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최익현

최익현[崔益鉉]

위정척사론을 펼친 조선의 문신, 74세에 의병을 일으키다

1833년(순조 33) ~ 1906년(고종 43)

최익현 대표 이미지

최익현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최익현(崔益鉉)의 호는 면암(勉菴), 자는 찬겸(贊謙)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다양한 관직을 거쳤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잘못된 정치를 정면 비판하였고,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 소식에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리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는 행보로 수차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단행된 의제(衣制)개혁과 단발령 등 일련의 개혁 조치에 대하여 상소를 통해 강경한 반대의 뜻을 천명함으로써 유생을 비롯한 보수 세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상소를 통해 시국의 폐단을 지적하고,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관점에서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첫 전투에서 패하여 체포당하였다. 쓰시마(對馬島)에서의 투옥 생활 중 풍토병을 얻어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은 개항 이후 항일의병운동과 일제시대 독립투쟁의 이념으로 계승되었다.

2 초기의 활동

최익현은 1833년(순조 33) 경기도 포천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慶州崔氏) 대(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6년(헌종 2) 최익현의 아버지 최대는 가족과 충청도 단양으로 이주하였고, 최익현은 9세가 되던 해 김기현(金琦鉉)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1843년(헌종 9) 최대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양근군 후곡(오늘날의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으로 이주한다. 이로부터 3년 뒤, 최익현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인근의 벽계(오늘날의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서 학문을 닦고 연구하고 있던 이항로의 제자가 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은 이항로의 아들인 이준(李埈)과 이복(李墣)을 비롯하여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그리고 유인석(柳麟錫) 등과 동문의 연을 맺게 되었다.

최익현은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다. 이항로 또한 최익현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존심명리(存心明理: 마음을 간직하고 이치를 밝힘), 낙경민직(洛敬閩直)과 같은 경구를 써주면서 격려하곤 하였다. 또한 이항로는 최익현이 15세 되던 해 면암(勉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두 글자를 주어 호로 삼도록 하였다.

최익현은 23세 되던 1855년(철종 6) 과거에 합격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경력을 시작한 최익현은 이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친다. 30세 되던 1862년(철종 13) 최익현은 신창현감(新昌縣監)으로 부임하는데, 이듬해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가 부당하게 백성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하자 이에 항의하다가 사직하였다. 최익현은 32세 되던 1864년(고종 1) 다시 벼슬길에 나와 예조좌랑(禮曹佐郎),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3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1868년(고종 5) 탈상 후 한 달 만인 9월에 최익현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임명된다. 이에 최익현은 대간(臺諫)으로서의 직무를 즉시 수행하여 당대의 4가지 폐단에 대하여 논하는 시폐4조소(時弊四條疏)를 상소했다. 최익현은 이 상소를 통해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사업의 중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高宗)의 섭정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흥선대원군은 다른 감찰 임무를 맡은 대간(臺諫)들을 움직여 최익현을 탄핵했다. 이에 최익현은 즉시 사직하고 물러났지만, 이 사건은 앞으로 이어질 흥선대원군과 최익현의 긴 악연의 시작일 뿐이었다.

1870년(고종 7)에 고종은 다시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의 직을 제수하는데, 최익현은 부임 후 오래지 않아 다시 물러났다. 2년 뒤인 1872년(고종 9) 최익현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지만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873년(고종 10) 10월 고종은 앞서 최익현이 시폐4조소에서 거론하였던 사대문세(四大門稅)를 폐지하고 다시 그에게 동부승지의 직을 제수하였다. 최익현은 임명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사직 상소를 올리며, 당대의 시국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고종 즉위 후 10년간 이어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총체적 실패였다는 최익현의 평가에 대원군은 격분했다. 좌의정, 우의정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사직을 청하면서 최익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최익현을 두둔하면서 최익현을 탄핵한 자들에게 감봉, 파직뿐 아니라 귀양을 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고, 최익현에게는 동부승지보다 더 높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제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익현은 다시 호조참판의 직을 사양하면서 상소를 올려 당대의 폐단과 흥선대원군을 비판했다. 비판의 강도를 더욱 높인 최익현의 상소에 대하여 여러 대신들은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하는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며 엄벌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한 데에서 고종의 뜻은 명백히 드러난 것이었다.

고종은 이 상소에 자신을 핍박하는 어구가 많으니 실로 해괴하다고 하면서 최익현을 잡아다 감시하도록 하였다. 이어 고종은 최익현에 대한 추국을 실시하고, 처형 건의에도 불구하고 최익현을 제주도에 유배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두 차례의 상소를 통해 최익현은 제주도에 유배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친정(親政)을 선포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였으니 결국 뜻한 바를 이룬 셈이다. 최익현의 유배는 1875년(고종 12) 3월에 풀렸는데, 고종은 이에 앞서 최익현이 건의한 대로 청나라 돈의 사용을 금지하고 만동묘(萬東廟)를 복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4 도끼를 품고 올린 개항반대 상소

1875년(고종 12) 운요호사건을 기점으로 일본이 무력으로 개항을 강요하자, 조정 내에서는 본격적으로 개항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분개한 지방 유생들은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들, 즉 화서학파(華西學派)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개항반대 상소운동을 벌였다. 김평묵과 유중교, 유인석, 홍재구(洪在龜) 등을 주축으로 한 유생들은 연명상소(聯名上疏)를 논의하여, 이듬해 1월 홍재구를 대표자(疏頭)로 연명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조정의 논의는 개항으로 기울고 있었다.

포천에서 머물고 있던 최익현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였다. 1월 19일에 한양에 들어온 최익현은 상소문을 작성하여 3일 뒤인 1월 22일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아가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를 매우 불쾌히 여겨 의금부에 명하여 최익현을 잡아들이도록 하였고, 여러 대신들도 상소의 과격한 방식과 방자한 내용을 비난하여 최익현을 엄벌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최익현을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캐내자는 것부터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다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비난, 임금을 시해할 뜻을 품었다는 무장(無將)죄나 불경(不敬)죄를 지었으니 극형에 처하라는 등 최익현을 탄핵하는 무수한 상소가 올라왔으나, 고종은 그를 흑산도에 유배하는 것으로 논죄를 마무리하였다.

최익현은 그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흑산도로 향했다. 흑산도에서의 유배생활은 3년간 계속되었다. 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집에 돌아와 부친을 봉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최익현의 유배가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평묵이 칠언율시 3수를 지어 보냈는데, 그 뜻은 이제 당대 사건인 시사(時事)를 논하지 말고 세상을 피해 은거(隱居)하라는 것이었다.

김평묵의 권유를 따랐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흑산도에서 돌아온 이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는 1895년(고종 32)까지 약 20년 간 최익현의 대외적인 활동은 크게 줄어들었다. 최익현은 이 시기 금강산, 마니산 등을 유람하기도 하였고, 1887년(고종 25)에는 부친의 사망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또한 아들 최영조(崔永祚)와 함께 스승 이항로의 문집을 필사하거나 동문인 유중교 등과 편지로 토론하는 등 학문에도 힘썼다.

5 침묵을 깨고 위정척사론을 펼침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과 이듬해의 을미사변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격랑 앞에서, 최익현은 그동안 지속하던 은거생활을 포기한다. 최익현이 오랜 침묵을 깬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의제개혁과 단발령의 선포였다.

갑오개혁과 함께 실세로 등장한 박영효(朴泳孝) 등은 의복제도의 개혁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개혁이란 예부터 내려온 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이자, 반상(班常)의 구분을 기초로 하는 신분사회질서를 붕괴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이 반발하여 의제개혁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처럼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박영효 일당이 실각하고 김홍집(金弘集)이 정권을 잡게 되자,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일본으로 도주한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사들을 처벌할 것과 옛 의제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국은 더욱 혼란해져 8월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었다. 이어서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유생들은 크게 반발하여 유인석 등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홍집 정권은 유생들의 존경을 받던 최익현의 상투를 잘라 투쟁의 구심점을 제거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회유와 압박에도 최익현은 상투 자르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왕명 위반을 이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최익현이 투옥된 지 한 달여 만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사되어, 김홍집은 실각하였고 최익현도 석방되었다. 이어 고종은 최익현을 의병에게 임금의 뜻을 알리는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하여 을미의병을 해산하도록 하였는데, 최익현은 두 차례 상소를 올려 이를 거부하였고 고종은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다시 낙향하여 포천에 머물고 있던 최익현은 1898년(고종 35) 10월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에 임명되는데, 이때에도 상소를 올려 사직의 뜻을 표하였다. 이 상소에서 최익현은 고종의 실정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오늘날 국운이 이토록 기운 것은 근본적으로 고종의 책임이라고 준엄한 질타를 가하였다. 그럼에도 고종은 최익현의 사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최익현은 재차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시급히 처리해야 할 12가지 일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의정부찬정에 이어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도 임명되었지만 역시 두 차례 상소를 올려 사임하였다. 특히 두 번째 상소에서 최익현은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군주를 황제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사직 후 낙향한 최익현은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거나 강학을 하면서 다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6 상소투쟁과 항일의병투쟁

1904년(고종 41) 최익현은 다시 궁내부특진관과 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는데, 4차례에 걸쳐 사직소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고종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여 국난을 극복할 5가지 방안을 건의했다. 고종이 이러한 건의를 수용하지 않자 최익현은 이후 4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최익현은 이 상소를 통해 고종에게 5개조의 방안 수용과 일제로부터의 차관 도입 중단, 국가기강 확립을 요구하였으나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익현의 3차례의 상소를 모두 수용하지 않았던 고종은 이번에는 최익현에게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제수하였다. 최익현은 4번째 상소를 통해 사직의 뜻을 표하면서 자신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는 것은 5개조의 헌책(獻策) 수용 요구를 무마, 호도하려는 것이라고 성토하였으며,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면 일제에 부역하는 매국노부터 단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최익현의 상소가 점차 강경해지고 언론을 통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자, 일제는 최익현의 상소투쟁이 조선인의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차단하기로 한다. 이에 일제는 최익현에게 치안 방해 및 한일 양국의 우호증진 방해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후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에 구금하였다. 구금 후 이틀 만에 최익현은 포천 본가로 강제로 옮겨졌으나, 재차 상경하여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일제는 즉시 헌병을 출동시켜 최익현을 체포하여 헌병대사령부에 구금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이번에는 최익현을 가족이 머물고 있는 충청도 정산(定山, 오늘날의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으로 추방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정산에서 전해들은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의 폐기와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소위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익현은 같은 뜻을 담은 상소를 10여일 뒤 다시 한 번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소투쟁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함을 깨달은 최익현은 투쟁의 방식을 전환하기로 결심하고 항일의병투쟁을 계획하였다.

1906년(고종 43) 최익현은 70대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炳瓚)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먼저 고종에게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죄할 것을 건의하는 소(倡義討賊疏)’를 올렸고, 모든 백성의 궐기를 요구하는 격문인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 그리고 일제가 저지른 16가지 죄를 규탄하는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를 발표하고 창의(倡義)를 선포하였다. 최익현의 의병은 정읍, 순창, 곡성 등 인근 고을을 손쉽게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남원에 진입을 시도하다가 남원 수비를 맡은 것이 일본군이 아니라 지방의 우리 측 지방 군대인 진위대(鎭衛隊)임을 알게 되었다. 최익현은 수비군과 수차례 교섭하였으나, 해산하지 않으면 공격할 것이라는 통첩을 받고 동포끼리 살육할 수는 없다 하여 결국 의병을 자진해산하고 체포되었다.

최익현과 의병에 참여한 그의 제자들은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에 유배되어 경비대 내의 감옥에 구금되었다. 이곳에서 일본인이 밥을 주니 일본의 예법을 따르고 머리도 깎으라는 요구에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투옥 3개월여 만에 풍토병을 얻은 최익현은 한 달 가량 투병하다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최익현의 시신은 쓰시마에서 부산을 거쳐 정산의 본가로 운구(運柩)되었는데, 상여가 장지로 가는 도중에 거리에서 지내는 제사인 노제(路祭)에서 그를 전송하며 추모하는 이들이 많아 운구를 마치는 데에 보름이 걸렸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