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장지연

장지연[張志淵]

피 끓는 마음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짓다

1864년(고종 1) ~ 1921년

장지연 대표 이미지

張志淵의 畵像과 論說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대표적인 민족 언론인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다. 이 논설은 장지연(張志淵)이 지은 것으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사실을 폭로하고 이를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논설을 신호탄으로 을사늑약반대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거족적인 국권회복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 논설을 지은 장지연은 여태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 언론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 세대의 유학자로서 전통 문화를 갈무리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2 남인 실학의 전통을 잇다

장지연은 1864년 11월 30일 경상도 상주군(尙州郡) 내동면(奈洞面) 동곽리(東郭里)에서 장용상(張龍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장현광(張顯光)의 12대손이다. 원래 그의 집안의 본거지는 인동이었지만 선대의 일족 가운데 정조 서거 후 독살설을 주장하다가 처형된 인물이 있어서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야 하였다.

그는 14살 때 장석봉(張錫鳳)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시작하였다. 장석봉은 장현광의 9대손으로 전주판관(全州判官)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지낸 인물이다. 형 장석구(張錫龜)와 장석용(張錫龍) 모두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다. 특히 장석봉은 인동의 오산 고가에서 장현광의 가학을 계승하여 문중을 지도하던 인물로 유명하였다. 장지연은 장석봉 문하에서 장현광으로부터 내려온 가학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훗날 장복추(張福樞)를 통해서도 장현광의 가학을 계승하였다.

장지연은 19세 때 장석봉이 타계하자 허훈(許薰)을 찾아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허훈은 선산 출신의 유학자로서 허전(許傳)의 문인이 되어 그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런데 허전은 포천 출신으로 이익(李瀷)과 안정복(安鼎福) 등 근기남인(近畿南人: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의 실학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허전은 1864년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부임하여 이곳에 학문을 전파하였는데 이때 허훈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근기남인의 실학은 허전과 허훈을 통해 영남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장지연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허훈을 통해 근기남인의 실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즉 장석봉을 통해 받아들인 장현광의 학문과 허훈을 통해 받아들인 근기남인의 학문이 장지연 사상의 두 축이었던 것이다.

3 대한제국 선포를 뒷받침하다

장지연은 1885년 6월 지방에서 실시하던 과거인 향시(鄕試)에는 합격했지만 그해 가을에 서울에서 치러진 회시(會試)에는 낙방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문장실력은 출중하여 향시에 합격하기 1년 전인 1884년 의령 출신의 주서(注書) 안효제(安孝濟)를 위해 의제(衣制)를 논하는 상소를 대신 짓기도 하였다. 안효제는 1893년에도 명성황후가 총애하던 진령군을 참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 상소문도 그가 대신 지은 것이었다.

장지연은 1890년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했는데 이때 민영규(閔泳奎)의 눈에 띄어 그의 문객이 되었다. 민영규는 민씨 척족(戚族)의 일원으로 당시 예조판서로 있었다. 그는 1894년 2월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입신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이때에도 민영규의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후원자였던 민영규가 실각하였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장지연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후 여러 정치적 사건에 문장가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제술하였으며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에는 이를 종묘사직에 고하는 고유문(告由文)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친 결과 1897년에는 사례소(史禮所)의 직원(直員)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사례소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국에 걸맞는 예법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었다. 그가 사례소에 발탁되는데 그의 후원자였던 민영규의 도움이 컸다. 민영규는 이 무렵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장지연은 사례소에서『대한예전(大韓禮典)』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유학자답게 대한제국 선포를 예법이라는 측면에서 뒷받침한 것이다. 당시 사례소에서 그와 함께 일한 동료로는 김택영(金澤榮)과 윤희구(尹喜求)를 들 수 있다. 김택영은 개성 출신의 학자로서 이건창(李建昌), 황현(黃玹) 등과 함께 당시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윤희구도 당시 문장가로 손꼽히던 인물로서 이후 장지연의 평생 지기가 되었으며 그가 사망한 후 묘갈명(墓碣銘: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 새긴 글)을 지을 정도였다

4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은 1899년 1월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초빙되는 것을 통해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당시 『시사총보』는 홍중섭(洪中燮)이란 인물이 사주 겸 발행인이었는데 사실상 황국협회의 기관지였다. 민씨 척족의 일원인 민영기(閔泳綺)가 이 신문의 후원자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논조는 보수적이고 친정부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장지연이 대한제국 선포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후원자가 민영규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시사총보』에 초빙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언론계 경력과 관련하여 그가 1898년 9월 『황성신문』이 창간할 당시부터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상 불투명한 점이 적지 않다. 그의 문집에 실린 연보에도 그가 『황성신문』에 참여한 시기가 창간 당시가 아닌 1899년 9월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나마 몇 달 만에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다. 순서도 『시사총보』에 초빙된 것이 『황성신문』의 주필이 된 것보다 먼저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박은식(朴殷植)의 경우도 창간 당시부터 『황성신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황성신문』에 실은 글은 1908년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장지연이 『황성신문』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은 1901년 주필과 사장에 연이어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그가 『황성신문』에서 행한 가장 큰 활약은 무엇보다도 「시일야방성대곡」을 지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설은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이 기사에 이어 「오조약청체전말(五條約請締顚末)」이란 제목의 보도기사를 함께 실어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이 논설이 게재된 신문이 배포된 11월 20일 오전 6시 30분 경찰대가 『황성신문』에 들이닥쳐 미처 배포되지 못한 신문 2,280부를 압수하고 인쇄기계 전부를 폐쇄 봉인하였다. 사장 장지연을 비롯한 직원 전원을 체포하였으며 『황성신문』에는 무기정간령을 내렸다.

장지연은 이듬해 1월말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이처럼 오랜 구금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논설로 말미암아 을사늑약 반대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을사늑약 반대운동의 기세가 꺾일 때까지 그를 붙잡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풀려날 때도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사람들과 함께 풀려났다. 그는 이렇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황성신문』의 사장직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5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사를 그만둔 후 국권회복을 위한 실천 활동에 직접 투신하였다. 그런데 그는 지방유생 출신이면서도 의병 항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문화적 방법을 통한 실력 양성을 도모하는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첫 번째 실천이 1906년 4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한 것이다.

대한자강회는 그가 윤효정(尹孝定), 심의성(沈宜性), 임진수(林珍洙), 김상범(金相範) 등과 힘을 합쳐 조직한 단체로 회장에는 윤치호(尹致昊)를 추대했으며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라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이 단체는 이준(李儁)과 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會)를 확대 개편한 것으로 신교육을 보급하고 산업을 일으켜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조직되었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8월 일부 회원이 고종양위에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벌인 탓에 강제 해산되었다.

장지연은 같은 해 11월 대한자강회 세력을 주축으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계열의 인사들까지 끌어들여 대한협회를 결성하였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를 사실상 계승하였는데 스스로 정당임을 자처하는 등 대한자강회에 비해서 정치적 성격이 보다 강하였다. 하지만 대한협회는 시간이 갈수록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09년 9월에는 이른바 삼파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일진회와의 연합까지 시도될 정도였다. 장지연은 일진회와의 연합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으며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한협회에서 탈퇴하고야 말았다. 대한자강회를 거쳐 대한협회로 이어지는 그의 애국계몽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의 고난은 여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08년 2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그곳 교민들이 세운 『해조신문(海朝新聞)』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국외에서 마음껏 필봉을 휘두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건너갔지만 『해조신문』이 6개월 만에 폐간되는 바람이 이러한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깊은 상처만 안은 채 중국 상해와 남경을 거쳐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9년 10월 지방에서 창간된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로 초빙되어 진주로 내려와 이곳에서 국망을 맞았다. 당시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유시를 게재한 탓에 『경남일보』마저 정간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6 전통문화를 갈무리하다

장지연은 언론인과 지사로서도 큰 활약을 하였지만 문화적으로도 그에 못지않는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마지막 세대의 유학자로서 무너지고 흩어지는 전통문화를 갈무리하는 것이 그가 맡은 시대적 사명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다.

그는 1900년 현채(玄采), 양재건(梁在謇) 등과 함께 이미 폐간된 『시사총보』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광문사(光文社)라는 출판사를 세웠으며 스스로 편집원이 되어 고전 편찬사업을 벌였다. 이것이 전통 문화를 갈무리하는 사업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광문사에서 간행한 고전으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아언각비(雅言覺非)』등 정약용(丁若鏞)의 저서들이었다. 장지연이 근기남인의 실학을 계승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직접 정약용의 저서를 선택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단순한 고전 간행을 넘어서 이를 손보고 다듬는 작업도 아울러 진행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현손(玄孫: 증손자의 아들)인 정규영(丁奎英)을 직접 찾아가 정약용의 저서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얻어 이를 증보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를 펴내기도 하였다. 그가 1906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찬위원을 맡았던 것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수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다루는 분야는 지리, 역사, 문학, 농학 등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는 『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와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 등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통문화를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과 『대동시선(大東詩選)』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전자는 조선의 유교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후자는 문학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 지식인의 마지막 세대가 전통문화를 마지막으로 자기 점검한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