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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

고려 엘리트의 산실(産室)

992년(성종 11)

국자감 대표 이미지

경기 개성 성균관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국자감(國子監)은 고려 시대에 수도인 개경(開京)에 설치되었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중국 당(唐) 시기에 있었던 최고 교육기관의 명칭을 고려에서도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호칭이 바뀌며, 사료에 따라 ‘국학(國學)’이라고 지칭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해당 관련 사료에 나온 표현을 위주로 이들 용어를 혼용하겠다. 이 기관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선거지(選擧志)」에 수록된 ‘학교(學校)’ 조에 주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는 사료의 내용을 토대로 고려 초기부터 후기까지 국자감의 변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고려 초기의 설치와 정비

『고려사』에는 국자감이 992년(성종 11)에 창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교서(敎書)를 내려, 담당 관청이 좋은 입지를 살펴서 구하여 널리 서재(書齋)와 학사(學舍)를 짓고, 전장(田莊)을 헤아려 지급하여 학교의 양식에 충당하게 하도록 하였다. 또 국자감을 창설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가 918년(태조 1)에 건국되었으니, 나라가 세워진 지 74년 만의 일이다.

이처럼 사료에 명확하게 기재가 되어 있지만, 그 정확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다. 이때를 실제 창설 시점으로 보는 견해, 태조 시기부터 국학(國學)이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명칭이 바뀐 것이라는 견해, 성종대 초반의 어느 시점에 창설되었다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이는 위의 「선거지」 이외에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 수록된 기록과 묘지명(墓誌銘) 등을 통해 볼 때, 992년(성종 11) 이전에 국립학교가 개경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첫 설치 시점에 대해서는 이렇듯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992년(성종 11)에 국왕의 명에 의해 개경에 국립학교가 대대적으로 설치 혹은 정비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고려 조정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던 모습은 태조대부터 보인다. 태조는 이미 930년(태조 13)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설치하였다. 성종대 이전의 사료는 매우 소략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지만, 문한(文翰) 기관 등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즉위 초반부터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써, 지방으로부터 학생들을 불러올리기도 하고 지방의 교육 기반을 확충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교육에 대한 관심은 이미 앞선 시기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문화적 분위기가 이어진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자감의 제도는 성종대 이래로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 우선 국자감의 관직에 대해서는 『고려사』의 「백관지(百官志)」에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대개 제거(提擧)·동제거(同提擧)·관구(管勾)·판사(判事)·국자좨주(國子祭酒)·국자사업(國子司業)·국자승(國子丞)·국자주부(國子注簿)·국자박사(國子博士)·태학박사(太學博士)·태학조교(太學助敎)·사문박사(四門博士)·사문조교(四門助敎) 등의 관직이 설치되어 국자감을 운영하였다.

국자감에서 주로 담당하였던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고급 교육, 특히 정치의 바탕이 되는 유학(儒學) 교육이 핵심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려 초기에 국자감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전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전문기술학 분야를 국자감에서 교육하였다는 점이다. 고려는 태조대에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울 때에도 서업(書業)과 의업(醫業)·복업(卜業) 과정을 설치하였다. 이는 고려 초기에 지향했던 국립학교의 역할이 유학 교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기술학 분야에 대한 연구와 강습을 포함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교육은 모든 일반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관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자감의 교육과 운영은 관리 지망자 양성 및 선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이 점에서 ‘국자감시(國子監試)’라고 지칭되었던 시험이 주목된다. 이 시험이 국자감 입학과 관계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대체로 과거 본고시인 예부시(禮部試)의 예비 고시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예비 고시의 설치는 이전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국자감시’라는 명칭이 부여된 것은 1031년(덕종 즉위) 윤10월의 일이었다. 한편, 과거의 예비 고시 시행뿐만 아니라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도 국자감이 관련되었다. 1036년(정종 2) 7월에 국왕의 명령으로 국자감생으로서 3년 간 수학한 뒤에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고려 초기에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신분제 운영과 관련하여 논란이 야기되기도 하는데, 일단 성종대에 지방의 인재들을 개경에 모아 가르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 그 대상을 짐작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지방 유력자들의 자제였을 가능성이 높겠으나,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만 지방관이 총명하게 여겨 국학에 입학시켰던 훗날의 명신(名臣) 이주좌(李周佐)의 예처럼 유력 가문이라는 배경이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3 고려 중기의 제도 개편

공교육과 사교육의 수준과 선호도에 대한 논란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했다. 공교육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국자감의 위상도 시기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성종대처럼 강력하게 지원을 하며 육성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국자감의 운영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대두하는 시기도 있었고, 각종 개편안이 모색되던 시기도 있었다.

1063년(문종 17) 8월, 국왕 문종(文宗)은 국자감의 학습 분위기를 쇄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자감 학생 중에 학업을 그만두는 자가 많은데, 이는 학관(學官)들 탓이니 앞으로 잘 가르치라는 지시였다. 또 학생들 중에서도 오래 재학하면서 성과가 없는 자들은 퇴출하도록 명하였다. 문종이 당시 국자감의 분위기가 상당히 나태해졌다고 판단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종대에 최충(崔沖) 등의 명신들이 제자를 양성하여 이른바 ‘12도(徒)’라고 일컬어질 만큼 사학(私學)들이 흥성하고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현상이다. 국학의 부진과 사학의 약진 중 어느 것이 선행한 것인지 명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은 분명하다. 비록 이행되지는 않았으나, 1102년(숙종 7) 윤6월에 재상 소태보(邵台輔) 등이 비용 과다를 이유로 국학을 폐지하자고 건의했던 사건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파생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으로는 국자감을 진흥시키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기도 하였다. 윤관(尹瓘)에게 여진 정벌을 지시한 것으로 유명한 국왕 예종(睿宗)은 국자감 진흥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 인물이다. 예종은 청연각(淸燕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지어 책을 소장하고 학사들과 토론하는 등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인 군주였다. 그는 즉위 초반부터 국자감을 활성화시키려 노력했다. 이와 관련하여 1109년(예종 4) 7월, 국학에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 등 특정 경전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7재(七齋)를 설치한 사실이 주목된다. 여진과의 갈등을 빚고 있던 시대상이 반영되었던 것인지, 이 중에는 무학(武學)을 전공하는 재(齋)도 있었다. 7재의 구체적인 운영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지 않지만, 대체로 7재는 특정 분야에 대한 한층 더 상위의 교육을 수행하였으며, 이 무렵 송(宋)에서 시행되었던 삼사제(三舍制)의 운영 방식이 참조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은 널리 공감되고 있다. 교육 내용도 경학(經學) 수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고, 과거제 역시 이에 연동하여 조정되었다. 또한 예종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국학의 재정에 보탬이 되게 하고, 운영 인력을 충원·강화하여 내실을 기하려 하였다. 국자감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고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는 한편, 국자감 재학이 당시인들의 주요 관심사였던 과거 급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던 모습으로부터, 전방위적으로 국자감을 진흥하려 하였던 예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예종의 아들인 인종(仁宗) 때에는 국자감의 학식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이 학식에서는 국자감의 입학 자격과 정원, 교수자 관련 규정, 교육 내용 및 교과 과정이 전반적으로 다루어졌다. 학식에 따르면 국학은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으로 나뉘며, 각각 선대의 관직 고하에 따라 입학 자격이 부여되었다. 각각의 정원은 300명이었다. 죄인이나 천인의 자손 등은 입학이 불허되었고, 율학·서학·산학도 여전히 국자감에서 교육하였다. 교과목은 『주역』, 『상서』, 『주례(周禮)』, 『예기(禮記)』, 『모시』 및 『춘추(春秋)』의 『좌씨전(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효경(孝經)』, 『논어(論語)』, 『국어(國語)』, 『설문(說文)』, 『자림(字林)』, 『삼창(三倉)』, 『이아(爾雅)』였으며, 산술과 시무책, 글씨도 배웠다고 한다. 다만 내용이 소략하고 앞뒤 시기의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그 해석에는 여러 이설(異說)이 존재한다. 가령 실제로 선대의 신분에 따라 입학자격이 나뉘었는지, 정원이 총 1,000명에 육박하였는지에 대하여 이견들이 제시되어 있다. 묘지명(墓誌銘) 등의 당대 자료에 기재된 내용 등과 비교 검토를 토대로, 실제로 이렇게 국자감이 운영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편, 인종대에는 무학재(武學齋)가 폐지되어 국학의 기능이 축소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재학 중에 시험을 보아 과거시험의 초기 단계를 면제하여 주는 등의 활성화 시책도 역시 펼쳐졌다.

4 고려 후기의 변화

인종의 아들인 의종(毅宗) 때에는 무신정변(武臣政變)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고려 사회의 운영 방식과 분위기는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100년에 달하는 무신집권기 동안 『고려사』에 국자감의 운영에 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다. 비록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문신 양성의 중요한 산실인 국자감이 중시되지 못했을 것임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에서 국자감에 관한 기록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원(元) 간섭기의 일이다. 100년간의 무신집권기, 그리고 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고려가 매우 피폐해진 뒤였다. 1280년(충렬왕 6)에 충렬왕(忠烈王)은 국자감에 경학과 역사서에 밝은 교수를 배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국자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302년(충렬왕 28)에 국자감의 박사들을 시험하였으나 제대로 경전에 통달한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1304년(충렬왕 30)에야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안향(安珦)의 건의로 왕실과 관료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중국에서 책을 사왔고, 이 때 비로소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공자(孔子)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을 지을 수 있었다. 충렬왕의 뒤를 이은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忠肅王) 때에도 학업을 장려하는 교서가 내려지곤 하였다. 국자감의 명칭은 이 시기에 성균관(成均館)으로 변경되기도 하였고, 이후 다시 국자감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공민왕대 중반부터 성균관으로 고정되었다. 이러한 진흥 분위기는 당시 최신의 사조였던 성리학(性理學)이 고려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어, 고려말 공민왕(恭愍王)의 시대에도 성균관은 크게 변모되었다. 공민왕은 1352년(공민왕 원년) 2월에 교서를 내려 유명무실해진 국학을 되살리고 생도를 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비록 정치적 혼란과 홍건적(紅巾賊) 및 왜구(倭寇)의 극심한 침략 때문에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었으나, 그 의지는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좨주(成均祭酒) 임박(林樸)이 상소를 올려 불타버린 국학을 다시 짓도록 요청하고, 아울러 정원을 늘려 100명으로 삼자고 하였다. 공민왕은 이를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등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지닌 관료들을 그 학관(學官)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최신 사조였던 성리학을 익히고 또 가르쳤다. 과거 시험에서도 경학의 비중이 높아졌다. 국왕의 지원과 새로운 학문의 유입, 그리고 열정적인 교수들의 노력에 힘입어 성균관의 향학열은 상당히 높아졌다고 한다. 공민왕의 사후 우왕(禑王)·창왕(昌王)·공양왕(恭讓王)의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격변 속에서 다소 또 부침을 겪었으나, 성균관과 이를 운영한 관료들, 또 여기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있었기에 훗날 ‘성리학의 나라’라 불리는 조선의 탄생이 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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