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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洪英植]

일본으로의 망명을 거부하고 죽임을 당한 개화파

1855년(철종 6) ~ 1884년(고종 21)

홍영식 대표 이미지

홍영식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홍영식(洪英植)은 보수파의 영수 홍순목(洪淳穆)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달리 일찍부터 개항과 근대화를 주장했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육군제도를 시찰하였으며, 미국에 보빙사로 파견되어 근대 문물을 체험하였다. 돌아온 뒤 우정국 총판(郵政局 總辦)이 되어 한국의 근대 우편제도 창설에 기여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본으로의 망명을 거부하고 끝까지 고종을 호종하다가 살해당했다.

2 출생과 성장

홍영식은 1855년(철종 6) 12월에 홍순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 홍씨이며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18세의 어린 나이인 187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그러나 과거합격자 명단인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홍영식의 이름이 까만 먹으로 지워져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가 대역죄인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당대 보수적 척사파의 영수나 다름없는 인물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1876년 개항이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도 계속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그의 아들인 홍영식은 일찍부터 개화파인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과 교유하면서, 개항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해야 할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홍순목은 아들이 가정을 보존하지 못할까 염려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한 다음해인 1874년이 되면 홍영식은 정7품 규장각의 대교(待敎)가 되었고, 1879년에는 종5품 규장각직각(直閣), 1880년에는 정5품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자리에 오르는 등 비교적 빠른 승진을 보였다. 이후 신사유람단, 보빙사(報聘使) 등을 수행하며 외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경험하고 고종의 개화정책 수행에 적극적으로 활약하게 된다.

3 신사유람단에 참여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으로부터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귀국해서 고종에게 바친 이후, 조선정부는 점차 보다 적극적인 개항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881년 4월에는 일본 국정을 상세히 조사하기 위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했다. 신사유람단은 박정양(朴定陽)과 홍영식(洪英植) 등 조사(朝士) 12명, 유길준(俞吉濬) 등 수원(隨員) 26명, 문순석(文順錫) 등 통사(通事) 12명, 그리고 하인 12명을 포함하여 총 62명으로 구성되었다.

홍영식은 동래부 암행어사의 직함을 받고 주로 일본 육군을 시찰할 계획이었다. 그는 근대화한 일본의 육군체제를 상세히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의 주요 군기관을 방문, 시찰하였다. 이후 1881년 9월에 귀국하여, 고종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견문사건(見聞事件)』과 『시찰기(視察記)』를 고종에게 바쳤다. 또한 일본 육군을 시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홍영식은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와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 등을 편찬하고, 군사제도의 개혁과 국방 강화를 역설했다.

4 개화파로서의 활동과 미국 사행(使行)

홍영식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한 일본의 선진문물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오면서 점차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되어갔다. 1882년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고, 이어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1883년 1월 24일에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인 민영목(閔泳穆)과 함께 조선국 대표로 일본국 변리공사(辨理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교섭하고, 부산에서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했다.

당시 개화세력의 중심인물은 민씨 외척의 실력자인 민영익(閔泳翊)이었다. 당시 민영익의 주변에는 이른바 8학사라고 불리는 신진 청년들이 모여 개항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영익은 일찍이 청나라와 일본을 각각 시찰했고 김옥균도 일본 시찰을 하고 돌아왔으며, 홍영식도 어윤중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만큼, 8학사의 정책 노선은 개항과 개화라고 할 수 있었다.

개화파의 동지로서 민영익과 홍영식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같이 일하게 되었다. 1883년 7월 조선정부는 새로 수교한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게 되는데, 그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는 민영익이, 전권부대신(全權副大臣)으로는 홍영식이 발탁되었다. 보빙사 일행은 1883년 7월 26일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9월 18일 미국 대통령 아서(C. A. Arthur)를 접견하고 국서와 신임장을 제출했다. 이후 40여일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미국 사행(使行)을 완수한 후, 사절단은 두 팀으로 나뉘어 각각 귀국길에 올랐다.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은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서구의 신문물을 관찰하고 돌아오는 세계일주 길에 나섰으나, 부대신 홍영식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일본 도쿄로 돌아왔다. 이때 일본에서 차관교섭차 머물고 있었던 김옥균을 만나 정치개혁을 협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나 밀담을 나눈 후 홍영식은 1883년 12월 20일에 귀국 후 12월 21일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고종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복명문답(復命問答)을 나누었다. 사행을 마친 후 1884년 2월 2일 병마사 겸 함경도 안무사(兵馬使 兼 咸鏡道 按撫使)에 임명되었지만, 부친 홍순목의 나이가 많고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는 않았다.

5 우정국 창설 주도

1883년 1월 13일 조선정부는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적 제도개혁을 이루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통리아문(統理衙門)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안에는 정각사(征榷司), 장교사(掌交司), 부교사(富敎司), 우정사(郵程司)의 4사를 설치하는 동시에 동문학(同文學)을 설치했다. 홍영식은 처음에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임명되었다가 2월 19일에 협판(協辦)교섭통상사무로 승진했다.

홍영식은 일찍이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시찰할 당시 일본 육군성을 조사하면서 일본의 우편제도에 관심을 표명한 일이 있었다. 일본 우편의 창시자이자 당시 역체총관(驛遞總官)이었던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는 그의 자서전에서, “홍영식이라는 사람이 역체국(驛遞局)에 와서 우편업무에 관해 질문하기에 나는 일체의 서류를 증여하면서 조속히 조선에도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이처럼 우편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홍영식은 신설된 우정사의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후 홍영식은 보빙사의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도 미국 정부로부터 우편제도 수립을 권고받았다. 귀국 후 고종에게 복명할 때도 “기기의 제조 및 배, 차, 우편, 전보 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하며 우편제도 창시에 열의를 보였다.

미국사행을 완수하고 귀국한 후에도 홍영식은 우정사의 업무를 계속 관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에 임명되면서 우정사 업무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예속하게 되었다. 1884년 4월 22일 고종의 칙유(勅諭: 포고문)에 따라 우정국이 창설되고, 우정국 총판으로 홍영식이 임명되었다. 홍영식은 칙유에 따라 「개략장정별단(槪略章程別單)」을 마련해서 올리고, 우정총국에서 일할 진용을 구성했다. 홍영식의 동료로 함께 일하게 될 사사(司事) 들은 대개 개화사상 실현에 열의를 가진 청년들이었다. 이에 대해 김윤식(金允植)은 “영식은 우정국을 창설했다. 스스로 우정국 총판이 되어 ‘천박하고 경솔한 소년’들을 불러 모아 동료로 삼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우정국의 기구를 정비한 홍영식은 즉시 개설 준비에 착수했다. 우편업무를 개시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우표제도였다. 이에 홍영식은 인천 세무사 하스(J. Hass)에게 우표주문업무를 위탁했다. 하스의 교섭에 따라 5문(文),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5종의 우표를 일본 대장성(大藏省) 인쇄국에 발주하였고, 8월 9일에 5종 우표의 원판이 완성되었다. 이 중 5문과 10문의 2종은 우정국 개국 이전에 도착해서 개국과 동시에 사용되었다.

우정국의 청사는 전동(典洞) 있는 전의감(典醫監) 청사로 정해졌고, 이후 우정국 사무 직제 장정이 마련되어 업무를 개시하게 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조선정부는 1884년 11월 18일부터 우편업무를 개시한다고 각국 공사관에 통고했다. 우정국의 설치는 조선에서 최초로 시행된 근대 서구식 우편제도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업무 개시 후 약 20일 만인 1884년 12월 8일 우정국은 혁파되었다.

6 갑신정변 주도와 실패

앞서 언급했듯이 홍영식은 보빙사로 미국 사행을 떠났을 때 전권대신 민영익과 다른 경로로 귀국했다. 이때 홍영식은 당시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는 김옥균을 만나 정변을 통한 정치개혁을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빙사의 수행원이었던 유길준은 홍영식과 김옥균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내가 유학차 미국으로 갈 때 일본 동경에서 홍영식과 같이 김옥균을 만나 정치개혁문제를 의정(議定)한 바 있다. 김옥균은 나라 밖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홍영식은 나라 안에서 서울 주둔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도록 권고하고 약 5년 후 거사하기로 했다. 나는 일개 서생으로 이러한 거사계획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다만 이 두 사람의 거사계획담을 듣고만 있었다.

홍영식의 정치이념은 청으로부터 완전 독립과 일본을 모델로 한 자주적 개화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김윤식은

(미국 사행에서) 귀국 후 서양제도를 깊이 흠모하면서 중국의 것이라면 모조리 노예시할 뿐만 아니라 공맹(孔孟)의 윤상지도(倫常之道)를 모두 배척하고, 방자하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하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이류(異類)가 되어버린 것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오면서 동양의 영국이 된 일본을 흠모, 사사건건 일본을 선망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홍영식과 더불어 ‘중국을 배척하고 서양을 존중하는 책론[排華尊洋之論]’을 공동 저술하면서 말끝마다 자주를 부르짖고 있다

고 비난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대원군을 납치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일삼고 있었다. 따라서 홍영식 등이 가진 급진적 개혁의 최대 장애물은 청의 간섭과 청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민씨 척족이자 친청파였던 민영익은 점차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의 정적이 되었다. 미국 사행 후 유럽 순방을 마치고 민영익이 귀국하면서, 민영익과 급진개화파 세력의 반목은 더욱 심해져 갔다.

1884년 6월이 되자 국제정세에 변화가 일게 되었다.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청군이 프랑스군에 패배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급진개화파들은 조선이 청에게서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런 상황 변화는 정변 주도세력이 쿠데타적 정변을 구체화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는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 등과 일본공사관의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 서기관 등이 모여 거사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 모의에서 정변의 방책을 논의한 결과, 우정국 개국 연회석상에서 거사하는 방책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 11월 23일 홍영식은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확실한 병력동원을 보장받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방문, 거사계획을 최후통첩했다.

최후통첩 11일 만인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연회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김옥균과 홍영식 등은 현장에서 민씨의 척족인 민영목, 민태호(閔台鎬)와 조영하(趙寧夏) 등을 살해하고, 창덕궁에 입궐하여 변란소식을 전하면서 신정부를 수립했다. 거사 후 김옥균, 홍영식은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시키고, 다케조에 일본 공사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며 일본공사는 일본군을 이끌고 경우궁을 호위했다. 그러나 경호상 불안을 느낀 정변세력은 12월 5일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이 창덕궁을 공격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결국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서울에는 청군이 약 2천명, 일본군이 약 180명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병력 차이는 청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다케조에 일본공사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을 이끌고 일본공사관으로 후퇴해 버렸다. 이후 정변세력은 일단 창덕궁에서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일본공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7 홍영식의 최후

정변이 실패했음을 인지한 주도세력들이 일본으로 망명하기를 결정했으나, 홍영식은 국왕을 모시기 위해 자신은 남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이 남아서 개화당 사람들이 배반자가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공언했던 ‘거사의 원칙’들은 세상에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고 위해서 대궐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른 동지들은 홍영식을 말리면서 피신할 것을 촉구했지만 끝내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홍영식은 끝까지 국왕을 호종(扈從: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는 일)하다가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북관묘(北關廟)에서 청군의 급습을 받아 피살되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홍영식은 대역죄인이 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홍순목과 형인 홍만식(洪萬植)은 삭탈관직을 당했다. 아버지 홍순목은 역적인 아들을 길렀다는 죄를 자책하며, 손자(홍영식의 아들)를 독살한 후 음독 자결했다. 이어 홍영식의 처 한씨(韓氏)도 자결했다. 형인 홍만식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신원(伸冤)되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통분하며 자결하였다. 1910년 6월 30일이 이완용내각에서 홍영식에게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림으로써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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