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전명운

전명운[田明雲]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자 친일파 스티븐스를 쏘다

1884년(고종 21) ~ 1947년

전명운 대표 이미지

전명운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서울 종로통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다

전명운(田明雲)의 본관은 담양(潭陽)이고, 시조 경은파(耕隱派)의 제27세손이다. 『담양전씨대동보(潭陽田氏大同譜)』 권10과 그의 형 「전명선(田明善) 제적부」 를 보면 그는 1884년 6월 25일 아버지 전성근(田聖根, 1845~1900)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 사이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영선(永善), 호는 죽암(竹嵓)이다. 부인은 조순희(趙順姬, 1885~1929)와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족보를 보면, 그의 선조는 제24대부터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서울 종로 일대에 대대로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특히 그의 형 전명선이 가업을 이어 포목(布木)과 남도 죽물(竹物)을 취급하는 전(廛)을 경영한 것을 볼 때, 그의 집안은 상업으로 중산층 이상의 부를 누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서울 중산층 이상의 부와 서울 종로에서의 삶은 그에게도 일찍부터 근대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15~16세경 서울 종로에서는 때때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등 집회가 자주 열렸고, 청소년 시절, 이를 지켜본 그는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독립신문』을 통하여 유신사업” 에 일조하고자 하였다. 후일 이상설(李相卨)이 지은 『양의사 합전(兩義士 合傳)』에 의하면 전명운은 ‘학교당’에 가서 댕기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익혔다고 하며, 그의 나이 18세인 1902년 6월 2년제 관립 한성학원(漢城學院)에 다녔다고도 하는 연구가 있으나,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여하튼 전명운은 학교 졸업 후 형이 운영하는 포목상에서 일을 하던 중, 1902년 이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할 노동이민의 붐을 이루자, 그 역시 미국에서 유학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와이행을 선택하였다.

2 하와이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8월까지 약 7,200여 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하였다. 이 대열에 합류한 전명운은 당시 결혼한 몸이었다. 1903년 20세의 나이로 이민선 도릭(Doric)호를 타고 9월 21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도착 후 그는 오아후(Oahu)섬의 와일루아 모쿨레이아(Mokuleea) 농장에 배치되어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카우아이(Kauai)섬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을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등을 견딜 수 없었던 한인들은 보다 근무환경과 임금이 후한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전명운 역시 1904년 9월 23일 미국 서부지역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샌프란시스코는 1903년 9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친목회를 결성하여 하와이에서 건너온 한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동 주선과 숙소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이에 전명운도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부두노동, 철도공사장, 채소와 과자 행상, 공장 보일러실 등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렇듯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미국 본토로의 이주가 급증하자, 안창호는 1905년 4월 친목회를 해체하고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공립협회가 발족되자, 이 단체에 가입한 그는 토요일마다 공립협회 본부인 공립관(共立館)에서 개최되는 토론회에 참석하여 국권회복을 주제로 토론이나 연설 등을 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강제체결에 이어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구 한국군 해산 그리고 정미조약(丁未條約) 등의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을 강력히 전개하던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그 역시 매주 일요일 샌프란시스코한인청년회가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석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초 그가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유학이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노동으로는 원하는 학비를 벌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다시 큰돈을 벌기 위해 알래스카로 향하였다. 당시 알래스카의 어업은 일은 힘들어도 임금은 미국 본토보다 2배 이상을 상회하는 돈을 벌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일본인 감독 밑에서 어업 관련 일에 종사하던 그는 일본인 감독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하며 동포들의 임금을 대신 받아주는 등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알래스카의 어업노동을 주선하기 시작하였다.

3 ‘자유전쟁(自由戰爭)’으로 일환으로 스티븐스를 처단하다

알래스카 노동 주선을 준비하던 중이던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자 친일파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한국명 순지분須知分)가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가 미국에 건너온 이유는 당시 미국정부에서 추진하는 일빈인이민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한 것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상황을 시찰하기 위함이었다.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San Fransisco Chronicle)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한국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한국에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와 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과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와 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인을 환영한다.

이 기사가 샌프란시스코 각 신문에 실리자,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들은 스티븐스의 발언에 분노하며 합동으로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공동회에서 공립협회의 최정익(崔正益)·정재관(鄭在寬), 대동보국회의 문양목(文讓穆)·이학현(李學鉉) 4인을 대표로 선정하여 이들을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호텔(Fairmont Hotel)로 파견하였다. 이들 4인은 스티븐스를 방문, 관련 기사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부하면서 “한국에 이완용(李完用) 같은 충신과 이등(伊藤)과 같은 통감(統監)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오 동양의 큰 행운이라”고 하면서 “태황제(太皇帝: 고종을 말함)는 실덕(失德)이 태심(太甚: 매우 심함)하고 완고당(頑固黨)이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즉 일본에서 강탈하지 아니하면 러시아에게 빼앗겼을 터이라”고 하였다.

스티븐스의 발언에 격분한 대표단 4인은 스티븐스를 구타한 후 공립관으로 돌아와 사건전말을 보고하였다. 이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중, 공립협회 회원이던 전명운은 “그놈을 죽일 수는 도저히 없으니 내가 죽이겠다”고 자원하였고 양회에서는 대책을 약속하고 산회하였다.

3월 23일 9시 30분.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 일본영사와 함께 도착하자, 미리 권총을 준비해 기다리던 그는 스티븐스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불발되었다. 이에 스티븐스에게 달려가 얼굴을 가격하고 격투를 벌이던 중, 이를 지켜보던 장인환은 연달아 세 발을 총을 쏘았다. 그중 첫 발은 그의 어깨를,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를 명중하였다. 이때 순찰 중이던 미국 경찰에 의해 그와 장인환은 체포되어 병원으로 연행되었다. 병원에서 응급치료 후 다시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아 거의 완쾌되어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3월 27일 병상에서 그는 ‘살인미수’로, 장인환은 ‘일급모살’ 혐의로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다. 그는 몇 번의 연기 끝에 6월 두 차례의 예심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다만, 장인환은 12월 23일 25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공립협회는 스티븐스 처단 사건을 “장·전 양씨의 스테분을 포격(砲擊)함은 곧 자유전쟁”이라고 하면서 의열투쟁을 곧 ‘자유전쟁’으로 규정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의 의병전쟁은 다시 활기를 띠면서 의열투쟁이 곧 독립전쟁의 일환임을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4 미국에서 러시아로,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다

1908년 6월 보석으로 풀려난 후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 등으로 맥 필드(Mack Fields)로 개명한 그는 8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미국 동부로 갔다. 이유는 변호사가 아직 남아 있는 장인환 재판을 위해서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동부에서 그는 다시 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10월 초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한편, 공립협회는 출발 당시 그를 공립협회 특파원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공립협회에서 파견한 특파원 이강(李剛)이 『해조신문』에서 활동하면서 공립협회 지회 설립에 노력하던 중이었다. 따라서 전명운의 특파원 파견은 이강을 도와 공립협회 지회 설립을 마무리하도록 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도착하자,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처이자 숙소를 제공하던 이치권(李致權)의 여관에 머무르면서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조직인 동의회(同義會)에서도 활동하였다. 동의회는 안중근(安重根)·정순만(鄭淳萬)·엄인섭(嚴仁燮)을 비롯한 청년 10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들과 교류하면서 항일투쟁방법을 논의하였다. 특히 안중근과는 상당한 교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강을 비롯한 그의 노력으로 1909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공립협회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10월경 그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대서양을 건너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1909년 2월 미주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국민회(國民會)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도착 후 뉴욕에서 노동으로 생활하면서 그는 이전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임원이었던 방사겸(方四兼)·방화중(邦化重) 등을 자주 만나기도 하였다.

평범한 생활로 돌아온 그는 뉴욕에서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 농장지대인 맨티카( Manteca)지방에 정착하면서 세탁업을 하였다.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때 그는 한국에 있던 부인과 함께 생활하였다. 1917년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 실업부원을 거쳐 1918년 12월에는 맨티카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1월 장인환이 가출옥(假出獄)하자,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장인환을 만나 옥고를 위로하였다. 또한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지방회장으로서 맨티카를 비롯한 인근의 스탁톤·투례시 등지의 한인들을 소집하여 대대적인 축하회를 개최하고 취지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 그는 거금 50달러에 달하는 독립의연금을 내는 등 독립운동 후원에 열성적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윌로우스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윌로우스에는 1920년대 당시 3,300에이커의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김종림(金鍾林)을 비롯하여 임준기(林俊基) 등이 살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한인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주선과 여관업을 했다. 1919년 2월부터 그는 윌로우스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일상인으로서 지내던 그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29년 2월 장남 영덕(泳德: 큰형 전명선의 아들로 입양)이 사망한 데 이어, 한 달 뒤에는 그의 아내마저 사망하였다. 이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거치를 옮긴 그는 세탁소 세탁부로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고자 하였으나, 경제적으로 극심한 곤란에 빠지자,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935년 봄, 전명운은 아들 알프레드와 경숙(慶淑)·경령(慶怜) 등 두 딸을 집으로 데려와 다시 생활하였으나 알프레드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1937년 가을 세탁노동을 그만둔 후, 철도 건널목 간수가 되었다. 이즈음 큰 딸 경숙은 후일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한 미국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 출신의 이태모와 결혼하였다.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자, 그는 전시봉사회를 조직하여 자금 마련 활동을 하는 한편, 한인국방경위대(Korean Brigade)에 참여하였다. 맹호군으로 불렸던 한인경위대는 그해 12월 29일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훈련을 시작하였다. 당시 57세 고령의 나이에도 그가 한인경위대에 참여한 이유는 노년이나마 항일전쟁에 참여하여 연합국 승전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944년 6월 25일 환갑을 맞이한 그는 해방된 지 2년 뒤인 1947년 11월 18일 로스앤젤레스 노인아파트에서 홀로 살다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여 캔버리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94년 4월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