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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李相卨]

헤이그 밀사의 주역, 망명 정부를 꿈꾸다

1870년(고종 7) ~ 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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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1 명문가 집안의 가난한 시골선비의 아들로 태어나다

이상설(李相卨)은 1870년(고종 7) 음력 12월 7일 가난한 시골선비인 아버지 이행우(李行雨)와 어머니 벽진이씨(碧珍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산직마을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시조는 고려 충선왕(忠宣王) 당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으로 그의 23대손이며. 조선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발(李時發)의 11대손, 조선 현종(顯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경휘(李慶徽)의 10대손이다.

7세 때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13세 때인 1882년 4월 양아버지와 친아버지를 여윈 데 이어, 이듬해에는 친어머니마저 잃는 아픔을 겪었다. 3년상을 치르고 16세 때 참판 서공순(徐公淳)의 장녀 달성서씨(達城徐氏)와 결혼하였다. 그후 1887년경 서울 장동(長洞)에서 저동(苧洞: 지금의 명동 성모병원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이웃에 사는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형제와 여준(呂準, 일명 呂祖鉉) 등과 자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는 유학(儒學)은 물론 신학문도 섭렵하였고, 영어와 일본어 등도 익히는 등 25세 전후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조술(祖述: 앞사람이 말한 바를 근본으로 하여 서술하고 밝힘)할 만큼 큰 학자로 칭송되었다. 이러한 그가 관직에 발을 디딘 것은 25세 때인 1894년 과거에 급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가 다시 관직에 나선 것은 35세 때인 1904년부터인 것으로 나타난다.

2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과 을사늑약 파기운동을 전개하다

이상설의 항일투쟁은 1904년 6월 일본이 요구하는 황무지개척권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6월 주한일본공사 하이시 곤스케(林勸助)를 통해 한국정부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을 제시하였다. 이 요구는 한국의 황무지를 사실상 일본이 점유하는 것이 기본 내용이었다. 이에 당시 전직 관리와 유생(儒生), 언론 등에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바로 이때 이상설은 이 반대투쟁에 앞장섰고, 논리 정연한 반대론을 펼쳤다. 그의 상소 이후 반대상소가 줄을 이었고, 보안회(輔安會)가 조직되어 일제침략에 대한 규탄대회를 펼쳤다. 이로 인해 일제는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보안회는 해산당하였다. 대신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고 강력한 항일구국(抗日救國)운동단체로 탈바꿈하였다. 대한협동회가 창립될 때, 이상설은 회장에 추대되었다.

1905년 11월,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기 보름 전이었다. 참찬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가장 먼저 조약체결 저지투쟁에 나섰다. 이를 위해 그는 정부 대신들을 만나 일제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역설하면서 순국(殉國) 반대 결의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폭력적 방법을 쓰면서 조약 체결이 성사되자, 이상설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조약 파기를 위한 최후 시도를 꾀하였다. 당시 이상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자고로 난세(亂世)를 당하여 직신(直臣: 강직한 신하)의 간언(諫言)은 있어 왔지만 막중한 군부(君父)에게 목숨을 끊는 순사직(殉社稷)을 간한 신하는 그에게만 있었던 충언(忠言)”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어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리는 한편, 관직을 사임하고 전현직 관리들과 유생들을 규합하여 조약 파기 연명 상소를 올리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으로 조병세(趙秉世)를 대표로 한 상소와 민영환(閔泳煥)을 대표로 한 상소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조병세가 자결한 데 이어 민영환마저 자결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쳐 자결을 시도하였다. 이 소문에 퍼져나가자, 전국에서 유생들이 줄지어 상소를 올렸고, 시민들은 철시(撤市: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아니함)와 시위를 벌였으며, 의병들이 다시 일어나 반일투쟁을 지속하였다.

3 헤이그 밀사로 구미 각국을 순방 외교하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망국(亡國)으로 들어섰음을 직감한 이상설은 1906년 4월 저동의 집을 팔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해 8월 용정(龍井)에서 그는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여준 등과 함께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학교 책임자로서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7년 4월 그가 헤이그 밀사로 떠나게 되자, 서전서숙은 재정난 등으로 인해 1907년 10월 문을 닫고 말았다. 이에 따라 서전서숙에서 교원 활동을 하던 여준 등은 바로 옆 동네인 명동촌(明洞村)에서 명동서숙(후일 명동학교로 개칭)을 설립하였고, 이동녕은 서간도로 가서 이회영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각기 북간도와 서간도에서 3·1운동 때까지 민족교육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자리잡았다.

1907년 4월 이상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먼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준(李儁)을 만났다. 이들은 6월 중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晉)과 그의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만나 진용을 갖추었다. 이상설 등 3인은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를 만나 한국의 입장을 협의하는 한편,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6월 20일 헤이그에 도착한 3인의 밀사는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일제는 밀사들의 회의 참석을 방해하기 위한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상설 등 밀사들의 당면 과제는 을사늑약(乙巳勒約) 무효 파기와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회의 참석이 최우선 과제였다. 3인의 밀사는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토프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만나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어 밀사들은 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한편, 다시 의장인 넬리토프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대표들에게도 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협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처럼 공식적인 참석이 불가능해지자, 밀사들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담은 글인 공고사(控告詞)을 작성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밀사들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박사와 함께 각국의 언론인과 신문·잡지를 이용하여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활동도 펼쳤다. 이런 노력 끝에 영국언론인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ad)가 편집하는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공고사’ 전문이 실렸고, 이 기사는 다시 『런던타임스(The Times of London)』와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 등 각국 신문에 전재(轉載)되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의 모임에 이상설과 이위종이 초청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구사한 ‘한국의 호소’는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7월 14일 이준은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이후 헤이그를 떠난 그는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며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각국 정부로부터 외면당하였다. 한편, 일제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을 문제삼아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궐석(闕席)재판을 통해 이상설에게 사형, 이준·이위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구미 각국의 순방 외교를 마친 이상설은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1909년 4월까지 머물렀다.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두 의사를 위해 『신한민보』에 「양의사 합전(兩義士 合傳)」 을 지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1908년 7월에는 박용만(朴容萬)의 제의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대회(愛國同志代表者大會)에 러시아 한인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박용만은 헤이그 밀사 수행원으로 윤병구(尹炳求)와 송헌주(宋憲澍)를 파견하여 이상설을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1909년 2월 하와이와 미국의 한인민족운동단체가 통합하여 국민회(國民會)를 창립하면서 미주한인사회는 국민회를 최고통일기관으로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방회를 설립한 국민회는 창립 직후인 4월 이상설과 총회장 정재관(鄭在寬)을 원동전권위원(遠東全權委員)으로 임명하여 러시아로 파견하였다. 그 목적은 독립군기지 개척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국민회 중앙총회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4 망명정부를 꿈꾼 보황주의자(保皇主義者)

보황주의자였던 이상설은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공화제를 지향하는 국민회 세력을 배척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는 이상설을 대표로 하는 기호파(畿湖派), 국민회 계열의 평안도 세력인 서파(西派), 그리고 함경도 세력의 북파(北派)로 분열되었고, 급기야 1910년 1월에는 정순만이 양성춘(楊成春)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민회 세력은 블라디보스토크을 떠나 치타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설은 국민회에서 보내준 자금을 바탕으로 국민회와는 별도로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러시아와 중국 국경 부근의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지역에 토지를 매입하여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4년간 경영하였다.

1910년 음력 5월 그는 의병들을 통합하기 위해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여 도총재(都總裁)에 유인석을 추대하고, 자신은 외교대원이 되었다. 그는 고종에게 상소를 보내 고종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이끌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의 이러한 망명정부 수립운동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1910년 8월 그는 신한촌(新韓村)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일제의 한국강점 소식을 전해들은 성명회는 일본과 각국 정부에 ‘합병’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명의의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또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이상설을 체포하여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이상설을 비롯한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고, 이상설만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다. 이로 인해 성명회는 와해되고 말았다.

1911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그해 12월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권업회는 신한촌에 총회를 두고 한인거주지마다 지회(支會)와 분사무소(分事務所)를 설치하였다. 또한 기관지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권업회는 조직이 안정되자, 한인 자치와 러시아 관헌과의 행정업무를 맡아보는 등 한인사회의 안정을 통한 독립군기지로서의 역할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민족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이상설은 1914년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당선되었다. 이 정부는 광복군을 중심으로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영도할 중추기관이 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 곤다치 극동총독(極東總督)과 교섭을 벌여 시베리아 동북쪽 레나강 상류를 광복군 군영지로 무상 조차(租借: 땅 등을 빌림)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 영사(營舍)와 교관(敎官)까지 러시아 당국으로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국으로 제휴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자국 내에서의 모든 정치·사회활동을 금지하였다. 이로 인해 권업회는 해산되고 대한광복군정부는 표면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15년 3월 상해로 건너간 이상설은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 등과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추대되었다. 신한혁명당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경우를 대비하여 독립전쟁을 주도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고 신한혁명당 당수(黨首)로는 강제 퇴위당한 광무황제(고종)를 추대하였다. 이는 광무황제를 구심점으로 하는 공고한 망명정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설의 평소 지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5년 7월 신한혁명당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이 광무황제와 알현하기 직전 일제측에 계획이 발각되어 전원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16년부터 중병으로 누운 이상설은 1년간 투병하였으나 1917년 3월 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기 직전 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는 내 몸을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이동녕 등은 아무르강가에 장작을 쌓아 화장을 한 뒤 그 재를 바다에 날렸다. 이때 그의 문고(文稿)와 유품들도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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