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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

신라의 왕과 왕실을 위한 관청

미상

1 개요

내성(內省)은 왕실의 재정 관리를 주된 업무로 삼으면서, 궁궐과 왕실 관련 사무 전반을 관리했던 신라의 관청이다. 내성은 왕권이 크게 강화된 진평왕(眞平王)대에 설치되었으며, 통일 이후 왕권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진 신라 중대(中代)에 그 위상과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내성은 114개에 달하는 하위 관청을 거느리면서 왕실과 궁궐 관련 사무 전반을 총괄하였다.

2 진평왕대 왕권 강화와 왕실(王室)

신라는 건국 이래 어느 정도 대등한 6개의 부(部)가 연맹·연합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부란 여러 지역 집단이 통합되어 성립한 하나의 정치체로서, 일정한 지역 기반을 가지고 그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건국할 당시 신라는 하나의 국가였지만, 그 내부는 6개의 개별 단위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라에 왕이 있었지만 왕권은 6부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고, 국정 운영은 왕이 주재하는 6부 유력자들의 회의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6부 중심의 국정 운영체제는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 집권 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6부 유력자들의 회의체는 신하들의 회의 기구로 격하되었고, 왕은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왕권 중심의 권력 구조는 법흥왕대 율령 반포를 기점으로 본격화하였는데, 진흥왕(眞興王)대를 거쳐 진평왕대에 이르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진평왕은 자신의 삼촌인 진지왕(眞智王)과 정치적 분쟁을 거쳐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따라서 진평왕에게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고 왕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직계 가계(家系)를 석가모니의 가문과 동일시하는 왕즉불 관념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렇게 왕의 직계를 특별한 존재로 격상시킨 결과 진평왕의 큰 딸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여자임에도 다른 왕족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함께 왕의 직계 가족이 중요시 되고 다른 왕족과 구별되면서 왕실(王室)이 강조되어 갔다. 그와 함께 왕실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관청인 내성(內省)이 일반 행정 관청들과 분리되어 설치되었다.

3 내성의 설치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관직은 일찍부터 확인된다.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는, 왕을 수행하던 인원 중에 ‘이내종인(裏內從人)’이나 ‘이내객(裏內客)’과 같이 궁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내(裏內)’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존재가 확인된다. 왕권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일반 관부 및 관직과 함께 궁중 혹은 왕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들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궁중 및 왕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의 본격적인 제도화는 585년(진평왕 7)에 대아찬(大阿湌) 화문(和文), 아찬(阿湌) 수힐부(首肹夫), 이찬(伊湌) 노지(弩知)를 각각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을 관리하는 사신(私臣)으로 삼으면서 시작하였다.

이후 622년(진평왕 44)에 3궁 전체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성을 설치하였고, 사신은 이 내성의 장관직이 되었다. 그 아래로 차관직인 경 2인과 함께 감(監) 2인, 대사와 사지 각 1인이 있었다. 왕실 경제를 총괄하는 내정(內廷) 관제가 갖추어진 것이다.

4 내성의 확대

내성은 신라 왕권과 함께 그 조직과 역할이 확대되어 갔다. 특히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이후, 신라 왕권은 크게 강화되어 여타 진골 귀족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에 왕실 관련 관청들도 크게 늘어났다. 내성은 왕실 관련 관청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왕실 관련 하부 관청들 중 대표적인 것이 내사정전(內司正典)이다. 내사정전은 내성과 그 산하 관청들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감찰하는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지며, 746년(경덕왕 5) 혹은 745년에 설치되었다. 내사정전은 경덕왕(景德王)대에 내성의 기능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외에도 내성에서 왕실 관련 일반 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전대사전(典大舍典)이나 상대사전(上大舍典), 왕궁 수비나 궁궐 안의 무기 창고 관리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흑개감전(黑鎧監典) 등도 있었다. 주요 왕실 관련 관청이었으며, 이들 관청을 통해 내성이 왕실 관련 업무 전반을 총괄하는 기능을 가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덕왕대는 내성 기능의 확대와 함께 동궁아(東宮衙)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동궁은 왕위 계승자인 태자가 머무는 곳으로 태자궁이라고도 한다. 동궁아는 동궁과 관련한 업무를 총괄하는 기구로, 왕태자에게 내성과 같은 기구라 할 수 있다. 왕권 중심 체제의 심화가 태자 권력의 강화로 연결되면서, 왕실 업무에서 동궁 관련 업무가 분화 독립되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5 내성과 어룡성(御龍省)

한편 신라에 왕실과 관련한 관부로 내성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지는 것이 바로 왕의 행차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어룡성(御龍省)이다. 어룡성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성(省)’이라는 관부명을 가졌으며, 장관직 역시 사신(私臣)으로 같았다. 이는 어룡성이 내성에 속한 하부 관청이 아니라, 내성과 어느 정도 대등한 위상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어룡성의 장관직인 사신은 801년(애장왕 2)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차관직인 어백랑(御伯郞)은 이보다 앞선 750년(경덕왕 9)에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어룡성 자체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신 설치 이전에는 어백랑이 장관이었을 것이므로, 관부의 위상은 내성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801년에 이르러서 어룡성은 내성과 같은 급의 관부로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801년(애장왕 2) 최초의 어룡성 사신이 된 인물은 김언승(金彦昇), 곧 헌덕왕(憲德王)이었다. 애장왕(哀莊王)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그 숙부였던 김언승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는 이미 병부령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결국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당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김언승이 섭정을 하면서 어룡성 사신이 되었는데, 어룡성 사신이라는 관직을 통해 왕실 관련 업무를 장악하여 애장왕의 왕권을 제약하였던 것이다.

김언승이 이러한 목적으로 어룡성 사신의 관직을 설치했기 때문에 어룡성은 내성과 대등한 급의 관부로 격상되었고, 내성의 역할을 상당히 분점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룡성 산하에는 왕을 시종하고 조고(詔誥)를 전담하는 등 문한(文翰)을 관장한 관부였던 세택(洗宅)이나 도서관리 및 왕과 태자에 대한 교수를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숭문대(崇文臺)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는 어룡성의 실제 역할과 기능이 왕의 행차와 관련된 본연의 업무보다 훨씬 강력하고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어룡성에는 제사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악전(嶽典), 감전(監典), 제전(祭典) 등과 내정관부들의 급여를 관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늠전(廩典), 그리고 왕실의 물품 공급 및 보관을 담당했던 일련의 관서들이 소속되었으므로, 내성의 핵심적 기능의 하나인 왕실 재정에 관한 부분도 어느 정도 어룡성에 넘어가게 되었다. 즉 어룡성은 내성의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 하대에는 내성과 어룡성, 그리고 동궁이라는 3개의 주 관부를 중심으로 그에 속한 하위 관서들이 왕실 관련 업무를 나누어 맡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 관부는 일반 중앙 행정 관부가 수행해야할 직무 중에 일부도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하대에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위계승 분쟁이 지속되면서 근시 측근 중심의 정치가 운영되었던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6 내성의 기능과 역할

내성은 기본적으로 왕실 재정을 총괄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왕실 자산을 운용하고 그에서 발생하는 재화를 관리하였다. 왕실은 전국에 농지와 목장 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관리하는 산하 기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영천 청제비(永川菁堤碑)이다. 영천청제비는 이 지역에 있었던 제방시설(堤防施設)의 축조와 수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천청제비의 앞면은 536년(법흥왕 23) 처음 축조할 때 동원된 인력과 수리시설의 규모에 대한 내용이며, 뒷면은 798년(원성왕 14) 파손된 것을 수리할 때 동원된 인력과 수리된 시설의 규모를 적고 있다. 여기에 시설의 수리 작업을 지휘한 사람은 ‘소내사(所內使)’라는 직명을 가지고 있었다. 소내(所內)는 왕실 혹은 궁중을 뜻하므로 소내사는 왕실에서 파견한 관리자라 할 수 있다. 이 소내사가 주변 지역의 인력을 동원하여 토목작업을 진행하였다.

내성 산하에는 왕실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한 업무를 수행하는 관청도 있었다. 궁중에서 먹는 음식을 마련하는 육전(肉典) 등의 관청이나 왕실 사람들이 행차를 담당하는 어룡성을 비롯하여 왕실과 관련한 제사 업무를 맡은 관청, 의료를 담당하는 관청, 왕실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 등이 있었다.

또 왕실은 귀중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을 운영하였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국에 수출하는 물품도 생산하였는데, 비단과 공예품 등이 대표적인 생산물이었다. 특히 당이나 일본에 보낸 직물류를 살펴보면, 금총포(金總布),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하금(霞錦), 채색백(彩色帛) 등 고급품이 상당했다. 이들 고급 직물류들은 내성 관련 생산 관서들에서 직접 생산하여 공급했다고 보여 진다. 물품의 수요를 산출하고 그에 맡게 재료를 조달하여 생산하고 보관, 유통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을 담당하는 체계적인 기관들을 산하에 두고 관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성 산하의 여러 관청들을 관리하는 관청과 그곳에서 근무하는 관인들의 교육 양성, 인사와 급여 등을 담당하는 기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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