월 24일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내각 조직에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상룡은 9명의 국무위원 중 8명을 이탁, 김동삼 등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인사들로 구성하였다. 그런데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임시정부 제안에 대해 논의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주로 옮길 것도 함께 의결하였는데, 이 의결사항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이상룡은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의 말만 듣고 상하이로 출발하였다. 이 때문에 정의부 내에서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또 임시정부가 만주 측 인사와 교섭할 때 참의부와는 접촉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참의부 소속 박희곤이라는 자가 여운형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이상룡은 자신이 국무령에 있는 것이 임시정부 측에나 정의부 측에서나 모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1926년 2월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가버렸다.

만주로 돌아온 그는 체력이 크게 약화되어 거의 외부 출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의 체결로 중·일 공동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있어 이상룡은 빈번히 거주지를 옮겨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에 따라 만주지역 한인 독립운동도 크게 타격을 입게 되었고 여러 운동가들이 일본군경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이상룡의 오랜 동지였던 김동삼도 1931년 10월 체포되었는데, 이상룡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하여 완전히 자리보전하게 되고 이후 병세가 점차 심해져 1932년 5월 12일 이상룡의 나이 만 74세에 길림성 서란현(舒蘭縣) 소과전자(燒鍋甸子)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1990년 11월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1996년 5월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그에게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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