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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全琫準]

동학농민운동의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1855년(철종 6) ~ 1895년(고종 32)

전봉준 대표 이미지

전봉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 개요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1893년 고부 민란을 주도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 총대장으로 활동한 농민군의 최고 지도자이다.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부패한 집권 세력과 외세를 척결하고 임금과 백성이 함께 다스리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조직의 분열과 화력의 열세로 동학농민운동이 패배한 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2 출생과 성장, 금구 집회

전봉준은 1855년 전북 고창의 당촌마을에서 몰락한 시골 양반인 천안 전씨(天安全氏)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창혁은 마을에서 훈장을 하고 선비로 자처했지만, 적어도 6대 조 이내에는 초시에조차 합격한 조상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창혁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천하의 길지를 찾아 유랑했기 때문에, 전봉준도 전주, 태인 황새마을(18세까지), 고부(현 정읍) 지금실 마을(25세까지)을 거쳐 다시 태인, 고부 등지를 전전했고, 마지막으로 고부군 조소리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할 때까지 살았다. 장성한 전봉준도 생계를 위해 훈장뿐 아니라 때로는 풍수쟁이, 약장수 노릇을 했고 편지를 대필하기도 했다. 경작하는 논은 세 마지기에 불과하여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는 처지로 수탈 당할 물건도 없는 형편이었던 것인데, 이러한 경험이 양반의 후예이면서도 농민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또한 민중들이 의지하던 풍수, 방술(方術) 및 점복에 능했던 것도 민심을 얻은 이유였다.

한편, 유랑 생활은 그가 나중에 동학농민운동을 함께 할 사람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20대 때 금산, 태인, 고부에서 김덕명(金德明), 김개남(金開南), 송희옥(宋喜玉)을, 또 30대 때에는 태인과 고부에서 최경선(崔景善), 손화중(孫華仲), 손여옥(孫如玉), 서장옥(徐璋玉), 황하일(黃河一) 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봉준도 1890년대 초 황하일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2년 동학의 조직 개편 때에는 전북 고부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봉준은 동학의 종교로서의 측면보다는 세속적이고 개혁적인 성격에 더욱 마음을 두었던 듯하다. 1892년 말부터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 무위로 돌아간 후, 동학 지도층은 대중적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1893년 3월 전국의 교도들에게 충북 보은에 집합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2만 여명의 교도가 보은에 모인 가운데, 서장옥, 손화중, 전봉준(=김봉집) 등의 주도로 전라도의 교도들은 전북 금구에서 따로 집회를 연 것이다. 이들은 무기와 식량을 모으고 보은에 모인 교도들과 합세해 서울로 올라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양자가 서로 무관했던 것은 아니지만, 동학 조직 중 전라도의 남접은 교조신원운동에 머무른 중앙 교단과 달리 집회를 농민 봉기로 변화시킬 분위기가 충분했다.

3 고부 민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과 고부의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대항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후일 체포된 후 전봉준은 조병갑이 만석보의 축조 및 부친 조규순의 송덕비 건립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노동력과 비용을 부담시켰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과도한 세금 징수, 협박 및 무고, 비리와 착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혹은 전봉준의 부친도 조병갑에게 탐학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다가 맞아 죽었다는 설도 전한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무장 봉기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1893년 11월부터 전봉준과 농민들은 조병갑 또는 전주 감사에게 폐정의 시정을 호소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그 과정에서 1893년 11월에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 점령, 조병갑 처형, 탐관오리 처단, 전주성 점령, 서울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지만,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출되어 유보했던 것인데, 그가 1894년 1월 9일 고부 군수로 재임용되자 행동에 나선 것이다.

20명의 사발통문 서명자 중 전봉준, 최경선, 김도삼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은 1월 10일 이평의 말목장터를 출발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했지만, 조병갑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정부에서도 2월 15일에 전주 감사와 조병갑의 책임을 묻고, 조병갑을 체포 수감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박원명을 신임 군수로 임명하는 한편,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고종도 민란의 원인은 탐학한 관리가 백성을 침탈한 데 있다고 보고 관리들을 시찰하게 하는 훈유문(訓諭文)을 내렸고, 박원명도 3월 초 농민들에게 죄를 용서하니 집으로 돌아가서 생업에 힘쓰라고 권유했다. 전봉준은 2월 20일경 봉기를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하고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취지로 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각지에 보내고 함열의 조창(漕倉: 세곡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곳집)을 습격해 전운영(轉運營)을 혁파할 것을 촉구했지만, 지역 경계를 넘으면 반란이 됨을 우려한 농민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1894년 3월 3일 박원명의 회유와 설득을 믿고 해산하였다.

4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 ‘보국안민(輔國安民)’, ‘관민상화(官民相和)’

고부 민란이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더 큰 봉기로 이어진 것은 뒤늦게 도착한 안핵사 이용태가 박원명의 수습책들을 무시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처벌했을 뿐 아니라, 민란에 동학교도가 다수 참여했다는 이유로 무관한 교도들까지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고부 민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무장의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까지도 호응하여 1894년 3월 20일 손화중의 거점인 무장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봉기 당시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여 거병의 목적이 ‘보국안민’임을 밝혔다. 임금은 선정을 펼칠 자질이 있으나 신하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도탄에 빠져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고, 농민군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유교적 이념인 보국안민을 기치로, 일차적으로는 전라도의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나아가 중앙의 정치 개혁까지 요구함으로써, ‘민란’의 지역성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에 농민군은 무장에서 고부, 백산을 거쳐 황토현 전투와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4월 27일에는 감영이 있는 전주성까지 함락시켰다. 하지만 포고문에도 드러나듯이, 전봉준은 폐정의 근원을 탐관오리들로 보았을 뿐 조선 왕조를 전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에 지방군과는 싸우되 초토사(招討使)로서 국왕이 보낸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과는 전투를 회피하고, 도리어 홍계훈이 국왕의 백성들을 탄압하고 경기전(慶基殿)까지 파괴한다며 비판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전봉준이었기에, 전투 과정에서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데다 정부가 청나라에 농민군을 진압할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음을 알자 5월 8일 전주화약을 맺고 철병하였다. 화약의 조건은 농민군은 해산하고 정부는 이들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농민군의 요구는 삼정(三政)의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외국 상인의 상거래를 개항장에 한정하는 한편, 체포된 동학교도들을 석방하고 대원군의 섭정을 시행하라는 것 등이었다.

또한 전라도 지역의 치안과 행정의 마비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은 전봉준과 협의하여, 전라도 53개 군현에 농민군 지도자가 읍정을 시행하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다. 집강소를 통해 동학농민군은 지역의 봉건적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개혁하고자 했고,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근거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중심으로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이처럼 전봉준은 관과 민이 서로 화합하는 ‘관민상화’를 전제로 지역 차원의 정치경제적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보국안민’을 실현하려 했지만, 조선 왕조의 전복까지 생각하던 김개남은 집강소의 설치를 거부하는 남원을 무력으로 점령한 후 바로 재봉기를 준비했다.

5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척왜척화(斥倭斥華)’의 실패와 처형

조선 정부는 전주성이 함락된 직후인 4월 말 정식으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은 즉시 군대를 파견했고, 일본 또한 이를 천진조약(1885) 위반으로 간주하여 조선 정부의 뜻에 반해 군대를 파병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6월 17일에 청과의 전쟁을 결정하고, 전쟁의 편의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21일에 군사력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한 후 조선 정부에 각종 근대적 개혁을 강요하니, 이것이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이 궁궐을 범했다는 소식을 7월 남원에서 처음 들었지만, 일단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김개남에게는 “지금 시세를 보건대 일본과 청나라가 계속 싸우고 있지만 한쪽이 승리하면 반드시 군대를 옮겨 먼저 우리를 칠 것이다. 우리는 비록 인원수는 많지만 오합지졸이어서 쉽게 무너져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라며, 귀화한다는 명분으로 사방에 흩어져 변화를 지켜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7월 말에서 8월 초경 불타버린 고부 조소리의 옛집 대신 태인 동골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후처를 맞아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섣부른 행동으로 임금과 왕조의 안위까지 위협하기보다는 우선 집강소를 통한 개혁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7~8월에는 삼남 각 지역에서 일본을 몰아내자는 ‘척왜(斥倭)’ 봉기가 일어났고, 농민군의 체제를 개편하고 무장력을 강화하던 남원 김개남의 휘하에는 전라좌도 일대에서 7만 여명의 농민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에 전봉준도 9월 8일경에는 식량이나 전투에 필요한 물품들을 확보하기 시작하는 등 재봉기 준비에 착수했다. 이러한 태도 변화에는 8월 말 남원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주야 8일간에 걸친 비밀회의를 한 것과, 이 무렵 삼남 각처의 양반,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 같이 일어나 종묘사직을 위협하는 일본군과 그와 결탁한 개화파를 치라는 취지의 대원군의 밀지가 전달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후일 재판 과정에서도 전봉준은 다시 봉기한 이유에 대해, “일본이 개화라 칭하면서 처음부터 일언반구도 민간에 전하지 않고 또 격서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깨고 쳐들어가 주상을 놀라게 하였기로,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강개함을 이기지 못해 군대를 규합하여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일차로 묻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94년 10월 12일 농민군은 ‘척왜’를 기치로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를 일으키고 삼례를 출발하여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봉기가 늦어진 이유는 농민들의 수확 마감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지만, 전봉준은 그 사이 ‘충의지사(忠義之士)’라면 ‘의병’ 궐기하여 “조선의 국토를 침략하려는” 일본을 몰아내자는 통문을 전국 각지에 보내 동조자를 구했다. 마침내 봉기에 소극적이던 동학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승인도 얻어, 봉기 시점에는 손병희(孫秉熙)가 이끄는 북접의 농민군도 전봉준의 부대와 합류함으로써, 2차 봉기에는 전라·충청 일대의 농민군이 총동원되었다. 이중에서 주력 부대인 전봉준과 손병희는 북상하고, 김개남은 북상군의 거점지인 전주에 남아 뒤를 대비하며, 손화중과 최경선은 후방을 수비하는 형태의 작전이었다.

주력 부대는 10월 23일에 충남 공주에 도착하여, 10월 말에 1차 전투, 11월 초에 2차 전투를 벌였지만, 결과는 농민군의 대패였다. 관군·일본군·민보군의 연합세력은 수적으로는 농민군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훈련된 군대와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이미 9월의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의 승리로 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후였기 때문에, 농민군 진압에 집중할 수 있었고 갑오개혁 정권의 군대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전봉준은 후방 부대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지만 결국 11월 11일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궤멸되었다. 이미 임금인 고종까지 “모두를 토벌하지 않고서는 악을 징계할 수 없다”며 “가는 곳마다 적을 쓸어버리되 그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 이겨 추종한 자들은 풀어주라”고 강경 진압을 명한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토벌 전담부대를 편성하여 관군과 함께 초토화 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하지만 전봉준은 이를 고종과 관군의 본심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금치에서 패한 직후인 11월 12일, 관군에게 이후 절대 서로 싸우지 말고 위로는 나라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을 평안하게 하자고 제안하는 한편, 일반 민들에까지 골육상쟁을 멈추고 척왜척화(斥倭斥華)하여 조선이 왜국(倭國)이 되지 않도록 협력해줄 것을 한글로 호소하였다. 또한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도 반일의 의리를 따져 지원을 요청했지만, 모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군은 11월 말 원평·태인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해산했다.

이후 관군에 쫓기던 전봉준은 전남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12월 2일에는 순창 피노리에 도착했다. 태인에 머무르고 있던 김개남을 찾아가던 도중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순창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의 고발로 주막에서 저녁을 먹던 중 체포되었다. 이 보고를 들은 일본이 체포된 농민군 지도자들을 일본군에 넘기도록 조선 정부에 요구했기 때문에, 순창 관아에 수감되어 있던 전봉준도 일본군에 인계되어 초토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로 이송되었다. 체포 당시 입은 부상이 커서 그곳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역시 1895년 1월 6일에 체포되어 온 손화중이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으로 자칭하자, 전봉준은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라며 사람을 잘못 보고 거사를 도모해서 일을 그르쳤다고 질책했다. 전봉준은 관리들을 보고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라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꾸짖으며 끝까지 당당했던 것이다.

다시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어,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에서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재판을 받고 3월 29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 근거는 고부 민란에서부터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에까지 이르는 일들로, 이러한 사실이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 중 ‘군복기마(軍服騎馬)로 관문(官門)에 변을 일으킨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수한다’는 조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판결문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전봉준이 군사를 일으킨 이유는 조병갑의 학정, 이용태의 동학교도 살육에 대응하기 위해, 혹은 궁궐까지 침탈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판결은 그날로 국왕의 재가를 얻어, 1895년 3월 30일 새벽, 전봉준은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환 등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전봉준은 일본 영사관에서 조사받던 중,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하고 간사한 관리를 축출하여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 사람 중심이 되는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자신들은 고향에 돌아가 농사에 종사할 생각이었고, 이때 “국사를 모두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력하여 합의법에 의해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군주를 부정하지 않지만 대원군 등 절대 권력자의 옹립도 인정하지 않고, 일반 농민들의 의견이 중앙에 직접 반영되는 새로운 합의제 정치권력 하에서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칭을 얻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생겨난 민요들은 지금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녹두야 녹두야 전녹두야/ 그 많은 군사 엇다 두고/ 쑥대밭에 낮잠 자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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