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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성

왕에 의한, 왕을 위한 관청

미상

1 개요

집사성은 651년(진덕여왕 5)에 집사부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된 관청으로, 왕정(王政)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일을 하는 담당하였다. 왕명의 전달과 그것이 잘 시행되는지를 관리하는 기능을 주로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여러 행정 관청들을 총괄하는 최고 관청의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2 집사성의 설치와 변천

집사성의 원래 이름은 집사부(執事部)로 651년 2월에 조세의 수취와 지출 등 국가 재정에 대한 업무를 담당했던 품주(稟主)를 개편하여 설치되었다. 품주는 원래는 왕의 가신적(家臣的) 존재였는데, 왕권이 강화되어 가면서 그 위상이 올라가고 국가 전체의 재정을 담당하는 공적 관청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품주는 원래 왕의 측근 인사가 왕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수행한 것에서 유래한 관청이다.

이후 신라 관제 정비 과정에서 품주의 역할을 여러 관청이 분담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에 관한 업무는 조부(調府)와 창부(倉部) 등으로 이관되었고, 측근에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살피는 업무는 집사부가 설치되면서 담당하였다.

집사부는 651년(진덕왕 5)에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면서 설치되었으며, 장관은 중시(中侍)로 정원은 1명이었고, 제5등 대아찬(大阿湌)에서 제2등 이찬(伊湌)까지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될 수 있었다. 차관은 전대등(典大等)으로 정원이 2인이었으며 제11등 나마(奈麻)~제6등 아찬(阿湌) 관등 소지자가 임명 대상자였다. 실무직이었던 대사(大舍)직은 이미 589년(진평왕 11)에 두었는데, 정원은 2명이며 제13등 사지(舍知)에서 제11등 나마(奈麻) 관등이 대상이었다. 685년(신문왕 5)에는 정원 2인의 사지(舍知)직을 두었다. 최하위직인 사(史)는 문무왕(文武王) 대에 6인을 추가하여 총 14인이 배속되어 있었다.

관직들의 명칭은 경덕왕(景德王) 대에 관청과 관직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화(漢化) 정책의 일환으로 바뀐 적이 있다. 장관직은 시중(侍中)이라 하였고, 차관은 시랑(侍郞), 대사는 낭중(郎中), 사지는 원외랑(員外郞), 사는 낭(郎)이 되었다. 하지만 혜공왕(惠恭王) 대에 이 조치들이 취소되면서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갔다. 이후 829년(흥덕왕 4)에는 이름이 집사성(執事省)으로 개칭되었다.

3 집사부의 설치 배경

집사부 설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초기에는 귀족 세력이 강성하고 왕권이 미약하였다. 국정 운영은 귀족 회의체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왕은 신라의 대표로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타 귀족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정치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병부(兵部)와 같은 신라의 주요 관청들은 장관이 2인 이상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담당한 업무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요 정책을 회의를 통한 합의에 의해 결정했던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증왕(智證王)에서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는 시기에 왕의 위상과 권력은 크게 강화되어 갔다. 그 결과 왕의 직계가 다른 왕족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진평왕 사후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지만, 딸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다른 왕족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 운영에 귀족들의 합의가 여전히 필요한 정치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성하였고, 왕권에 위협이 될 여지가 있었다. 더구나 선덕여왕 말년에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마땅치 않자, 다시 귀족 세력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갔다. 급기야는 선덕여왕의 와병 중에 왕위를 노리고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비담의 난은 친왕 세력인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에 의해 진압되었고, 두 사람은 선덕여왕의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을 다음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춘추는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 하였다.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국정 운영에서 벗어나, 왕명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 중심의 정치 제도를 마련하여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 당(唐)과의 적극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삼국 간의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였다.

이에 당의 관료제도를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집사부를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집사부는 왕권 강화 및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관료제의 마련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전과 다른 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집사부의 설치 목적이라고 하겠다.

4 집사성의 위상과 성격

이전까지 귀족 합의제적인 정치 체제의 중심에 있었던 관직은 신라의 최고위직인 상대등(上大等)이었다. 상대등은 귀족 회의체의 구성원들인 ‘대등(大等)’의 대표 격인 존재이다. 따라서 상대등은 어떤 경우에는 왕권과 대립되는 성격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상대등을 정점으로 하는 신라의 정치 제도는 귀족들의 합의를 근간으로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의 세력이 강성할 수밖에 없었다.

집사부와 그 장관인 중시의 설치는 신라의 정치 제도를 상대등과 귀족 회의 중심에서 왕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집사부는 왕명을 전달하고 그것의 집행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집사부가 여러 관청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을 대신하여 집사부 중시가 여러 관원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중시는 귀족들의 대표인 상대등과 다르게, 왕의 행정적 대변자라 할 수 있었다.

중시는 귀족 중 가장 높은 인물이 임명되는 것도 아니었고 규정과 달리 관등이 낮은 인물이 임명되는 사례도 종종 있어서, 지니고 있는 지위나 신분 보다 맡은 바 직무를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의 근친이 임명되는 사례가 많았는데, 왕의 가까운 인물을 행정 기구의 요직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방파제 내지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케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왕을 대신해 중시가 물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집사부와 그 장관인 중시는 왕을 대변하는 동시에 왕권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5 신라 하대 집사성과 귀족 세력

이처럼 집사부는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관청이었다. 그런데 집사부가 끝까지 왕권을 대변하고 또 왕권을 수호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만은 아니다. 집사부는 왕권이 크게 강화된 통일 이후 신라 중대에 더욱 더 중요성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집사부의 중요성이 새로운 세력을 성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중시로 임명된 인물이 왕의 장인이 되는 사례가 33대 성덕왕(聖德王), 34대 효성왕(孝成王), 35대 경덕왕(景德王), 36대 혜공왕(惠恭王) 대에 연이어 일어나는데, 이는 중시로 임명된 인물의 가문이 새로운 유력 귀족 가문으로 성장함을 의미한다. 즉 중시(시중)는 기존의 귀족 세력과는 성격이 다르게 왕권을 보좌하는 관료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그 지위의 중요성 때문에 새로운 귀족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시(시중)로 임명된 인물이 중시(시중)를 그만두고 상대등으로 임명되는 사례가 늘어난다. 이는 중시(시중)가 요직이 된 결과 중시(시중)를 거친 사람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시(시중)직이 왕의 측근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유력 진골 귀족이 요직인 중시(시중)직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 경우 중시(시중)직은 왕권의 대변자이자 보호자라기보다 왕권의 경쟁자가 되었다. 실제로 신라 하대에는 선덕왕(宣德王), 헌덕왕(憲德王), 흥덕왕(興德王), 신무왕(神武王), 민애왕(閔哀王) 등 시중직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다수 확인되어, 집사성 및 시중직이 귀족 세력의 기반이 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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