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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李容翊]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1854년(철종 5) ~ 1907년(순종 4)

이용익 대표 이미지

이용익 초상

국립민속박물관

1 20여년 만에 제기된 소송

1924년 이현재(李賢在)란 인물이 일본정부와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을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의 부친이 1902년 이 은행 경성지점에 예치해 놓은 79만원을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금고지기로 유명했던 이용익(李容翊)이었다. 재판에서는 이 예금이 이용익 개인의 돈이냐 아니면 고종 황제의 비자금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재판은 매우 지루하게 이어졌으며 1936년 도쿄의 공소원(控訴院)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예금이 사실상 고종 황제의 비자금이란 사실이 인정된 셈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이용익이 과거 고종 황제의 금고지기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2 광산왕, 이용익

이용익은 1854년 함경북도 명천(鳴川)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이었다. 아버지는 이병효(李秉斅)이며 20세까지 초병덕(楚秉悳)이란 주자학자에게 글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학문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보부상과 물장수 등을 전전하다가 단천에서 금광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민씨 척족(戚族)의 일원인 민영익(閔泳翊)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충주에 피신해 있던 왕후(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 연락을 담당한 공으로 감역(監役) 벼슬을 얻었다.

이용익은 이후 단천부사, 북청부사, 영흥부사를 거쳐 1887년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함경도 일대의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특징적인 점은 가는 곳마다 해당 지역의 광무감리(鑛務監理)를 겸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광무감리란 광산을 감독하면서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는 직책이었다. 개항 이후 광세(鑛稅)는 관세(關稅)와 함께 새로운 재정수입원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그는 광산에 밝았기 때문에 벼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돈을 벌려고 시작한 광산이 그에게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까지 열어준 셈이다.

이용익은 이러한 연유로 일반적인 행정보다는 광산에서 세금을 거두는 데 더 열을 올렸고 그 과정에서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북청민란이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 그는 이 때문에 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관직에 복귀한 것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도 광세를 거두는 그의 능력만은 인정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용익은 갑오개혁 당시에도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갑오개혁의 추진기관이었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는 1894년 8월 14일 전직 광무감리 이용익에게 함경도의 광무(鑛務)를 다시 맡겨 징수한 세금을 3개월마다 탁지아문(度支衙門)에 납부하도록 하라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9월 10일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개화파 정권도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도 되풀이되었다. 1896년 4월 28일 조정에서는 그에게 서북 여러 지역의 금광과 관련된 사무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이듬해 12월 3일에는 전국의 금, 은, 동, 철, 석탄 등 각종 광산의 사무를 모두 감독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가 일개 광산꾼으로 시작하여 광산왕에 등극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3 대한제국의 돈 줄을 한 손에 움켜쥐다

이용익은 이처럼 대한제국기 광산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였지만 여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그는 1897년 12월 29일 탁지부(度支部) 전환국장에 임명되었다. 전환국(典圜局)은 근대식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다. 전환국에선 1891년부터 신식화폐조례에 따라 본위화(本位貨: 한 나라의 화폐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화폐로 본위화폐로도 불린다)인 은화와 보조화폐인 백동화 등을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이 선포되면서 본위화폐(本位貨幣)인 은화는 주조하지 않고 대신 일본 화폐를 그대로 통용시켰으며 보조화폐인 백동화만 집중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백동화를 주조하면 상당한 주조 이익이 정부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재정수입원이 되었다. 하지만 백동화를 너무 많이 찍어내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경제적 불안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백동화 발행은 간접적인 방식의 세금 징수였으며 전환국은 그야말로 정부의 돈줄이었다.

그가 전환국장에 임명된 것은 돈을 찍어내는 재료가 광물이었고 광세 징수에서 보여주었던 탁월한 능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환국장을 맡고나서 백동화를 열심히 찍어내 정부재정을 뒷받침하였다. 하지만 백동화를 열심히 찍어내면 물가가 올라가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 독립협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899년 8월 24일 이용익은 내장원경(內藏院卿) 에 임명되었다. 당시 국가재정은 크게 정부재정과 황실재정으로 구분되었는데 정부재정을 책임지는 기관이 탁지부라고 한다면 황실재정을 책임지는 기관이 내장원이었다. 그는 이제 황실재정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것이다. 그는 내장원경을 맡으면서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황실재정으로 끌어들였다. 궁방전과 역둔토는 두말할 것이 없으며 광산과 인삼 등도 그 대상이 되었다. 너무 왕실에 돈을 집중시켜 정부재정이 텅 빌 정도였다.

대한제국은 이렇게 끌어들인 황실재정을 바탕으로 각종 근대개혁사업 즉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궁내부 내에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을 설치하여 경의선 철도의 부설에 직접 나선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용익은 서북철도국의 감독과 총재를 연이어 맡으면서 이 사업을 주관하였다. 광무개혁의 핵심 사업 가운데 하나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그는 이 사업을 주관하던 양지아문(量地衙門)과 지계아문(地契衙門)의 총재관을 맡아 이 사업을 이끌었다. 이렇게 그는 대한제국의 돈줄을 한손에 움켜쥐고 각종 개혁사업을 추진한 핵심적인 실세였던 것이다.

4 고종 황제의 총애를 받은 대가

이용익은 대한제국기 고종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처럼 절대적인 신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돈줄을 맡긴 것이고 거꾸로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그가 최고 권력과 처음 연결을 갖게 된 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왕후(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단천 광산에서 채굴한 금덩어리를 고종에게 상납하여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그가 특히 출세한 것은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다. 당시 함경도 출신자들이 상당수 등용되면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용익도 끼어 있었다. 그래서 1896년 8월에는 평안북도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등용되었다.

이용익은 이렇게 벼락출세를 하면서 만만치 않은 반발에 직면해야 하였다. 그는 1897년 이윤용(李允用)과 한규설(韓圭卨) 등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죄로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그가 반발에 부딪힌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신(大臣)과 총신(寵臣) 사이의 알력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

1900년 중추원의장 정낙용(鄭洛鎔)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의 공격을 받았다. 가장 심한 공격은 1902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의정 윤용선(尹容善) 등 여러 대신들이 경운궁 대한문 밖에 연좌하면서 이용익에게 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 고종 황제조차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것으로도 사태가 진정이 되지 않는 바람에 안남미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군함을 타고 당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旅順)으로 건너가야만 하였다.

그러면 이용익은 왜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을까. 정낙용은 그가 북쪽 변방의 천한 출신임에도 언사와 거동이 대단히 오만하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벼락출세에 대한 질시인 셈이다. 이용익이 공격당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이용익이 대한제국기 맡았던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찰이었다. 그는 당시 세금 상납을 떼먹거나 밀린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는 그야말로 저승사자였다. 이밖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이렇게 남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악역을 도맡아 하였으며 그 결과 1903년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5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가장 경계한 인물

이용익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2주 만인 1904년 2월 22일 일본으로 강제 압송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끌고 간 것이었다. 실제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방해되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외부 번역관(外部繙譯官) 이건춘(李建春)을 중국 지부(芝罘)로 밀파하여 그곳에서 각국에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전문을 발송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총 지휘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에 들어서면서 이용익을 군부대신(軍部大臣), 원수부검사국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등 군직에 연이어 임명하였으며 그는 야포용 탄약 등 다량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등 전쟁 발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를 끌고 간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날인 2월 23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용익은 일본으로 끌려간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 보성학교와 보성사를 설립하는 등 표면상 문화계몽사업에 주력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종 황제도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일제는 그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았고 끊임없이 방해하였다. 그가 1905년 2월 경북관찰사(慶北觀察使)에 임명되자 일진회(一進會)를 동원하여 그의 부임을 물리적으로 막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정치적 역할을 하기는 힘들었고 결국 1905년 9월 스스로 국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6 만국평화회의의 첫 번째 특사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던 대한제국의 특사는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에 앞서 원래 이 회의에 참석할 특사로 선발되었던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

만국평화회의는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로 제1차 회의는 1899년에 개최된 바 있다. 제2차 회의는 원래 1906년 8월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다가 사정상 1년 연기되어 1907년 6월에 개최되었다. 대한제국은 1905년 10월말 러시아 측으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릴 국제회의에 초청한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지만 그 이전부터 이 회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7월 한국주재 일본공사는 궁중에서 평화회의를 위한 비밀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첩보를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그해 9월 그가 국외 망명을 감행한 것은 만국평화회의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익은 9월 11일 황제의 밀지를 가지고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9월 29일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그해 11월 27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Lamsdorf)와 여러 차례 회견하는 등 외교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저격미수 사건까지 겪는 등 불행이 겹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용익은 1906년 3월 8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이곳의 교민사회를 근거지로 해서 장기적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는 이 무렵 헤이그에 건너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회의는 연기되었고 그는 1907년 2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서 이상설과 이준이 급히 특사로 선발된 것이다.

7 그가 남긴 돈은 어떻게 되었나

이용익이 1907년 2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자 고종 황제는 그에게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그의 노고에 대한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일제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가 남겼을 돈 문제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러한 일본의 심정을 대변한 인물이 바로 일진회의 지도자 송병준(宋秉畯)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용익이 죽은 후 그의 손자인 이종호(李鍾浩)가 많은 돈을 은행에 예치하고 있고 이 돈이 고종의 비자금이므로 국고에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관철하기 위해 이종호를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예금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송병준의 강도행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당시 이종호 명의로 상당한 액수의 예금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이 돈이 고종황제의 비자금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당시 일제는 이용익이 조성한 자금이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일제는 1909년 4월 7일 이도표(李道杓)란 인물을 체포하였는데 그의 혐의는 이용익이 상해의 은행에 남긴 예금을 인출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했다는 것이었다.

한편 신민회 회원들이 국외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축할 때 이종호 명의의 자금을 운동자금으로 활용하려 했다. 망명자들이 청도(靑島)에 모여 회의를 할 때 바탕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종호 자금이었다. 이용익이 죽고 난 뒤에도 그가 남긴 돈은 여전히 일제와 항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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