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홍명희

홍명희[洪命熹]

지조를 꺾지 않은 조선의 ‘3대 천재’, 『임꺽정』을 연재하다

1888년(고종 25) ~ 1968년

홍명희 대표 이미지

홍명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명문 사대부가문의 소년 천재, 도쿄 유학을 떠나다

홍명희(洪命憙, 1888~1968)는 1888년 7월 3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괴산면(槐山面) 인산리(人山里)에서 부친 홍범식(洪範植)과 모친 은진 송씨(恩津 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순유(舜兪)이고, 청년시절에는 가인(假人, 可人), 장년 이후에는 벽초(碧初)라는 호를 주로 썼다. 홍명희의 가문은 풍산(豊山) 홍씨 추만공파(秋巒公派)로 노론에 속하는 명문사대부가였다.

홍명희의 조부인 홍승목(洪承穆)은 187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 대사성, 형조 및 병조 참판 등을 거쳐 1906년 정2품 중추원찬의(中樞院賛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대동학회(大東學會) 부회장, 1908년 제국실업회 회장, 관진방회 인사부장을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했고,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에 임명되어 1921년 중추원 개편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이는 분명한 친일 행적이었는데, 이와는 반대로 그의 아들이자 홍명희의 부친인 홍범식은 일제 강제병합에 비분강개하여 자결 순국하였고 이후 집안이 몰락한 점에서 볼 때 홍명희 가문은 한국 근대 격동기 친일과 애국의 쌍곡선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홍명희의 삶을 보다 강하게 규정한 것은 그의 부친 홍범식의 일생이었다. 홍명희는 말년에 자녀들에게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동안 애국자라는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 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한다.

홍명희는 5세에 한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부터 그는 비상한 기억력과 뛰어난 문재(文才: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재능)를 드러냈다. 그는 13세가 되던 1900년 참판 민영만의 딸과 혼인했다. 이들은 당시 관습대로 부모의 뜻에 따라 명문대가 출신간의 전형적 조혼(早婚)이었다. 그러나 홍명희는 후에 도쿄 유학 등 신학문과 신사상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부모 뜻에 따라 조혼한 부인 민씨와 평생 의좋은 부부생활을 했다. 당시의 가부장들이 근엄했던 것과는 달리 홍명희는 자제들 앞에서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장남 홍기문(洪起文)은 그가 16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그 후 차남 홍기무(1910년생), 3남 홍기하(1919년생)가 태어났는데, 홍기하는 돌이 갓 지나 사망했다. 그 후 쌍둥이 딸 수경과 무경(1921년생), 막내딸 계경(1926년생)을 두었다.

향리에서 한문을 익히던 홍명희는 1901년 상경하여 이듬해 중교의숙(中橋義塾)에 입학함으로써 처음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8세인 1905년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귀향했으나 점차 지향 없는 시골생활에 답답함을 느끼던 중, 우연히 같은 동리의 일본인 부부에게 일본어 회화를 배우게 되면서 급기야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6년 초 일본 유학길에 올라 우선 도쿄의 토오요오(東洋) 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한 뒤, 1907년 타이세이(大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09년 말까지 그곳에서 수학했다. 타이세이 중학교에 다니던 홍명희는 성적은 좋았지만 실상 학교공부는 게을리 하고 대신 광범한 독서, 특히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홍명희의 도쿄 유학시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교우관계이다. 도쿄 도착 직후 본향구(本鄕區) 옥진관(玉津館)이란 하숙집에서 처음 만난 한국 유학생이 호암 문일평(文一平)과 춘원 이광수(李光洙)였다. 1907년 문일평과 이광수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해 다니고 있었고, 타이세이 중학교에 다니던 홍명희와 학교는 달랐지만 같은 학년으로 학창생활을 했다. 또 한 인물은 육당 최남선(崔南善)이었다. 최남선은 1906년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해 다니던 중 홍명희를 알게 되었다. 이후 홍명희의 소개로 이광수와 최남선은 서로 알게 되었고, 이들 세 사람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면서 조선의 신문학 건설에 관한 구상을 함께 했다고 한다.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少年)』지를 통해 문단활동을 시작한 세 사람에게 “도쿄 유학생 중 삼재자(三才子: 세 명의 천재)”라는 칭호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 시기 홍명희는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서 활동하며 그 기관지 『대한흥학보』에 몇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논설문 「일괴열혈(一塊熱血)」 이다. 당시 우리 민족 상황에 대해 “밖으로 강한 이웃나라가 호시탐탐하고 안으로 민지(民智)의 발달이 막혀 우리 수천만 단군 후예가 애처로운 지경에 점차 빠지는 도다”라고 하면서 “금일 우리 한반도에 하나의 열(熱)이 성하여 그 형세는 큰 파도가 산과 언덕을 덮치는 것과 다름없고, 그 해악은 성홍열의 수억배”인데 그 열이 바로 ‘지방열(地方熱)’이라 진단한다. 끝으로 “혹은 각 지방 사람들이 서로 발언하되 타 지방사람이 없어도 국가 중흥하리라 하나, 이는 우매하고 무지한 밥주머니 같은 어리석은 논리요, 상식있는 자의 혀끝에서 나온 언론은 아니로다”라며 ‘지방열’을 조장하는 논리를 성토하고 민족의 단결을 거듭 주장하였다.

홍명희는 유학 생활 중 점차 학업에 열의를 잃고 사상적인 번민에 빠져 들어, 마침내 타이세이 중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 학업을 중단한 뒤 1910년 봄 귀국하였다. 그러나 중도 귀국한 그에게 향후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2 부친의 순국 자결 “죽을지언정 친일은 하지 말라”, 방랑의 시절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때 홍명희의 집안에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으니, 금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그의 부친 홍범식이 자결한 것이다. 홍범식은 장남 홍명희에게 남긴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홍명희는 이런 부친의 유언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여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고, 집안 자제들에게도 항상 부친 홍범식의 순국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부친의 삼년상이 끝난 후 홍명희는 돌연 중국으로 떠났다. 1912년 출국하여 1918년 귀국하기까지 중국과 남양(싱가포르)에서의 홍명희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는 만주를 거쳐 1913년 봄 상하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의 박은식(朴殷植)을 만나 이들과 함께 활동했고, 상하이에서 한때 정인보(鄭寅普), 문일평, 조소앙(趙素昻), 이광수 등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1914년 11월 홍명희는 상하이를 떠나 남양으로 향했다. 1917년 12월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갈 때까지 만 3년 동안 남양을 ‘방랑’한 것은 그의 생애의 가장 큰 수수께끼이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홍명희는 1918년 6월 베이징으로 갔다. 이곳에서 홍명희는 정원택(鄭元澤)과 함께 보타암에서 『조선사』를 집필 중이던 단재 신채호(申采浩)를 방문했다. 이후 홍명희는 신채호와 한 달 여 동안 교유하며 평생지기로서의 막역한 우정을 쌓았다. 1918년 7월 펑텐(奉天)으로 간 홍명희는 그곳에서 귀국을 종용하고자 온 아우 홍성희를 만나 드디어 7년간의 해외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1918년 7월 19일 펑텐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3 3·1운동 주도와 신간회 활동

해외에서 오랜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후 지친 심신을 다스리며 지내던 홍명희는 1919년 3월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부터 고난에 찬 독립운동의 여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종의 인산(因山: 장례)을 보기 위해 상경한 홍명희는 서울 체류기간 동안 일어난 대규모 군중시위에 강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3월 15일 귀향한 홍명희는 괴산 군내 뜻있는 인사로서 평소 친분이 있던 이재성, 김인수를 비롯한 수십 명과 접촉하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 3월 19일 괴산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고, 스스로 선언서를 집필하였다.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휴대하고 장터에 나타난 홍명희와 홍용식, 이재성은 오후 5시경에 모여든 군중에게 이를 반포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은 경찰서 앞마당에까지 몰려가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체포된 사람은 홍명희, 이재성, 홍용식, 홍태식, 김인수, 학생 곽용순, 이병석, 윤명구의 8명이었다.

홍명희가 검거되자, 그의 아우 홍성희는 괴산면 면서기 구창회와 다음 괴산 장날에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공모했고, 3월 24일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켜 체포되었다. 3월 19일 괴산에서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난 후 청주, 옥천, 영동 등 충북 각 지역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연쇄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점점 더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괴산 만세운동 주도자들에 대한 재판은 서둘러 진행되었다. 1919년 4월 17일 홍명희는 공주지법 청주지청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재성과 홍용식도 같은 죄목으로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여 홍명희와 이재성은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었고, 홍용식은 공소 기각되었다. 이어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공소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20년 4월 출옥한 이후 홍명희에게는 힘든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는 옥중생활로 건강을 상한데다가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다. 부친 홍범식의 순국 이후 기울기 시작한 그의 집안은 홍명희와 아우 홍성희, 숙부 홍용식, 홍태식이 모두 투옥되는 재난을 겪으면서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된 것이다. 1921년 서울로 이주한 후 1922년 휘문고보와 경신고보 교사로 일시 근무했고, 1924년에는 『동아일보』 취체역(取締役) 주필 겸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25년에는 조부 홍승목이 별세하였고, 『동아일보』에서 옮겨 『시대일보』 편집국장 및 부사장에 취임했다. 1926년 3월 시대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그해 8월 결국 자금난으로 『시대일보』는 폐간되었다. 이어 10월에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가 다음 해 사임했다.

한편 홍명희는 1923년 7월 사회주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24년 11월 신사상연구회가 화요회(火曜會)로 개편되자 화요회 간부로 계속 활동했다. 화요회는 당시 각종 사상·운동단체들이 난립하여 분열과 대립을 일삼던 풍조를 지양하고 화요계 주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계획하는 한편, 제(諸)사상단체 합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화요회 주도로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결성되었으나, 곧 일제의 검거로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자 12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이와 병행해 화요회는 북풍회(北風會),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와 4단체 합동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1926년 4월 이것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켰다. 정우회는 분파투쟁 청산, 사상단체 통일, 정치투쟁단체로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정우회선언’을 발표했고 1927년 2월 사상단체 통일을 위해 솔선하여 자진해체함으로써 신간회 결성을 위한 바탕을 마련했다.

이 시기 홍명희는 사회주의운동 단체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 결성에도 참여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신간회 결성 이전부터 이미 좌·우 진영을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 추진에 깊은 관심과 열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27년 2월 창립하여 1931년 5월 해소되기까지 존속했던 민족협동전선체 신간회(新幹會)는 독립운동가 홍명희가 가장 큰 기대를 갖고 심혈을 기울였던 활동의 장이었다. 신간회를 대표하는 직책을 맡은 적은 없었지만 신간회 결성과 그 전반기 운영을 주도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회장에는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 홍명희가 선출되었으나, 홍명희는 부회장직을 고사하고 조직부 총무간사직을 맡았다. 1929년 6월까지 제1기 신간회를 이끌었던 것은 총무간사회였다. 창립대회 이후 신간회가 지회 설립을 통해 조직 확대에 착수하자 이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서 지회 결성 움직임이 경쟁적으로 일어났다. 본부의 특파원으로 지회 설립대회에 가장 많이 파견된 인물이 홍명희와 안재홍(安在鴻)이었다. 지방의 젊고 진보적인 활동가 사이에서 홍명희는 신간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간회 결성으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자 일제는 신간회에 대한 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제3,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과 『조선일보』 정간사건으로 신간회 간부 진용이 큰 타격을 받았고, 그 여파로 신간회 본부는 온건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신간회는 1929년 2월 15일 창립 2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치르고 3월 정기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경찰은 금지하였다. 이에 6월 28, 29일 약식의 복대표(複代表)회의를 개최하여 임원을 선출했는데,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당선되는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진출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것을 전국적인 반일시위로 확대하기 위해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탐지한 일제 경찰은 당일 신간회 임원 일제 검거에 나서 허헌 등 20여명을 체포하고 각종 인쇄물을 압수했다. 이러한 와중에도 홍명희는 예정대로 민중대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격문살포와 통지문을 각 지회에 우송하기로 결정한 뒤 바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허헌, 홍명희 등 신간회 간부 40여 명을 포함해 총 90여 명에 달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신간회 강경 노선에 쐐기를 박고자 1929년 12월 24일 홍명희를 포함한 11명을 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여 경성지법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이들 중 허헌, 홍명희, 이관용, 조병옥(趙炳玉), 이원혁, 김무삼 등 6인은 경성지법에 기소되었다. 민중대회 사건 공판은 예심 종결 이후에도 수개월을 끌다가 1931년 4월 6일에야 개정되었고, 4월 24일 언도공판에서 홍명희, 허헌, 이관용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상소를 포기하여 모두 형이 확정되었는데, 잔여형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1932년 1월 22일 가출옥으로 출감했다.

4년, 만 2년의 투옥기간을 거치고 나온 홍명희는 그 사이 현실의 엄청난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이끌었던 신간회는 해소되었고, 활발하던 노동자, 농민대중의 투쟁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집중적 탄압을 받고 무력화되고 말았다. 암울한 1930년대 홍명희는 객관적 정세가 변할 때까지 신간회와 같은 사회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 체념하고 독서와 『임꺽정』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4 『임꺽정』 집필

신간회에서 헌신적으로 활동 중이던 1928년 11월부터 홍명희는 대하장편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3년에 걸쳐 몇 차례 연재를 중단했다가 속개하면서, 결국 최종 완성이 아닌 미완의 작품을 남겼다.

『조선일보』 1928년 11월 21일부터 1929년 12월 26일까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을 연재하다가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장기 휴재(休載)에 들어갔다. 제2차 연재는 1932년 12월 1일부터 1934년 9월 4일까지 ‘의형제편’이었고, 제3차 연재는 1934년 9월 15일부터 1935년 12월 24일까지 ‘화적편의 청석골 장’이었다. 이후 신병으로 2차 장기 휴재에 들어갔다가, 1937년 12월 12일부터 1939년 7월 4일까지 ‘화적편의 송악산 장부터 자모산성 장 서두까지’ 제4차 연재를 하였다. 다시 신병으로 3차 장기 휴재 하였다가 마지막으로 『조선일보』가 폐간되어 그 자매잡지인 『조광』 1940년 10월호에 ‘화적편의 자모산성 장 일부’를 게재한 다음 완전 중단하였다.

홍명희는 직업적 문인을 자처한 적이 없었지만, 당시 지식인사회에서는 장차 대작을 쓸 문인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는 1920년대 후반에도 청탁에 못 이겨 남의 책 서문을 써 주거나 극히 짧은 글을 잡지에 몇 편 게재했을 뿐이다. 좀처럼 붓을 들지 않던 홍명희가 장편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홍명희는 독자 대중에게 야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사, 특히 조선의 민중사에 대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계몽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오늘날 임꺽정은 조선 중기에 활약한 의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왔으나 홍명희가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전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1932년 출옥 후 홍명희는 『임꺽정』 집필에 몰두하여 1932년 12월 1일 드디어 제2차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의형제편’은 구성과 문체, 인물의 형상화, 대화 및 디테일 묘사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임꺽정』의 사실주의적, 민중적이며 민족문학적인 특성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이후 ‘화적편’은 연재와 휴재로 이어가다 『조광』 1940년 10월호의 ‘화적편의 자모산성(하)’를 끝으로 영원히 중단되었다. 연재 중단은 그의 건강 악화도 원인이지만 일제 강압에 의해 『조광』을 포함한 잡지들이 친일 논조로 기울어갔고, 당시 저명인사들에게 강연이나 저술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강요했던 일제 당국의 압박을 물리치기 어려웠을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임꺽정』은 연재되는 동안은 올바른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38년경부터 장편소설론과 리얼리즘론이 평단의 중심 논제가 되면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193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그 전편을 읽을 수 있게 된 후에야 비로소 문단에서는 이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확고한 명성과 문학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5 해방 이후 중간파 정당 활동과 남북연석회의 참여

홍명희는 일시 피신 중이던 고향 괴산에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맞이했다. 해방을 맞이한 이후에도 홍명희는 한동안 괴산에 머물러 있었다. 『괴산군지』에 의하면 1945년 8월 20일 경 괴산군에서 홍명희를 회장으로 하는 괴산군 치안유지회가 결성되어 미군정이 실시될 때 까지 지방 치안을 담당했다고 한다. 한편 1945년 8월 15일부터 12월까지 홍명희는 좌우익 양 진영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명예직에 추대되면서 사회활동을 재개하였다.

먼저 좌익진영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가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으로 전환하면서 홍명희는 12명의 고문 중 1인으로 발표되었다. 홍명희는 11월 22일 서울신문사 고문을 맡게 되었고, 12월 13일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 12월 15일 에스페란토조선학회 위원장, 12월 27일에는 조소(朝蘇)문화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2월 15일 결성된 ‘김일성장군 무정장군 독립동맹 환영준비회’도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선임 발표했다.

우익 측에서도 홍명희를 몇몇 명예직으로 추대했다.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는 3인의 부회장 중 1인으로 홍명희를 추대했고,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환영대회에 참석해 환영사를 했다. 12월 28일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는 홍명희를 21명의 상무위원 중 1인으로 선임했다.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던 1946년 1월초 홍명희는 『서울신문』에 좌우익의 여러 단체에서 사전 동의 없이 자신을 임원으로 선임, 발표하는 데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좌익 측의 노선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이 커다란 기대를 걸었던 임정과 인공의 합작 전망이 극히 어두워진 데 대한 실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성명 발표 이후 홍명희는 한동안 일체 정치적인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정치적 발언도 삼가하며 지냈다. 1946년 3월 22일에는 서울신문사 고문직도 사퇴하였다.

1946년 12월 10일 홍명희는 자신을 따르는 인사들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자 발기인 대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창당 작업은 순조롭게 진척되지 못했고 결국 1947년 10월 신한국민당, 신진당, 민중동맹, 건민회와 합세하여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46년 12월 홍명희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중 관선의원에 추천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했다. 그는 수락 거부 담화에서 입법의원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입법의원에 특히 민선의원들 중 친일파나 정치모리배가 다수 차지한 현실을 통렬히 비판했다.

1947년 후반 중간파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통합 움직임은 첫째, 강력한 정당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중간우파 5정당이 통합하여 민주독립당을 창당한 것, 둘째는 공동투쟁을 위한 협의체로서 정당협의회를 결성한 것이다. 셋째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강령을 바탕으로 결속한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등으로 나타났다.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 결성대회에서 김규식(金奎植)이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홍명희는 전형위원(詮衡委員)에 선임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이 가결되자, 다음날 민주독립당은 유엔의 결정으로 분단이 고정화되고 동족상잔이 본격화 될 것을 우려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3월 들어 홍명희는 김구, 김규식 등과 접촉하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문제와 남북요인회담에 관한 행동 통일을 모색하였다. 3월 12일 김구, 김규식, 김창숙(金昌淑),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趙琬九), 홍명희 명의로 단독선거 반대를 천명하는 ‘7거두(巨頭)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에 앞서 2월 16일 김구, 김규식은 김일성,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고, 북측이 3월 25일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연석회의를 공식 제안하였다.

1948년 4월 1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이 개최되었다. 홍명희는 이러한 남북연석회의를 성사시키고 회의에서 구체적 성과를 도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홍명희는 남북연석회의 이후 평양에 잔류하였다.

6 월북과 북한에서의 생활

남북연석회의 이후 김구, 김규식 일행은 5월 4일 평양을 출발하여 다음날 38선을 넘어 남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홍명희는 개인사정으로 남게 되어 평남 맹산으로” 갔다고 보도되었다. 홍명희가 북에 남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사정이 있을 것이나 대체로 북측의 통일정부 수립의지가 분명하다고 생각한 점, 해방 후 북의 발전상과 그것을 이루어낸 그곳 지도부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던 점을 들 수 있다.

1948년 8월 중순 홍명희의 일가족은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했다. 월북한 홍명희 일가는 부인 민씨와 세 딸, 장남 기문 일가, 차남 기무 일가, 아우 홍성희 일가 등 20명이 넘는 대식구였다. 평양에 도착한 홍명희 일가에게 김일성은 자기가 살던 집과 그에 딸린 온갖 살림 도구를 고스란히 내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고 한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홍명희는 일약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북한 정권에서 홍명희가 역임한 직책들 중 중요한 것은 1948년부터 1962년까지 연임한 내각 부수상 직과 이어서 1968년 사망 시까지 연임한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직이다. 이외에도 과학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는 몇 차례 숙청 바람에도 불구하고 건재하여 사망 시까지 고위직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후에는 장남 홍기문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등의 중책을 계승하였고, 손자 홍석형이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발탁되는 등 후손들까지 고위직이 이어지고 있다.

홍명희는 1968년 3월 5일 노환으로 별세하여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