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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李儁]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다

1859년(철종 10) ~ 1907년(순종 1)

이준 대표 이미지

이준 유묵 인쇄전단

e뮤지엄(대한민국역사박물관)

1 헤이그에 나타난 세 사람의 특사

1907년 7월 4일 일본 외무대신은 한성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게 다음과 같은 현지 외교관의 보고를 전달하였다. “이곳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판사 이준(李儁), 전 공사관서기관 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상설은 대한제국 황제를 알현한 후 4월 20일경 이준과 함께 한국을 출발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로 들어가 이위종과 만나 세 사람이 함께 길을 떠나 6월 25일 이곳에 도착하였으며 그들은 대한제국 황제의 전권위임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바 계속 정탐하는 중임” 이준을 비롯한 세 사람의 특사는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2 북청 청년 이선재, 서울로 올라가다

이준은 1859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순칠(舜七)이다. 일성(一醒), 해사(海史), 청하(靑霞), 해옥(海玉) 등의 아호를 썼다. 본명은 이선재(李璿在)이며 이준이란 이름은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준은 1887년 28세의 나이로 지방에서 실시하던 과거의 초시(初試)인 향시(鄕試)에 합격했지만 당시 북도 출신으로 향시 합격만 가지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올라와 김병시(金炳始)의 문객이 되었다. 문객이란 일종의 개인 비서로서 당시 겸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고관의 문객이 되는 것은 당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렇게 고대했던 관직의 길은 1894년에 열리기 시작했다. 그해 8월 태조의 조모를 모신 순릉의 참봉에 임명된 것이다. 순릉은 그의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 함흥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 4월 법관양성소에 1회로 입학하여 그해 11월 졸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6년 2월 3일 법관양성소 졸업생 가운데는 제일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주임관 6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의 앞에는 관직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준이 이렇게 관직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출신지인 함경도 인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개혁 당시 함경도 출신들이 개화파 정부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학우(金鶴羽)와 장박(張博)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함경도 출신이었다. 김학우는 경흥 출신이고 장박은 종성 출신이었다. 이준은 그들의 후원을 받아 벼슬길에 접어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준과 같은 함경도 출신의 인물로는 이용익(李容翊)을 들 수 있지만 그는 이 무렵 아직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다.

3 망명의 길을 떠나다

이준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가 1896년 2월 3일 검사시보로 막 부임한 지 약 1주일 뒤에 아관파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법부대신(法部大臣)이었던 장박(張博)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망명 이후 이준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무엇을 하였는지 언제까지 그곳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와세다 대학에 다녔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규 학생으로 등록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망명한 조선인들에 대해 일본 당국은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감시대상에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당국의 한국인 망명자에 대한 동향 보고 문건에는 1897년과 1898년 그리고 1904년과 1905년 네 차례 이선재(李璿在)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가 망명한 이래 1904년 이후까지 계속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장박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망명했던 거물급 망명객들은 대부분 그러한 경로를 거쳤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1898년의 동향 보고 문건의 내용이다. 이 문건에 따르면 박영효(朴泳孝)를 따르는 망명객들이 귀국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건은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있어서 실제 귀국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영효는 결국 귀국하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만민공동회 운동의 과정에서 박영효를 국내 복귀를 도모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당시 박영효는 부하들을 밀입국시켜서 이 음모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음모에 앞장선 인물이 이승만(李承晩)과 정순만(鄭淳萬)이었다. 이준도 이 무렵 잠시 밀입국해서 이 음모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바 없지만 뒷날 여러 사람들은 그를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민권운동가 이준

이준은 1904년 11월 보부상 세력과 힘을 합쳐 공진회(共進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그 해 12월 과거 만민공동회 운동 당시처럼 가두집회라는 방식으로 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때의 대정부 투쟁에는 일진회(一進會)도 행동을 함께 하였다. 정부는 이에 대해 강제 진압을 하였고 이준 등 공진회의 지도부는 유배를 갈 수밖에 없었다. 공진회와 대정부 투쟁을 함께 했던 일진회는 일본군의 비호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을 물리치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공진회는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해산되고 말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진회와 공진회의 관계이다. 이준이 일진회를 공격하기 위해 공진회를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1904년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무리가 아니지만 당시 공진회와 일진회는 정부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 선명성과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하였지만 서로 정면으로 충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치적 속셈은 어떻든 표면적 행동만 따진다면 공진회는 반(反)일진회 단체가 아니라 반정부 단체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시점까지 이준은 항일 투사가 아니라 과거 만민공동회의 운동을 계승한 반정부 투사, 즉 민권운동가였던 셈이다. 물론 그가 일본과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진회와는 분명히 달랐다.

공진회가 해산되고 유배 갔다 돌아온 후 이준은 반정부 투쟁의 기세를 확연히 누그러트렸으며 더 이상 노골적인 반정부 활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민권운동의 이념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이후, 노골적인 정부에 대한 비판과 공격 대신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등 계몽단체를 통해 입헌정치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였다.

5 이준, 일제의 침략성을 직시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국권회복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준도 이 무렵 일본의 침략성을 직시하면서 반일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김구(金九)가 지은 『백범일지』에 따르면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신이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그곳에 집결한 청년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상소문을 지은 인물이 바로 이준이었다고 한다. 당시 상동청년회의 서기가 과거 이준의 동지였던 정순만인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상소문을 지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을사늑약 반대운동의 큰 물결이 지나가고 난 뒤 이준은 관직에 복귀하였다. 1906년 6월 18일자로 징계를 면제받고 약 10년 만에 다시 평리원 검사로 임명된 것이다. 그가 이 무렵 관직에 복귀한 것은 일진회 등 친일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고종 황제의 정치적 포석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권동진(權東鎭) 등 천도교계 인사들도 등용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무렵 그와 고종과의 사이에 모종의 연결선이 생겼다는 뜻이 된다.

1907년 이준이 정치범 사면문제로 상관인 법부대신과 충돌한 끝에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던 기산도에 대한 사면 문제였고 당시 그와 충돌했던 사람들은 이하영(李夏榮), 이윤용(李允用) 등 친일적인 인사들이었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일본 헌병들이 법원을 둘러싸고 항의하는 군중들을 경계하였다. 당시 고종황제는 그의 형량을 가급적이면 감면하려고 애를 썼다. 이는 그와 고종 황제가 이 무렵 연결되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특사로 발탁된 이유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까지 과정에는 여러 곡절이 있었다. 원래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6년 8월 열릴 예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1년 가까이 연기되어 1907년 6월이 되어야 열릴 수 있었는데 이것이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대한제국은 1905년 10월 이미 러시아로부터 만국평화회의 초청의사를 전달받았으며 이에 따라 이용익을 특사로 파견한 바 있다. 그런데 회의가 자꾸 연기되고 해외를 떠돌던 이용익이 1907년 2월 사망하는 바람에 특사외교는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대안으로 급히 만들어진 카드가 바로 이상설과 이준 카드였다. 고종 황제는 이와는 별도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도 헤이그에 파견하여 특사들을 돕도록 하였다.

이상설과 이준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특사로 선정되었으며 국서를 전달받은 경위는 어떠했는가가 문제인데 원래 특사 파견이 비밀리에 추진된 까닭에 그 경위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 사건은 러시아 수도에 있었던 이범진(李範晉)이 미리 계획을 세워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의회(同義會)와 모의하였고 이 단체는 서울의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에 통고하여 이상설, 이준에게 실행의 임무를 맡기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 보고의 내용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실체적 진실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먼저 동의회부터 살펴보면 이 단체는 당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교민단체이자 의병단체이다. 회장은 최재형(崔在亨)이고 훗날 정순만과 이위종도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처단도 이 단체에서 꾸민 일이었다. 서울의 기독교청년회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상동교회청년회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 당국에서는 을사늑약 반대운동, 오적 암살 시도, 헤이그 특사 사건 모두 상동청년회에서 꾸민 일로 의심하고 있었다. 상동청년회를 모태로 만들어진 비밀결사가 바로 신민회이다. 동의회와 상동청년회는 모두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이준은 특사 선정 당시 국내에 있었다. 을사늑약 반대운동 당시부터 상동청년회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상설은 특사로 선정될 당시 연해주와 가까운 북간도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의회에서 그를 특사로 천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상동청년회와 동의회에서 각각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천거했다고 한다면 두 사람은 형식상 고종 황제의 특사이지만 내용상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였던 셈이다.

7 헤이그에서의 죽음

이준을 비롯한 특사일행은 현지에 도착한 이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회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개최국인 네덜란드 정부 모두 특사의 대회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특사 일행은 「공고사(控告詞)」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각국 대표에게 배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에서 이준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07년 7월 17일 일본 외무차관이 이토 통감에게 대한제국의 밀사 이준이 병사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준은 얼굴에 생긴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다가 감염되어 사망하였으며 일부에서는 자살했다는 풍설이 돌고 있지만 진실이 세상에 판명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한 국내 매체들은 한결같이 이준이 자결했다고 보도하였다. 이후 이준 자살설은 일본 측의 기대와는 달리 적어도 국내에서 일제 강점기 내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956년 문교부 장관의 요청에 따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현지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가 할복자살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에 봉환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헤이그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자살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준은 여전히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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