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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도감

무신 집권자의 권력 남용 기구

1209년(희종 5) ~ 1270년(원종 11)

1 개요

교정도감(敎定都監)은 고려 시대의 무신집권기에 설치·운영되었던 정치 기구였다. 최충헌(崔忠獻)을 비롯한 무신집권자들이 이 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였던 모습을 사료에서 볼 수 있다.

2 무신의 시대, 그리고 최충헌의 등장

1170년(의종 24), 고려에서 무신정변(武臣政變) 즉 무신들이 일으킨 난이 터졌다. 정중부(鄭仲夫) 등 국왕을 호위하던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고려는 후삼국 시대라는 긴 전란기에 세워져 수많은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룬 나라였다. 군사력을 갖춘 지방의 유력자들, 당시에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으로 지칭되었던 이른바 ‘호족(豪族)’들은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고려 조정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야 했다. 왕실과 조정의 입장에서는 이제 평화적인 문치(文治)를 통해 국가를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질수록, 행정을 담당하는 문신(文臣)들의 역할과 위상이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관리들이 서로의 자녀들을 혼인시켜 인맥을 형성하고, 이들의 자손들이 음서(蔭敍)와 과거(科擧)를 통해 대대로 관리가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왕실과 혼인을 맺은 집안들이 명문으로 대두하였다. 이른바 ‘문벌(文閥)’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 중기로 접어들면서 이들 문벌이 고려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벌에 속한 인물들이라고 해서 모두 탐욕에 찬 악인들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들 중에는 명망 높은 정치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인종(仁宗) 대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벌어지듯, 권력을 둘러싸고 추악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종의 아들인 의종(毅宗)의 시대로 접어들어, 고려 정계는 점차 나태와 태만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조정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 의종은 측근 문신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시를 지으며 노는 향락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서 소외된 무신들은 점차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고려 정계의 권력 지형은 완전히 뒤엎어졌다. 이제 무신들, 특히 핵심적인 권력을 쥔 무신 집권자가 왕을 허수아비처럼 옆에 두고 정치를 농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들 내부에서도 권력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갈등이 벌어졌다.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정중부, 이의민(李義旼), 경대승(慶大升) 등 여러 무신들이 서로를 제거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스러졌다. 그리고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고 정점에 올랐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이른바 ‘최씨 정권’의 시작이었다.

3 암살 위험에 시달린 최충헌, 교정도감을 설치하다

최씨 정권은 이후 4대에 걸쳐 약 60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적인 설명이고, 최충헌 본인은 여러 차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의 대상이 되었다.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쥐었던 동생 최충수(崔忠粹), 외조카인 박진재(朴晋材)도 최충헌과 알력을 빚다가 제거되었다. 비록 미리 적발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1198년(신종 1)에는 그의 집 노비인 만적(萬積)이 이른바 ‘만적(萬積)의 난’을 꾸미면서 자신의 주인인 최충헌을 죽이려 하였다. 1203년(신종 6)에는 노비들의 군사 연습이, 1204년(신종 7)에는 최충헌에 대한 암살 모의가 적발되었다.

1209년(희종 5), 또 한 차례의 암살 모의가 드러났다. 교정도감이 설치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므로, 이에 대해 사료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자.

그 해 4월, 우복야(右僕射) 한기(韓琦)와 장군(將軍) 김남보(金南寶) 등 9명이 사형을 당하고 그 세력은 유배를 당하였다. 한기의 세 아들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 한기에 대한 다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정2품 문신인 우복야였으므로 정계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형을 당한 것은 최충헌에 대한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역참 중 하나인 청교역(靑郊驛)의 역리(驛吏) 세 명이 공첩(公牒)을 위조하여 여러 절에 보내 승도(僧徒)들을 불러 모은 일이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섬기는 승려들이 무슨 난에 가담하겠는가 싶을 수 있지만, 실제로 몇 해 뒤인 1217년(고종 4)에는 여러 절의 승려들이 개경에서 최충헌을 죽이려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오래 전 숙종(肅宗) 시대의 ‘여진(女眞) 정벌’ 때에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면서 승려들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부대로 편성한 일도 있었다. 고려 시대에 승려들은 유사시에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다른 절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귀법사(歸法寺)에서는 공첩을 받고 이를 최충헌에게 알렸다. 이에 최충헌은 금(金)의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인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설치하고, 개경의 성문을 닫은 뒤 그 일당을 수색하였다. 그 조사 결과 이 일에 한기 등이 연루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그 결과 위와 같은 처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관련 자료의 전부이므로 이 일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이 ‘교정별감’이 설치되었다는 첫 번째 사료이다. 이름이 다르므로 ‘교정별감’은 그 이전에 이미 설치된 ‘교정도감’의 지부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은 기구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중요한 것은 최충헌이 자신에 대한 역모를 조사하고 처리하기 위해 이미 존재하던 국가 기구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별도의 조직을 설치하였다는 점이다.

4 교정도감, 권력 남용을 통한 정치 농단의 도구가 되다

교정도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무릇 시행하려는 것은 반드시 교정도감에서 나오게 하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열전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교정도감이 ‘여러 가지 일[庶事]’을 담당하였다고 묘사되었다. 즉 교정도감은 최충헌이 여러 분야에 대해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데에 쓰인 핵심 기구였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교정도감은 오랜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그 운영에 대한 규정이나 사례들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몇몇 사례를 통해 그 기능을 추정해야 하는데, 위의 묘사가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우선 사료에 남아있는 교정도감의 활동상을 살펴보자.1227년(고종 14) 2월, 최우는 교정도감으로 하여금 궁궐 내의 여섯 관청에 지시하여 과거 급제자 중 아직 관직을 받지 못했지만 재주와 덕행이 있는 사람들을 천거해 올리도록 하였다. 무신집권기의 인사행정은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기보다는 권력자와의 연줄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에 급제하고서도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최우는 이러한 사람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모으곤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와 같은 당대의 문사(文士)도 이런 경우였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서방(書房)에 머물며 최우의 문객이 되었다. 위의 경우에는 자신의 문객으로 삼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조정의 관직을 부여하기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자라면 사적인 목적으로 국가 기관을 이용한 것이며, 후자라고 해도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정방(政房)이 있으니 비정상적인 일이다.

1228년(고종 15)에는 교정도감이 승려와 지방관 간의 갈등에 개입한 모습이 보인다. 한 승려가 자혜원(慈惠院)을 짓기 위해 강음현(江陰縣)에서 나무를 베었다. 하지만 강음현의 지방관인 감무(監務) 박봉시(朴奉時)가 이를 금지하고 이미 벤 나무는 관청으로 거두어들였다. 이 승려는 연줄이 많았는지, 포기하지 않고 당시의 권력자를 통해 박봉시에게 계속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탁을 받은 최우가 교정도감으로 하여금 공문서를 보내 승려의 말을 들어주라고 지시한 모습이 보인다. 정당하게 집행된 지방관의 업무에 대해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압력을 행사하려 하였고, 이것이 교정도감을 거쳐 하달되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250년(고종 37)에는 최우에 이어 그 아들인 최항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최항은 교정도감의 수장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 지위 명의로 공문서를 발송하여 청주(淸州)와 안동(安東) 등 여러 지역에서 올려야 할 공물들 및 잡다한 명목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각지에 파견되었던 교정수획원(敎定收獲員)들을 불러올렸다. 이름으로 보아 교정도감 소속이었을 교정수획원들은 각지에서 수탈을 일삼아 많은 민원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이 거두어들인 공물과 잡세는 중앙 정부가 거두는 조세였을 수도 있으나, 교정도감의 재원으로 쓰일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최항이 교정도감 조직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공물과 세금을 거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교정도감은 원래 설치되었던 목적에 가깝게 운용되기도 하였다. 1257년(고종 44)에는 몽골에 투항하려 한 별장(別將) 이성의(李成義)와 유거(劉巨)에 대한 첩보가 교정소((敎定所), 즉 교정도감에 보고된 일도 있었다. 이들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그 조사와 처형을 전반적으로 관리한 곳은 분명 교정도감일 것이다. 한편 1264년(원종 5)에 국왕 원종(元宗)이 당시의 무신집권자인 김준(金俊)을 교정별감으로 임명하면서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도록 하였다’라고 한 점도 이러한 기능과 관련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찰 기능은 최충헌이 처음 이 기구를 세웠을 때의 목적에 가깝다. 또 역모를 꾸민 자들을 처분한 뒤에 이들의 재산을 나눠주는 일에도 교정별감이 개입했던 모습이 고문서인 「수선사내로선전소식(修禪社乃老宣傳消息)」에 담겨 전해진다.

교정도감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를 고려 조정의 관료 제도 최상층에 자리 잡고 제도적으로 국가 기구를 총괄하는 기관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이보다는 군사력에 기반한 무신집권자가 활용한 여러 기관 중 하나일 뿐으로 여기기도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교정도감이 최충헌을 비롯한 해당 시기의 무신집권자의 뜻을 구현하는 기능을 지녔으며, 이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사료에 남아있는 그 모습은 대개 무신집권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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