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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韓貞玉]

불교 개혁론을 주장한 3·1 운동의 불교계 민족 대표

1879년(고종 16) ~ 1944년

한용운 대표 이미지

한용운 사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한용운, 출가하여 승려가 되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성곡리(城谷里)에서 부친 한응준(韓應俊)과 모친 온양 방씨(溫陽 方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아명은 유천(裕天), 출가 이후 받은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부친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한용운의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에 통달해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14세인(1892년)에 전정숙(全貞淑)과 결혼하였다.(한용운의 결혼 시점이 18세인 1896년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광식, 『만해 한용운 연구』, 동국대출판부, 2011, 340쪽) 한용운은 결혼 이후 아들 한보국(韓保國)을 두었으나, 출가하였다. 이에 대해 한용운은 1930년에 처음으로 아들이 있음을 스스로 밝혔다. “구식 조혼시대에 일찍이 장가를 들고 19세 때에 어떤 사정으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한번 집을 떠난 뒤로는 그야말로 승속(僧俗)이 격원(隔遠)하여 집의 소식까지도 알지 못하고, 다만 전편으로 내가 출가할 때 회임 중이던 아내가 생남(生男)하였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기미(己未)시대(1919년)에 나의 이름이 세상에서 많이 알게 되니까 시골에 있던 아들도 내가 저의 친부인 것을 알게 되어 서울로 찾아와 소위 부자가 초면 상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용운의 출가 시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앞의 인용한 글에서 한용운 스스로 19세에 어떤 사정으로 출가하였다고 하였는데, 다른 글에서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몸으로 27세까지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27세 되던 해에 홍주의 어떤 절에 가서 주역 공부를 하다 우연히 불서를 읽다가 … 불법에 귀의하기로 결심하였다” 고 하였다. 여러 정황에 맞춰 볼 때 한용운은 1904년 5~6월경 홍성을 떠나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1905년 1월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출가, 수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한용운은 승려생활 도중 1933년 유숙원과 결혼하여 대처승이 되었고, 그 사이에서 딸 한영숙을 두었다.

만해 한용운은 근대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러나 그는 시인,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혁명가, 사회운동가 등 다양하게 불린다. 이에 그를 ‘여러 얼굴을 동시에 지닌 부처님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불교개혁을 설파한 승려, 비타협적 독립운동 지도자, 저항과 서정의 감성을 아우른 시인 문학가로서의 한용운의 일생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승려 한용운의 조선 불교 개혁론, 〈조선불교 유신론〉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이하 『유신론』)은 한용운이 33세인 1910년에 집필하고 1913년에 간행된 것으로, 그의 불교개혁 정신을 대표하는 저술일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불서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유신론』은 총 17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수행 : 불교 수행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제기한 것은 참선과 염불당의 폐지이다. 올바른 참선의 활성화를 위해 공동으로 선학관을 설립하고 각처 선방 운영의 다각화를 주장했다. 염불당의 폐지는 『유신론』 주장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것인데, 중생들이 거짓 염불을 멀리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자는 것이지 염불당을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없애자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된다. 이와 함께 불교 의식(儀式)에 대해서도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② 교육 : 승려의 교육문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문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히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승려라도 예외일 수 없다. 배움에 있어서는 지혜, 사상의 자유, 진리의 세 요소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중에서도 당시 승려들은 사상의 자유(비판정신)가 가장 부족하다고 보았다. 승려교육의 급선무를 보통학, 사범학, 외국유학으로 구분하였다.
③ 포교 : 종교의 세력은 포교로 이루어지고 불교의 가르침도 포교에서 실현된다. 포교인의 자질은 열성과 인내와 자애의 겸비에 있고, 포교 방법은 연설, 신문, 잡지, 역경(譯經), 자선사업 등을 통해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④ 사원의 위치 : 산속의 사원은 사상적인 진보와 모험 및 구세, 경쟁을 자극하지 못해 퇴영적이기 쉽고, 사업적으로는 교육, 포교, 교섭, 체신, 단체, 재정 등에 모두 불리하므로 사원은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종단 운영 : 『유신론』에서 종단 운영과 관련된 문제로 거론한 것은 사원의 통할, 승려 단체, 사원의 주지 선거법이다. 사찰들은 지휘와 통할을 통해 운영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혼합통할과 구분통할로 나누었다. 각기 장단점이 있으나 원칙적으로 혼합통할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경험, 인식, 자격자, 공덕심이 없어 실시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구분통할을 하면 분열의 위험이 있다는 입장으로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방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다음으로 한 사원의 흥망성쇠는 주지(住持: 절을 주관하는 승려)에 달려 있는 만큼 능력있고 훌륭한 사람이 주지의 직책을 맡기 위해서는 제도를 개혁하여 선거로 선출하고 월급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승려들은 외형적으로 단결된 것 같으나 정신적인 단결이 없음을 지적했고, 이 중에서 승려들의 방관자적 태도가 가장 문제라는 것이다. 승려들이 단결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한다면 부처님의 중생제도 정신을 배반치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지은 죄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⑥ 승려의 인권과 결혼 : 『유신론』에서 승려 인권의 회복 방안으로 제기한 것은 승려 자신의 생산활동 참여로서, 스스로의 생산이 없으면 자신의 생존에 대한 결정권을 남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계가 가진 산림의 조건을 이용하여 조림에 힘쓰고 승려들의 공동생활의 경험을 살려 공동경영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음으로 승려의 결혼문제는 『유신론』을 대변할 정도로 가장 첨예하고 논란이 심한 문제였다. 한용운은 결혼의 금지는 윤리와 국가, 포교와 풍화(風化: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하는 일)에 모두 해롭기 때문에 승려의 결혼을 금지한 계율은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 방편일 뿐이다. 부작용만 많은 결혼금지 문제는 승려 자신의 자유로운 뜻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 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현재까지 귀감이 되고 있으며, 가장 탁월한 불교 개혁 책이라 평가받고 있다.

한용운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1914년 4월 30일 『불교대전(佛敎大全)』을 발간했다. 『불교대전』의 편찬 목적은 한용운의 대중 교화, 포교, 역경(譯經)에 대한 사상과 실천의식 쓰인 것으로 재가(在家: 출가하지 않은) 신도를 위한 사상 지침서이자 신앙 안내서이다. 이 책은 대장경을 재구성한 체계의 독창성을 갖고 있다. 1925년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집필했는데 선(禪)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한용운의 선에 대한 취향을 전하고 있다.

한용운이 불교 개혁의 또 다른 행적은 불교청년운동의 선구자, 지도자였다. 그는 1910년 항일불교 차원의 임제종(臨濟宗) 운동 당시부터 각 사찰의 불교청년을 조직화하여 민족불교 지향의 임제종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조선불교회’ ‘불교동맹회’를 조직하여 불교 대중화에 나섰다. 1920년대는 불교 자주화, 불교 대중화 노선을 견지하면서 불교개혁을 추동했고, 많은 불교청년들이 그를 따라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 총재로 추대되었다.

3 3·1운동 주도와 신간회 참여

한용운의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적 활동은 3·1운동 주도였다. 한용운은 최린(崔麟)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민족세력 규합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하여 공약3장을 추가하고 당일 독립선언식을 주재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용운은 1919년 1월 하순경 일본 유학시절 알게 되어 10여 년을 친하게 교제해 오던 최린을 찾아가 여러 시국문제를 논의하던 중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에는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한데 당시 최린이 참여하고 있는 천도교가 최대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용운의 제의에 대해 1918년 12월경부터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과 함께 천도교 측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있던 최린은 적극 공감을 표하면서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또한 한용운은 “내가 최(린)와 오(세창)를 다시 만났을 때 양인에게 말하기를 천도교인만 말고 야소교회(耶蘇敎會: ) 와 불교신도를 차차 동지로 하고 그 사람의 명단을 국민 대표로 하여 공공연한 독립운동을 하자”며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의 민족대표를 참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대표로 이승훈(李昇薰)을 설득했고, 유교 측과도 교섭에 나서 2월 23~24일 당시 대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을 거창 자택으로 방문하여 독립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을 승낙받았다. 다만 독립선언서가 이미 인쇄되어 곽종석은 서명되지 않은 것을 알려지고 있다. 2월 27일 백상규(白相奎, 법호 용성龍城, 법명 진종震鍾)의 집을 방문하여 불교계 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1919년 2월 28일 오후 한용운은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3천매를 인수하여 평소 유대관계가 깊던 중앙학림의 정병헌, 김상헌(金祥憲), 오택언, 김규현, 전규현, 신상완, 김법린(金法麟), 김동신 등의 불교청년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후 3월 1일 밤 시중에 돌리도록 당부했다. 이들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시위행진에 참여하고 3월 2일에는 서울 동북부 일대에 선언서를 배포했다. 이어 이들은 지방 사찰로 내려가 시위운동을 주도했는데, 김법린과 김상헌은 범어사로, 김동신은 해인사로, 오택언은 통도사로, 김대용은 동화사로, 정병헌은 전라도 방면으로 파견되어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한용운은 3·1운동을 주도적으로 계획, 추진하였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각계 동지를 직접 접촉하여 동의를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평소 자신을 따르던 청년 승려들에게 선언서 배포 및 시위 확산을 도모케 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독립선언서 중 ‘공약 3장’은 한용운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독립선언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초안을 수정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공약 3장’을 추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금일 우리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을 일주하지 말라.
1.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1.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한용운은 3·1운동 조사과정에서도 공약3장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선언서의 공약3장 제2항은 우리들이 독립의 의사를 발표해 둔 것이다. 우리들로서 하지 못했을 때는 또 뒤를 이은 사람이 그 의사를 이어 독립이 되도록 하라는 그런 의사를 쓴 것”이라 하였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직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자신을 비롯하여 동지들에게 옥중투쟁의 3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이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원칙을 철저하게 실천함으로써 민족대표로서의 기상을 최후의 일각까지 지켰다. 한용운은 공판에서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오. 이번 독립운동이 총독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것인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아니코자 하나니. 4천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독립운동은 단지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저항하려는 것이 아닌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근본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설령 일본이 ‘행복을 증진’시켜 준다하더라도 그것을 민족의 자존심과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이기에 독립은 절대적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한용운의 사상은 이후 일제의 어떠한 회유와 유화 조치에도 변절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간 힘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용운은 1919년 7월 10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검사가 독립 타당성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기 위해 종이와 펜을 요구하여 옥중에서 ‘대한독립의 서(書)’를 작성하였다. 이 논설은 자유, 평등, 평화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여 그의 독립정신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논설은 검사장에 한 부 제출되고 사본 한 부는 작은 글씨로 휴지에 적은 다음 간수의 눈으로 피하기 위해 종이 노끈처럼 위장하여 형무소에서 차출되는 옷 갈피에 끼워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이를 처음 입수한 사람은 한용운의 제자 이춘성이었고, 그는 다시 김상호(金尙昊)에서 전달하여 김상호와 김법린은 그 문건을 등사하여 비밀 연락루트를 이용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1919년 11월 4일 상하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 제25호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그 전문이 게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용운은 1921년 12월 22일 최린, 오세창, 권동진, 함태영(咸台永), 이종일, 김창준(金昌俊)과 함께 가출옥되었다. 출옥 이후 백담사에 은거하면서 잠시 세상과 거리를 두었지만, 곧 세상으로 돌아와 불교개혁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며 민중계몽에 노력했다. 또한 당시 이념적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있던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역량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했다.

한용운은 이러한 인식 하에 1927년 2월 출범한 신간회(新幹會)에 적극 참여했다. 2월 15일 열린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회장 이상재(李商在), 부회장 권동진이 선임되었고, 한용운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6월 10일 개최된 신간회 경성지회 설립대회에서 한용운은 경성지회장에 선출되었다. 신간회 결성으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자 일제는 신간회에 대한 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이 일어나자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것을 전국적인 반일시위로 확대하기 위해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탐지한 일제 경찰은 당일 신간회 임원 일제 검거에 나서 허헌(許憲), 한용운 등 20여명을 체포하고 각종 인쇄물을 압수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신간회 강경 노선에 쐐기를 박고자 1929년 12월 24일 허헌, 홍명희(洪命憙), 한용운 등 11명을 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여 경성지법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이들 중 한용운, 권동진, 주요한(朱耀翰), 손재기, 김항규는 1930년 1월 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한용운은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자 이에 적극 반대하고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을 주장했다.

한편 한용운은 불교계의 항일 독립운동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불교계 독립운동 비밀조직이었던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이끌었다. 만당은 1930년 5월 김법린, 최범술(崔凡述), 만공(滿空, 법명 월면月面), 김상호 등 청년 승려들이 비밀결사조직체로 조직하였다. 만당의 활동은 주로 ‘조선불교청년동맹’이라는 외형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의 저변 확대에 주력했다. 만당은 1933년 해체된 이후에도 한용운을 따르던 청년 불교당원들에 의해 항일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4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

한용운은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은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님의 침묵」을 포함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인위적으로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 시집 『님의 침묵』은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 평도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

한용운은 현대시 「님의 침묵」 외에도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흑풍」·「후회」·「박명(薄命)」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다. 1935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흑풍(黑風)」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後悔)」를 연재하였는데,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1938년 『조선일보』에 「박명(薄命)」을 연재하였다.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서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한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회유 전향시켜 전쟁 동원의 나팔수로 활용하고자 했다. 한용운은 경찰의 계속되는 감시와 체포, 탄압에도 불구하고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어떠한 글도 쓰지 않고 강연도 하지 않았으며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창씨개명에도 반대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자택 심우장(尋牛莊)에서 냉방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그는 병원 진료도 거부하다가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동지들에 의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茶毘: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이르는 말)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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