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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

훌륭한 신하와 장수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다

미상

1 요약정보

화랑도(花郞徒)란 신라에 있었던 화랑(花郞)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구성된 청소년 집단을 말한다. 화랑이란 ‘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으로 국선(國仙), 화판(花判) , 선랑(仙郎) , 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화랑도는 함께 수련하고 가무를 즐기며 유람하였으며, 여기에서 인재가 많이 길러지고 발탁되어 특히 삼국 통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제도의 성립

제도로서 화랑도의 시작은 576년(진흥왕 37)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원화(源花)로 삼아 받들게 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질투해 죽이는 일이 발생하여, 대신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 하고 그를 받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때 설원랑(薛原郞)을 국선으로 삼은 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14년 전 대가야(大加耶)를 멸망시킨 전쟁에서 활약한 사다함(斯多含)이 화랑이었다고 되어 있어 화랑도의 시작 연대는 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제도를 시행한 것은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뒤에 발탁해서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연령 집단(age group)으로서 청소년 집단의 기원은 삼한(三韓)의 읍락(邑落) 공동체에서 찾기도 하는데, 신라에서는 이를 제도화하여 인재를 구하고 양성하는 데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다만 그것을 완전히 법제화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전통이 신라 말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구성과 활동

화랑도, 즉 화랑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한 시기에 몇 개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7개 이상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신라 전 시기에 걸쳐 화랑이 모두 2백여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구성을 보면 먼저 화랑은 귀족 자제 중에 아름다운 이를 뽑아 삼았으며, 자발적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낭도가 되었다. 낭도의 신분에 대해서는 왕경 지역의 평민까지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화랑도에는 불교 승려들의 관련성도 보이는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세속 5계를 받았다든지, 월명사(月明師)가 기파랑(耆婆郞)을 찬하는 향가를 지었다든지 하는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화랑도의 명적을 풍류 황권(風流黃券) 또는 황권이라고 하였는데 승려도 여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화랑도의 일상적 활동은 수련과 가악, 그리고 유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들이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겼으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죽지랑(竹旨郞)의 낭도 득오(得烏)는 풍류 황권에 이름을 올려 놓고 매일 출근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일정하게 모여서 수련을 하였을 것이다.

화랑도가 연마한 도의에 대하여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어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하는데, 그것은 3교(三敎)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으로는 ‘들어오면 집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도교의 가르침으로는 ‘무위의 일을 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행함[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불교의 가르침으로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듦[諸惡莫作諸善奉行]을 들고 있다. 이는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전했다고 하는 세속 5계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속 5계는 잘 알려진 대로 ‘임금 섬기기를 충으로써 할 것[事君以忠]’,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할 것[事親以孝]’, ‘친구 사귀기를 신으로써 할 것[交友以信]’,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 것[臨戰無退]’, ‘생명 있는 것을 죽일 때 가려서 할 것[殺生有擇]’을 말한다.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두 사람이 충도(忠道)를 집지하고 큰 과오가 없기를 맹세하였는데 이 역시 화랑도의 수련 전통과 통하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4 제도화의 목적과 기능

화랑도를 국가적으로 제도화한 것은 인재의 양성과 발탁에 목적이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화랑도가 일상적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신하로는 김유신(金庾信)의 동생 흠순(欽純)을 들 수 있다. 그는 화랑 출신으로 삼국 통일 전쟁에도 참전했고 장년에 이르자 문무왕이 관작을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는데, 윗사람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백성을 대할 때는 관대하게 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화랑 출신들이 두드러지게 활약한 분야는 역시 군사 분야였다. 대표적인 장수로는 사다함, 김유신, 유신의 동생 흠순, 흠순의 아들 반굴(盤屈), 김품일(金品日)의 아들 관창(官昌), 유신의 아들 원술(元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김유신, 김흠순 등은 장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반굴, 관창 등은 임전무퇴의 가르침에 따라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김대문(金大問) 『화랑세기(花郞世記)』의 유명한 구절,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는 것은 화랑도의 이러한 기능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화랑도의 조직이 신분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점에 주목하여 그것이 골품제(骨品制)라고 하는 신라 신분 제도의 경직성을 완화, 보완하는 기능을 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5 성격

화랑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재 양성, 선발을 위한 제도였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청소년 집단으로서의 성격이다. 화랑도의 기원을 농경 사회인 삼한의 촌락 공동체에서 발생한, 연령 집단(age group)으로서의 청소년 조직에서 찾기도 하였다. 즉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을 바탕으로 성년식에서의 ‘시련’, ‘남자 집회소’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인류학적인 조사나 연구 결과와 결부시켜, 삼한 사회에서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남성들이 비밀 결사를 만들어 집회소를 중심으로 성년이 될 때까지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둘째, 불교적인 성격이다. 화랑이 미륵 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일찍이 많이 지적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유사』의 미륵선화 미시랑조와 김유신의 용화향도(龍華香徒)에 잘 나타나 있다. 전자는 진지왕 대에 승려 진자(眞慈)가 항상 미륵이 화랑으로 화(化)하여 세상에 출현할 것을 서원(誓願)하였는데 그것이 이루어져 미륵선화를 미시랑(未尸郎)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많이 따랐으며 그것을 용화향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용화(龍華)’란 미륵이 후세에 인간 세계에 내려와서 설법을 한다는 장소인 용화수(龍華樹)에서 나온 말로 미륵을 뜻하며, 향도는 이를 신앙 대상으로 삼는 신자 집단을 의미한다. 즉 화랑인 김유신을 미륵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 중고기(中古期, 6~7세기)의 왕들이 자신을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교하기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미륵 신앙에서는 전륜성왕의 치세 때 미륵이 내려온다고 하였는데, 신라에서 화랑을 내세운 것은 바로 그러한 이상향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무사도(武士道)로서의 성격이다. 이것은 반굴이나 관창과 같은 화랑이 삼국 통일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고 목숨을 바친 점에 주목한 것이다. 국가 혹은 왕에 대한 충성은 전통 시대부터 강조되었지만, 일제 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것을 일본의 무사도와 비교하여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후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화랑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희생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 활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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