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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李商在]

YMCA 및 기호파 기독교 민족 운동의 대부

1850년(철종 1) ~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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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1 박정양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개화·개혁운동

이상재(李商在)는 1850년(철종 1) 10월 26일 지금의 충남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종지리(種芝里) 263번지에서 이희택(李羲宅)과 밀양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슬하에는 승윤(承倫), 승인(承仁), 승간(承侃), 승준(承俊) 4형제를 두었다.

대대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열성으로 일곱 살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총명함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실재실재(實才實才)’라고 하면서 ‘목은선생이 재현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15세이던 1864년(고종 1) 늦은 봄 강릉 유씨(江陵 劉氏)와 결혼하였고, 18세 되던 1867년(고종 4)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러나 그의 낙방은 오히려 평생의 인연을 맺는 기회로 다가왔다. 낙방 후 친족 이장직(李長稙)이 명문가 출신의 죽천(竹泉) 박정양(朴定陽)을 소개해 주었다. 이장직은 박정양과 고종4촌이었다. 박정양은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친척으로 북학파(北學派)를 바탕으로 한 개화 관료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후 박정양의 집에서 13년간 문객(門客)으로 머물며 그와 교분을 쌓는 동시에 개화 성향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개혁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이후 이상재는 박정양이 사망할 때까지 함께 개화와 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881년(고종 18) 그에게 첫 관운(官運)이 찾아왔다. 당시 정부는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때 신사유람단 일원이 된 박정양은 그를 자신의 수행원으로 천거하여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4개월 간의 일본시찰 기간 동안 그는 특히 5살 연하의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이때 홍영식은 이상재의 탁월한 식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귀국 후 1884년(고종 21) 3월 정부는 우편사무를 담당하기 위한 기관으로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신설하고 그 책임자인 총판(總辦)에 홍영식을 임명하였다. 홍영식은 그를 우정국 주사(主事)로 임명하여 실무를 맡겼다. 그러나 그해 10월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고, 정변에 가담하였던 홍영식은 참살(斬殺)되었다. 이 일로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한산으로 낙향하였다. 낙향 직전, 갑신정변 사건처리 책임자던 한규설(韓圭卨)을 찾아간 그는 만일 내 죄상이 드러나면 도망쳐 ‘불의(不義)한 생(生)’을 도모하지 않겠다고 말하였고, 이 말을 들은 한규설은 낙향을 허락하였다고 전해진다.

3년간 고향에서 지내던 그는 1887년(고종 24) 박정양의 도움으로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이라는 하급 관리직을 제수 받고 문서·장부 등과 금전 출납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로 부임하게 되자,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정양 일행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청나라 공사는 이른바 ‘영약3단(另約三端)’을 제시하였다. ‘영약3단’이란 한 마디로 미국과의 외교시 청나라 공사와 함께 참석하여 업무를 처리하되, 반드시 협의하라는 압력이었다. 이는 사실상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두려는 속셈이자 조선의 자주외교를 무시하는 발상이었다. 이러한 청나라의 압박에 대해 그는 공사 박정양을 대신하여 청나라 측에 항변하였다. 그리고는 조선 단독으로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는 한편, 1882년 1월에는 조선공사가 직접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에게 국서(國書)와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이 숨은 노력은 이상재의 공이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외교활동은 오히려 청나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청나라는 조선정부를 통해 박정양과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정부의 소환령에 따라 이듬해인 1888년(고종 25)에, 박정양은 그보다 1년 뒤인 1889년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친군영을 통합·개편한 통위영(統衛營)에서 다시 문안(文案)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892년(고종 29) 정부는 조폐기관(造幣機關)인 전환국(典圜局)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기면서 박정양을 기관책임자인 독판(督辦)에 임명하였고, 박정양은 이상재를 전환국 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과 더불어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면서 최고정책 결정기관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립되었다. 이때 박정양은 내아문독판(內衙門督辦)으로 총재 김홍집(金弘集)에 이어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그 역시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겸 경연각참찬(經筵閣參贊)의 고위직에 발탁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 이어 박정양이 오늘날의 문교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學部大臣)에 임명되자, 그 역시 학부아문참의(學部衙門參議)로 기용되어 학무국장의 직책까지 겸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근대식 교육제도를 입안하여 실행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사망으로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895년 1월, 학부와 법부(法部)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된 그는 사범학교와 중학교·소학교, 그리고 외국어학교를 창설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896년 박정양이 총리대신서리(總理大臣署理)로 임명되자, 그 역시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그리고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內閣總務局長)의 요직에 취임하여 이른바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핵심 역할을 하였다.

2 독립협회의 3대 지도자로 자리잡다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자, 그는 독립협회에 창립멤버로 가입하면서 각종 토론에서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의 창립 주역이던 서재필이 물러나고 1898년 2월 미국 유학생 출신 윤치호(尹致昊)가 독립협회를 맡아 운영할 즈음, 그는 독립협회의 회계를 거쳐 8월에는 부회장을 맡아 독립협회를 사교단체에서 정치단체로 개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서재필-윤치호-이상재로 이어지는 독립협회 지도자로 자리잡은 그는 정부 개혁을 요구하는 방식을 기존의 상소(上疏)라는 전통적 방식 외에도 민의(民意)를 수렴·동원하는 방식인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통하여 고종과 친러세력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1898년 2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된 만민공동회 또는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에서 그는 정부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여 이를 토론에 부치고 그 결과를 고종과 정부에 전달하는 총대(總代)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정부서(上政府書)」와 「헌의6조(獻議六條)」이다. 이들 내용의 기본 틀은 영국과 일본처럼 입헌군주제 실시로 군주의 전횡을 방지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그 일환으로 자문기구 역할을 하던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여 근대적 의회(議會)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의회설립안은 박정양과 민영환이 이끌던 내각의 동의와 고종의 재가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보수 관료들은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여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에 이상재를 임명하려 한다는 모함을 하였다. 이에 고종은 11월 4일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 간부 17명 체포령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를 지시하였다. 이 일로 그는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구금되었다. 이때 이승만(李承晩) 등이 주도한 만민공동회에서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일 농성을 벌이자, 고종은 며칠 후 이들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중추원 관제를 수정하여 독립협회 회원 17명을 의관(議官)으로 임명하였다. 그 결과 12월 20일 제1차 중추원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이승만 등 급진적 의관들이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를 정부 요직에 임명하는 안건을 통과시키자, 격노한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해체하고 중추원을 원상 복구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총무국장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3 기독교 청년운동으로 YMCA를 부흥시키다

1902년 6월 이른바 ‘개혁당(改革黨)’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둘째 아들 승인과 함께 경위원(警衛院)에 수감되었다. 그가 체포된 이유는 민영환을 회장, 박정양을 부회장으로 추대한 조선협회(朝鮮協會)를 조직하여 독립협회 잔존세력과 일본망명객들이 연대하여 정부 개조를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를 비롯한 이원긍(李源兢)·홍재기(洪在箕)·유성준(兪星濬)·김정식(金貞植) 등 독립협회 시절 동지들이 함께 체포·구속되었다. 두 달간의 심문 끝에 국사범으로 판결 받은 그는 1902년 8월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는 감옥에서 이승만(李承晩)을 만났고, 이승만의 권유로 함께 투옥된 이원긍·홍재기·유성준·김정식 등과 함께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의 일이었다. 이들 감옥동지들은 이후 이상재와 함께 활동하는 한편, 이상재를 정점으로 이승만의 든든한 후원세력이 되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4월 그는 이원긍·홍재기·유성준·김정식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감옥동지들과 옥중시절 도와준 선교사 게일(James S. Gales)을 찾아가 함께 세례를 받고 게일이 세운 교회인 연동교회(蓮洞敎會, 일명 연못골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이어 질레트(G. A. Gillet) 등이 세운 종로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현 YMCA의 전신, 이하 YMCA로 약칭)를 찾아가 교육사업에 전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강제 체결 이후, 고종이 그에게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을 제수하자, 그는 잠시 기독교 교육사업을 뒤로 미루고 이듬해 6월까지 근무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연동교회 장로인 궁내부 협판 박승봉(朴承鳳)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화의(萬國平和會議)에 밀사 파견을 추진하였다. 이 일로 그해 6월 통감부(統監府)에 의해 체포되어 두 달간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의정부참찬에서 물러난 그에게 힘든 시기가 닥쳤다. 1905년 박정양의 분사(憤死), 1907년 부인과 장남 승윤의 사망, 1908년 둘째아들 승인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한때 자결을 고민하였으나, 질레트와 김정식의 만류로 이후 YMCA에 투신하면서 제2의 인생을 걷게 된다.

1908년 YMCA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한 그는 옥중동지인 이원긍·홍재기·유성준·김정식 등과 함께 YMCA에서 활동하면서 YMCA를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6월 청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학교별로 YMCA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을 질레트를 통해 불러들여 1912년 3월까지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1년 ‘105인사건’이 터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총무 질레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1912년 6월 질레트의 뒤를 이어 YMCA 총무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YMCA내 친일그룹 유신회(維新會)가 한국YMCA를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에 예속시키려 하자, 1913~14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이를 막아냈다. 또한 1914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여 청년YMCA의 전국조직을 구축하면서 기독교청년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1916년 YMCA 총무직을 윤치호에게 넘겨준 그는 명예총무로 물러났다. 이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기독교 전도와 민족의식 고취, 독립사상 촉구 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천도교 청년회 등을 망라한 각 종교단체의 단합을 추진하여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한 민족운동 기반을 닦기도 하였다.

4 1920년대 사회운동의 대부로 자리하다

1919년 초, 국내에서는 3·1운동 거사계획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 논의에 이상재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다만, 역할 분담 차원에서 이상재는 1차 계획이 실패할 경우, 이를 책임질 대표자로 선정되어 있었다. 1919년 3월 9일 현순(玄楯)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3월 1일 (중략)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는 손병희(孫秉熙)·이상재·길선주(吉善宙) 3씨를 파송”하였다는 내용이나,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 수립에 깊이 관여하였던 이규갑(李奎甲)의 증언에서 “단체 대표로서 (중략) 월남 이상재 선생과 박승봉씨를 내정했는데 후에 만약 일본정부와 우리나라 독립문제로 담판하는 경우가 생겼을 때 민족대표로 추대하기 위하여 일부러 뺐었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1957년 이상재의 묘를 이장할 때,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쓴 비문(碑文)에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 때 다수인은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선생이 남을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제의하시었다.”고 언급하여 3·1운동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제시한 것 또한 이상재의 역할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역할 때문인지 3·1운동 직후 일제는 민족대표 33인도, 48인도 아닌 그를 체포·구금하였다.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6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그는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에 조직에도 관여하였다. 이때 이승만을 ‘집정관(執政官) 총재(總裁)’로 적극 추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고, 이후에도 이승만의 영원한 후원자였다. 이승만이 상해의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후 끊임없는 재정 후원을 하였고, 1923년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대통령불신임안이 제출되자 이승만을 적극 옹호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임시정부와 별도로 친위조직인 하와이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하자, 1925년 국내에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조직하고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여 생을 다할 때까지 지지·후원하였다. 이러한 것은 그와 이승만이 기호파(畿湖派)와 기독교인(基督敎人)이라는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3·1운동 이후 70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국내 언론단체 등 각종 사회단체에서 모셔갈 정도로 ‘거인’으로 대접을 받았다. 1920년 조선교육협회 회장, 1923년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사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장, 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 1924년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 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등을 역임하는 등 사회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은 절정을 이루었다. 1924년 9월에는 75세의 나이로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에 취임하여 민족지로 육성하였고, 이어 1927년에는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서 만장일치로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병석에 누워있던 상태였다.

신간회 회장을 수락한 지 2개월 뒤인 1927년 3월 29일, 그는 끝내 재동에 있던 그의 셋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78세. 엄혹한 일제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는 사상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4월 7일 발인하던 날, 243개에 달하는 사회단체가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종로에서 서울역까지 상여를 따르던 인파는 5천여 명, 거리에서 애도한 시민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한때 같이 활동하였던 선교사 에비슨(O. R. Avision, 한국명 어비신魚丕信)은 조문하면서 그를 가리켜 ‘한국의 거인(Grand Man of Korea)’이라고 칭송하였다. 한산에 안장된 묘소는 1957년 6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長興面) 삼하리(三下里)로 이장되었다. 이때 부인 강릉 유씨(江陵 劉氏)와 비로소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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