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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5부

고구려의 핵심 지배 집단

미상

1 개요

고구려 건국을 주도한 다섯 개의 지역 정치체로, 문헌들에 ‘부(部)’라는 호칭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5부라 한다. 고구려는 이들 5부가 연합・연맹하여 건국하였기 때문에, 5부의 유력자들이 고구려의 핵심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고구려 초기에는 5부가 독자성과 자치성을 유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루부 왕권에게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갔고, 그 결과 5부의 독자성과 자치성은 해체되었다. 3세기 중반 이후에 5부는 수도의 행정 구역명으로 변화하였고, 명칭도 동・서・남・북・중부로 바뀌었다.

2 나(那)에서 부(部)로, 그리고 고구려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고구려전(高句麗傳)과 같은 중국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라는 다섯 족(族)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각각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계루부로 나오는 이들 다섯 부는 고구려의 유력 귀족 집단이었다.

이들 5부 중 4부는 이름에 ‘나(那)’자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중국 측 문헌에는 ‘노(奴)’로 나오는데, 같은 발음을 다른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고구려에서 강가나 산간 계곡의 땅을 나타내는 말로, 이들 4부가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鴨綠江) 중상류와 그 지류인 혼강(渾江) 유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계루부만 ‘나’자를 이름으로 삼지 않는데, 계루부는 고구려 건국자 주몽(朱蒙)을 대표로 하는 집단으로, 처음부터 압록강 지역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기원전 2세기 중반을 전후해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고구려가 건국하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 각지에서 지역 정치 세력인 ‘나’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들 ‘나’ 집단은 고조선과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한(漢)이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느슨한 연맹을 형성하기도 하고, 정복 등을 통해 상호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면, 여러 ‘나’ 집단들은 4개의 큰 정치 집단, 곧 4부를 형성하였고, 이중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있었던 비류나부(소노부)가 중심이 되어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7년(동명성왕 1)을 전후한 시점에 북쪽 부여(夫餘) 방면에서 주몽 집단, 즉 계루부가 남하여 이 연맹체에 참여하였다. 계루부는 우월한 군사력과 우수한 농경 기술을 바탕으로 토착 집단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한 다음, 비류나부(소노부)를 제압하고 맹주권을 장악했다. 1세기 중후반 태조대왕(太祖大王)대에는 계루부가 압록강 중상류 일대 전체를 통괄할 수 있게 되었다. 4부는 이후에도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자치를 영위하였지만, 서서히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의 국가로 흡수되었다. 고구려는 이들 5부 지역을 영역으로 하여, 5부라는 다섯 세력이 통합하여 건국한 것이다.

3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와 부

5부는 서로 통합하여 왕의 통제 아래 고구려라는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초기 5부는 독자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각 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았지만 그와 구별되는 별도의 공간에 위치하면서 독자적 관원 조직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5부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은 아니었다. 계루부 왕권은 전쟁이나 외교, 무역 등과 같은 대외 교섭권을 장악하면서 나머지 4부를 통제하였다. 이는 5부의 연합・연맹의 주된 목적이 한사군과 같은 외부 세력의 군사적 압박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왕은 국가 전체의 대표이며 정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였지만, 모든 영역을 직접 관할하는 절대 권력자는 아니었다. 고구려 영역은 5부로 편제되어 각 부 단위로 통치되었고 각 부의 독자성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의 주요한 국정 운영은 각 부의 유력자들인 ‘대가(大加)’들의 회의체인 ‘제가 회의(諸加會議)’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왕은 국가 전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각 부의 유력자들이 모인 제가 회의(諸加會議)의 주재자였지만, 제가 회의의 결정을 거스를 만큼 압도적인 권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5부는 상당한 수준의 독자성과 자치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각 부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왕권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연나부(절노부) 내부의 통치에 간섭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연나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나, 고국천왕 사후 그의 두 번째 동생인 연우(延優)가 왕위를 잇자, 이에 불만을 품은 첫째 동생 발기(發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비류나부(소노부)가 동조한 것이 좋은 예이다.

결국 고구려 5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으면서 초기 국가체제를 구성하던 하부 단위 정치체라 할 수 있다. 자치권을 지닌 5부가 국가 체제의 중심축을 이루었고, 5부의 지배 세력이 정치 운영의 핵심 주체였기 때문에, 5부가 고구려 초기 정치 체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초기 국가 체제를 부체제라 일컫기도 한다.

4 부체제에서 중앙 집권 체제로

고구려 초기 국가 체제는 부라는 단위 정치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과 5부의 자치권이라는 두 가지 정치 권력을 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3세기 이후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가면서 왕권은 5부의 독자성과 자치성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였다. 이에 부의 지배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권에 반발하고 저항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고국천왕대에 일어난 연나부(절노부)의 반란과 산상왕 즉위 시 비류나부(소노부)의 반란은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부의 반발은 왕에 의해 진압되고, 부의 독자성과 자치성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산상왕 이후 왕위 계승 원리가 형제계승에서 부자계승으로 전환되어 왕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3세기경에 이르면 권력 구조와 정치 체제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며, 왕은 초월적인 지위를 가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에 고구려 왕은 이전과 달리 태왕(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국왕이 국정 운영의 결정권을 독점하게 되면서, 5부 지배 세력은 각 부에서 가지던 독자적 지배권을 포기하고, 수도로 이주하여 왕을 도와 국정을 이끄는 중앙 귀족 관인으로 변모하였다.

유력 지배층이 떠나면서 5부 지역은 고구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제되어 자치성과 단위 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상실하였다. 각 부 출신 귀족들은 수도에서 같이 모여 살면서, 그들의 거주 지역을 부로 칭하였다. 이제 부는 더 이상 독자적인 정치체가 아니라, 단순한 수도의 행정 구역명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부의 이름도 지명에서 유래한 것에서 동・서・남・북・중부라는 방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왕이 부를 통하지 않고 고구려 전체를 직접 통치하는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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