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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 회의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그만 두었다

미상

1 개요

『신당서(新唐書)』신라전에서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중신(衆臣)과 의논하는데 그것을 화백(和白)이라고 하며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그만 두었다”고 하여, 신라에 합의제 회의체의 전통이 있었으며 그것을 ‘화백’이라고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실체와 관련해서는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우지암(亏知巖)을 비롯한 사영지(四靈地)에서의 회의가 많이 거론되었고, 중고기(中古期) 금석문에 나오는, 고위 관등(官等)을 보유하되 특정한 직(職)이 없는 ‘대등(大等)’이 바로 이러한 회의체의 구성원이고 신라의 최고 관직 ‘상대등(上大等)’이 그 의장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화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국왕 혹은 집정자가 주재하는 남당(南堂) 및 정사당(政事堂) 회의를 중요한 회의체로 파악하기도 한다.

2 화백에 대한 기록과 신라의 최고 회의체

신라의 최고 합의제 회의체를 일반적으로 ‘화백 회의’라고 하지만, ‘화백’이라는 말 자체가 쓰인 것은 『신당서』신라전의 기사가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수서(隋書)』신라전에 이와 유사한 설명이 있는데, “큰 일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상세히 논의하여 정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특정 시기 신라에 중대사를 논의, 결정하는 회의체가 있었으며 그것이 합의제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그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먼저 『삼국유사』 기이(紀異) 진덕(여)왕조에 보이는 우지암(亏知巖)을 비롯한 사영지(四靈地)에서의 회의가 주목되었다. 그 내용은 당시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무림공(茂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남산(南山) 우지암에 모여 국사를 논의하였으며, 또 신라에는 네 곳의 영지가 있어 대사를 논의할 때 대신들이 꼭 그곳에 모였는데 모의하면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임의 구성원은 대체로 진골(眞骨) 귀족 출신의 대신으로 파악된다. 진덕여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알천에게 섭정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알천이 이를 사양하고 김유신과 함께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을 추대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때에는 귀족 회의의 결정을 누르고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김춘추가 즉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한 6~7세기 금석문에서도 공론(共論)을 통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공론에 참여한 사람들을 「단양 신라적성비」에서는 ‘대중등(大衆等)’, 「진흥왕 순수비」에서는 ‘대등(大等)’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높은 관등(官等)을 보유하되 특별한 직(職)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 신라의 최고 관직으로 알려져 있는 상대등(上大等)이 이러한 대등 회의의 의장이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지암 회의에서 수석에 앉았던 알천공 역시 당시 상대등이라는 관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6세기 초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신라비」(503)나 「울진 봉평신라비」(524)의 경우 회의 참여자의 구성이 왕, 즉 마립간과 왕이 직접 관할한 훼부(喙部)나 사훼부(沙喙部)의 고위 관등 보유자, 그리고 ‘간지(干支)’를 칭하는 나머지 부의 장(長)으로 되어 있었다. 즉 531년(법흥왕 18) 상대등이 설치되기 전에는 왕이 이러한 회의체를 주재하였으며, 각 부의 부장들이 여기에 참석하여 6부 회의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회의체의 장으로 상대등을 임명함에 따라 왕은 그로부터 초월적인 존재가 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신라에서 최고 회의체는 훼부 소속 마립간이 주재한 6부의 부장 회의에서 출발하여 왕권의 신장에 따라 왕이 회의체를 초월해 나가고 새로 상대등을 임명하여 회의를 주관하게 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진골 대신들이 참여하였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진지왕의 폐위 나 왕의 후사 문제에 간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화백 회의를 남당(南堂)이나 정사당(政事堂)에서 열린 회의로 이해하기도 한다. 남당은 첨해이사금 3년(249) 궁 남쪽에 지은 것으로 도당(都堂)이라고도 하였는데, 왕이 여기에서 정무를 보았으며, 비가 오지 않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친히 정치와 형벌의 잘잘못을 묻기도 하였다. 이처럼 남당은 왕의 정청(政廳)으로서 여기에서도 국왕과 신료들이 합좌하여 국정을 논의한 곳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정사당은 일성이사금 4년(137) 금성에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헌덕왕대 이곳에서 상대등 충공(忠恭)이 인사를 진행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唐)이나 고려의 정사당이 재상이 주도하여 정사를 의논하던 장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라의 정사당 역시 상대등과 같은 집정자가 중신들과 정사를 의논한 곳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남당 회의와 정사당 회의는 유형이 다르고 시기에 따른 변천도 있었지만 화백 회의의 중요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성격과 인식

이상과 같은 합의제 회의체의 전통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여러 부(部)의 장, 즉 대·소가(大·小加)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으며, 이를 제가 회의(諸加會議)라고 한다. 후기 귀족 연립 체제에서는 귀족들이 대대로(大對盧)를 선출하여 그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백제의 경우에도 수상인 상좌평(上佐平)을 투표로 선거했다는 이른바 정사암(政事巖)의 고사가 전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고대 국가에서는 합의제 회의 기구가 광범위하게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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