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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李會榮]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 운동가

1867년(고종 4) ~ 1932년

이회영 대표 이미지

이회영 사진

공훈전자사료관

1 머리말

이회영(李會榮)은 명문가문 출신이지만 나라가 멸망하자 온 가족을 이끌고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으며, 말년에는 아나키즘 운동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이다.

2 온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회영은 1867년 3월 17일 서울 저동(苧洞)에서 이유승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경주 이씨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그의 10대조가 이항복(李恒福)이었으며, 할아버지 이계조(李啓朝)는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지냈고, 그의 부친 이유승(李裕承)은 판서(判書),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역임하였다. 그의 형 이석영(李石榮)이 양자로 들어간 종숙 이유원(李裕元)은 고종의 친정(親政) 이후 영의정을 지내며 개화정부를 이끌었다. 그의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형제로는 이건영(李健榮)을 비롯하여 이석영, 이철영(李哲榮), 이시영(李始榮), 이호영(李頀榮)이 있었다.

그의 유년 및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명문가 자제들이 그러한 것처럼 성리학을 수학한 전통적인 유학자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의 동생 이시영이 일찍이 관계에 진출하여 촉망받는 관료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관직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고 어떤 단체의 장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위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은 대신에 구시대의 인습을 타파하고 개화의 물결을 선도하려고 하였다.

이회영은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상설(李相卨), 여준(呂準) 등과 시국을 논의하며 구국의 길을 모색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고 있었을 때 이상설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에게 조약 체결에 반대하도록 설득했고, 이회영은 외부교섭국장이었던 이시영으로 하여금 상관인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한규설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결국 조약이 체결되자 이회영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미 1904년부터 이회영은 이동녕(李東寧)과 함께 상동교회 및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며 비밀단체 결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을사늑약 이후 항일운동의 거점을 국외에 마련하기로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주목하여 이상설을 파견하였다. 곧이어 이동녕과 여준도 뒤따라가서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했다. 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특사가 파견되었는데(헤이그 특사 사건), 이때 이회영은 이상설과 이준(李儁)을 추천하고 이들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는 데에 간여하였다.

이어서 1907년 4월 이회영은 안창호(安昌浩), 이동녕, 양기탁(梁起鐸), 전덕기(全德基) 등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학교설립 및 잡지·서적 출판, 강연 등의 교육·계몽 사업에 힘쓰는 한편 무관학교 설립 및 독립군기지 창건 운동을 전개했다. 이회영은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각 학교에 동지들을 파견하였고, 스스로는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들을 지도하였다. 1908년 여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향후 정세와 진로에 대해 논의하고 국내외에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방침을 정하여 실천하였다.

1909년 봄 신민회는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군관학교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신민회에서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장소를 물색하고 만주로 집단 망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 8월이 되자 이회영은 직접 만주 일대를 답사하여 최종적으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회영은 귀국하자마자 형제들을 설득하여 온가족이 함께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정하고 막대한 가산과 전답을 모두 처분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가족과 권속을 포함한 40여 명이 만주로 출발하여 이듬해 1월에 삼원보에 도착하였다. 이회영 일가가 만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상룡, 김동삼(金東三) 등을 비롯한 많은 항일지사들도 삼원보로 결합하였다.

이와 같이 삼원보로 모여든 항일지사들은 우선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척박한 만주지역에서 한인들의 생계 방도를 마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당시 이회영은 경학사 내무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중국인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 금지와 한국인들의 토지 소유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베이징으로 가서 일찍이 부친 이유승과 친교가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과의 갈등문제가 해결되었고,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지역에 토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1912년 간도 지역의 대흉년과 풍토병으로 삼원보 지역의 경학사가 운영난에 빠지게 되자 통화현으로 독립운동의 거점을 옮겼고 신흥강습소도 신흥무관학교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3 고종 망명계획의 실패와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

이회영은 1913년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서 홀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1919년까지 6년간 이회영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국내 각지의 주요인사, 중국 관내 및 만주, 미주, 일본 등에 산재한 해외동포들과 의견을 나누며 비밀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때 고종의 해외 망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회영은 아들 이규학(李圭鶴)을 고종의 조카딸인 조계진(趙季珍)과 결혼시켰는데, 신부례를 올리면서 궁궐을 출입하였다. 이회영은 기회를 보아 고종에게 망명계획에 대한 의사를 타진했고 승낙을 받았다. 민영달(閔泳達)이 5만 원을 내놓아 망명자금을 마련하였고, 베이징에 있던 이시영이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망명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회영은 고종의 죽음 직후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음을 느끼고 이시영과 이동녕이 있던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곧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각지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며 독립운동의 기세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도 상하이로 건너가 다른 독립지사들과 함께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하지만 독립지사들 사이에서는 누구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지, 정부기구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어떤 방향으로 운영할지, 독립운동의 방략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둘러싸고 내부 분란과 알력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1919년 4월 11일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현순(玄楯)이 이회영을 국무총리로 추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이날 격론 끝에 이승만(李承晩)이 당선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이회영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임시정부 수립 자체에 반대하였다. 그는 병합 이후 10여 년이 경과하면서 세태의 변화를 감지하였고, 이에 따른 운동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보다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본부를 두고 전체 독립운동을 지도하되 각 단체가 자유롭게 연합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기관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가까운 이시영이나 이동녕 등에게조차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임시정부 내의 파벌싸움만 심각해지자, 결국 1919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가버렸다.

4 아나키스트가 되다

이회영은 베이징에 도착한 이후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당시 베이징에서의 이회영 집은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라고 할 정도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신채호(申采浩), 유자명(柳子明)과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형제, 정화암(鄭華巖) 등과 교류하면서 그는 아나키즘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으나, 1921년 5월 러시아를 시찰했다가 베이징에 도착한 조소앙(趙素昻)으로부터 사회주의국가의 실상을 전해 듣고 실망하였다. 게다가 자신이 만주 독립운동단체를 단합시키려 노력한 결과 탄생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서 또다시 복벽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무력충돌까지 발생하게 되자, 독립운동 진영 내의 분열과 파쟁에 대해서 크게 고통스러워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자유연합주의의 이상과 그 조직 이론으로 새 한국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 4월 20일 이회영은 유자명,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白貞基)와 함께 아나키스트 조직으로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였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기관지로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하여 자신들의 운동 노선을 천명하고 독립운동의 파벌싸움을 비판하고 자유연합주의로 협력하고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민족주의세력의 실력양성론을 비판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하는 볼셰비키혁명 이론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또한 이회영은 신채호, 유자명과 함께 의열투쟁 조직인 다물단(多勿團)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내몽고 지역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여 베이징 정부로부터 황무지 3만 정보를 빌렸으나, 개간 및 재만동포 이주비용 마련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이 계획은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이회영은 운동의 근거지를 텐진으로 옮겨 활동을 전개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27년 9월에는 김좌진(金佐鎭)의 친척 동생인 김종진(金宗鎭)이 이회영을 찾아왔는데, 이때의 대담에서 김종진은 이회영으로부터 큰 사상적 감화를 받았다. 김종진은 이회영과 이별한 후 김좌진을 찾아가 이회영과의 대화 내용을 들려주고 아나키스트들과 제휴할 것을 권고하였다. 김좌진은 아나키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나키스트들과의 연대를 수락하였다. 이에 김종진은 아나키스트들을 규합하여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였으며, 자유연합주의 운영원리에 의해 신민부(新民府)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당시 신민부는 공산주의단체인 북만조선인농민총동맹(北滿朝鮮人農民總同盟)의 비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는데, 아나키즘이 공산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도 아나키즘과 연대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이에 이회영은 1929년 봄 이을규를 북만주로 파견하여 신민부 재편에 관여하게 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9년 8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가 발족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농촌자치조직을 건설하면서도 운동가들이 농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농민이 되어 함께 일하며 토론하고 숙식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농민들의 신뢰를 얻은 후 집단부락을 만들고 이들을 협동조합으로 묶어 농민 스스로 운영하도록 했다. 한족총연합회가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일제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세력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한족총연합회가 공산주의에 대해서 극도의 배타성을 드러내자, 공산주의세력에서도 한족총연합회에 대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여 1930년 1월 김좌진을 암살하게 되었다.

이후 한족총연합회가 무력화되자 이회영의 딸 이규숙을 포함한 텐진의 아나키스트들은 북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를 수습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세력은 다시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여 한족총연합회 간부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을 암살하였고, 이어서 김종진마저 1931년 7월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게다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만주일대를 본격적으로 침략하자, 한족총연합회의 아나키스트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5 항일구국연맹과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도 1930년에 함께 북만주로 가려고 하였으나 16세였던 아들 규창의 교육문제와 이회영의 건강 문제 등으로 동지들이 만류를 하여 포기하고, 1930년 10월에 상하이로 가서 머물렀다. 그런데 상하이에는 이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세력 일부가 김좌진 피살 이후 이곳으로 철수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아나키스트들이 상하이로 모여들면서 상하이가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연맹의 아나키스트들은 향후 독립운동방향을 논의하면서 의장으로 이회영을 추대하였으나 이회영은 이를 사양하였고 대신 유자명을 추천하여 그가 의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상하이에 아나키스트 조직이 건설되었으나 자금이 없어서 운동의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1931년 10월말 이회영 등이 중국의 아나키스트 왕야차오(王亞樵)와 화쥔스(華均實)로부터 항일공동전선을 펴자는 제의를 받으면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결국 1931년 11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지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다. 항일구국연맹은 일제 기관 파괴, 요인 암살, 반일사상 선전 등의 활동을 통하여 조선을 해방하고 일본과 중국에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항일구국연맹은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라는 직접 행동대를 조직하여,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 미수 사건, 왕징웨이(王精衛) 저격 사건, 샤먼(廈門) 일본영사관 폭탄 투척 의거, 톈진 일본영사관과 톈진일청기선(天津日淸汽船) 폭탄 투척 의거 등을 일으키며 일제에 타격을 입혔다.

그런데 1932년 2월 일제가 상하이사변을 일으키자 장제스(蔣介石) 정부는 일본과 전면전을 치를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퇴각을 명하였다. 하지만 퇴각명령에도 불구하고 중국 19로군(路軍)은 끝까지 항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장제스 정부와 19로군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19로군과 관계가 있었던 왕야차오와 화쥔스 역시 장세스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받게 되었고 결국 1932년 5월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는 일본군의 전승기념식에 윤봉길(尹奉吉)의 폭탄 투척 의거가 발생하였는데, 일본 군경은 남화연맹을 거사의 배후로 지목하여 이회영과 정화암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곧 김구(金九)가 훙커우 공원 의거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거사임을 밝혀서 일제는 임시정부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로 방향을 바꿨다. 남화연맹은 비록 일본 군경의 검거는 면하게 되었지만, 중국 아나키스트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상하이에서의 활동공간도 극히 좁아지게 되면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왕징웨이 외교부장 저격 사건이 왕야차오가 주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자칫 중국 내부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이회영은 만주를 새로운 활동무대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이회영과 정화암은 중국 국민당의 거물이며 아나키스트인 우즈후이(吳稚暉)와 리스청(李石曾)을 만나 만주에서의 활동을 논의하였고, 만주지역의 군벌인 장쉐량(張學良)으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이때 만주는 일본이 완전히 점령한 상태여서 상하이보다 훨씬 위험했기 때문에 동지들은 반대하였지만 이회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1932년 11월 초 상하이에서 만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밀고로 인하여 11월 5일경 중국 다롄(大連)에서 일본 군경에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11월 17일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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