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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崔麟]

민족 대표 및 천도교 민족 운동의 실세에서 대표적 친일파로

1878년(고종 15) ~ 1958년

최린 대표 이미지

최린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성장과정과 일본유학

일제하 천도교의 최고 실력자이자, 천도교를 친일세력으로 이끈 최린(崔麟)은 1878년 1월 25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에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낸 덕언(德彦)과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고우(古友)였고, 천도교 입교한 후에는 도호는 여암(如庵)이라고 하였다. 일본명은 가야마 린(佳山麟)이다. 최린은 천도교 핵심인물로 알려졌지만, 처음부터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한학자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901년부터 서울에서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의 망명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된 ‘활빈당(活貧黨) ’, ‘일심회(一心會) ’ 등에 관여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두 단체는 망명개화파 세력의 정권탈취 음모와 연결된 단체로서, 단체의 몇몇 인물은 대역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지만, 최린은 깊숙이 관여하지 않은 탓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최린이 근대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중앙정계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일본유학이었다. 1903년 서울에서 입신양명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서울로 떠난 최린은 1년 후인 1904년 10월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으며 1909년 9월 귀국할 때까지 5년간 유학하였다.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50명 중 한명이었던 최린은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여, 1906년 9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률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유학기간의 최린은 반일성향이 강한 유학생이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과 조선유학생을 열등하다고 무시하는 교장 가쓰라 토모(勝浦鞆雄)의 발언을 문제 삼아 동맹휴교를 주도하였고, 1906년에는 국화인형전시장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허리를 굽힌 조선왕의 인형이 전시되자, 학생들과 전시장을 습격하여 인형 전부를 파괴하였다. 또한 1907년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일본학생이 ‘한국왕’을 일본민족인 화족(和族)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자 유학생들과 학감을 방문하고, 문제학생의 퇴학을 요구하여 학교 측의 사죄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건들은 본국에도 알려진 일본유학생들의 대표적인 반일활동이었다.

최린은 유학생단체의 조직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유학기간 5년 동안 광무학회(光武學會),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태극학회(太極學會), 대한학회(大韓學會), 그리고 유학생단체의 통합체였던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의 핵심간부였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대한유학생회와 대한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대한흥학회에서는 부회장을 맡았다. 일본유학생들이 증가하며, 지연과 학연, 유학경로에 따라 각종 학회가 난립하자, 유학생 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 태극학회를 탈퇴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고, 유학생들의 통합경험이 귀국 후에도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최린의 생각이었다.

최린은 유학기간을 통해 반일성향의 유학생단체 핵심인물로 활동하였지만, 그의 현실인식은 복잡하였다. 최린은 유학생들이 출세만을 위해 공부하는 것을 비판하고, 대한제국의 중흥을 위해 헌신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 우리 민족이 합심한다면 자유독립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크게 실망하기도 하였다. 많은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민족의 단결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고 근대국가로 도약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사회의 주체적 여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 천도교 입교와 민족운동

한편 최린은 유학기간에 천도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최린이 동학농민전쟁 이후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와 처음 만난 것은 일심회(一心會) 사건을 피해 잠시 일본에 건너간 1902년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손병희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05년이었다. 손병희는 황실유학생으로 제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린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였고, 1909년 9월 귀국 후 방랑생활을 하던 최린은 자신의 활동기반을 찾아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국가를 상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사회활동을 기대할 수 있는 조직은 종교조직밖에 없다고 판단하였고, 손병희와의 친분,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등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기대, 천도교의 위상 등을 고려하였다. 1910년 10월 손병희를 직접 찾아간 최린은 10월 25일 입교식을 통해 정식 천도교인이 되었다. 천도교에 입교한 최린은 보성학교 인수문제를 처리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천도교의 학교인수를 반대하는 학생들을 설득하여 보성학교 인수를 성사시켰고, 그 공로로 보성중학교와 보성소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보성학교 교장으로 교단에서 입지를 확보한 최린은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교단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최린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18년 말, 민족자결주의와 피식민지국가의 독립문제가 대두되자 교단의 원로였던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과 상의하여 한국자결을 위해 운동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때 구상은 행정권을 확보하여 조선자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연해주와 상해의 한인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자 자치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교주인 손병희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1월, 2월에 걸쳐 독립선언서 작성, 발표, 인쇄, 시위계획, 대표선정 등의 작업에 모두 간여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계 사이의 협의를 주도한 것도 최린이었다. 특히 그는 독립청원이 아닌 독립선언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최린은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고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의 위상은 천도교의 중진이자, 3·1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공고해졌다.

최린은 3년형을 받았지만, 1921년 12월 가출옥하였다. 총독의 정치자문을 맡고 있던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가 그의 가출옥을 주선하였다. 아베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천도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필요한 신세력을 조직하는 데 최린이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가출옥한 최린은 곧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하였다.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거센 탄압과 1922년 손병희의 사망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교인과 재정이 급속히 감소하였고, 손병희 사후 지도체제를 둘러싸고 내부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중앙집권적 체제의 혁신을 요구하는 세력과 교주 중심의 구체제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며, 결국 1925년에는 혁신파(신파)와 비혁신파(구파)로 분열하였다. 최린은 이 과정에서 천도교단의 서무과, 교육과 주임(1922년)을 시작으로 종리사(1923년), 종법사(1925년)를 거쳐, 1928년에 최고위직인 도령(道領)에 선임되었다. 다수파인 신파의 최고지도자가 바로 최린이었다. 이는 자신의 출신지역이기도 한 서북파의 절대적 지지 속에 지역조직을 입교자 중심의 포덕제로 전환하고, 천도교 청년당, 조선농민사 등 대중조직을 설립하며 조직기반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3 자치운동과 친일행적

손병희의 뒤를 이어 천도교 최고 실력자가 된 최린은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크게 활성화 되었지만, 자치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 최린은 자치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몰두하였다. 1923년,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계를 비롯한 다양한 세력들을 끌어들여 자치운동을 추진하였고, 조선사회의 반발로 두 차례의 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에 건너가 일본정계인사를 상대로 자치운동을 시도하였다. 조선민족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을 반성하고, 정신적으로 각성하여, 교육을 받고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실력양성 ’이 필요하다는 입장 속에, ‘자치제만이 일제의 조선정책을 꾸준히 비판하고 민족의 최대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하고, 천도교 중심의 정치적 통합체를 구축하여, 일제와 타협하는 조선자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자치운동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1927년 6월에서 1928년 4월까지 1년 여간 미국과 유럽으로 외유를 다녀 온 최린은 자치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앞으로 조선민족의 진로는 자치밖에 없으며’, ‘천도교청년당원들에게 자치의식을 고취시키고 신파 전체를 자치운동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 최린의 입장이었다. 제네바 전권대사로 총독직을 떠났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1930년 재부임하자 최린은 본격적으로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송진우(宋鎭禹), 이정섭(李晶燮) 등 민족주의계열의 자치론자들을 비롯하여 서정희(徐廷禧), 송봉우(宋奉瑀) 등 사회주의자 일부와도 비밀리에 접촉하며 의견을 교환하였다. 또한 천도교세력 전체를 자치운동에 포섭하기 위해 천도교 구파에 교권을 대폭 양보하며, 천도교 구파와 합동하였다. 이는 1920년대 중반부터 내부적으로 자치제를 검토하고 있던 사이토 총독에 의해 자치제가 곧 실현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린의 자치운동은 최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와 달리 조선통치체제 개편방향이 조선자치제가 아닌 지방자치제도의 부분개정으로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와 조선민족을 위해 최선의 타협책이라고 생각했던 자치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자, 최린은 그나마의 민족적 입장도 포기하고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산업, 교육 등 당면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제거한 당면이익획득운동을 전개하던 최린은,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며 본격적인 친일행보를 개시하였다. 1934년 8월 30일 내선일가(內鮮一家)에 입각한 정신, 생활개선운동 단체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고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36년 11월에는 시중회 대표로 조선인의 징병을 청원하였다. 또 1938년 5월 시중회 대표로 지원병제도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8년 4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특히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에 선임되어 조선인의 전쟁동원을 앞장서서 독려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수많은 조선인 명망인사들이 변절하여 친일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최린은 그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조선인의 전쟁참여, 징병을 주장한 최린의 논리는 조선민족이 아닌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시에 있어서는 오로지 전쟁승리를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며, 개인과 국가소유를 막론하고 모두 전쟁을 위해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천도교의 정신은 국가에 봉사하는데 있으며, 천도교인들은 일본국민으로서 진심진력해야 한다’고 독려하였다. 한때 민족대표의 일원이었으나, 조선민족이 스스로의 독립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 속에, ‘직접 생명, 그 피를 바치고’, ‘국가에 대한 최대의 의무’를 실행하여, ‘내선차별철폐, 참정권 등의 온갖 문화상, 정치상 권리와 은혜’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조선 최고위의 친일인사였던 최린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1949년 1월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특경대원에 의해 성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동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납치되어, 요양소를 전전하다 1958년 12월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반민특위에서 최린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자신의 ‘친일행위’를 시인하며, 다만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면 했을까요’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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