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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다

1232년(고종 19) ~ 1273년(원종 14)

삼별초 대표 이미지

진도 용장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무신정권의 무력 기반, 고려 최후의 보루가 되다

삼별초란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기 직전인 고려 고종(高宗) 초기, 아마도 1220년대에 당시의 무신 집정자 최우(崔瑀)가 수도 개경(開京)의 치안을 위해서 조직한 군대인 야별초(夜別抄)에 그 기원을 둔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뉘어졌으며, 여기에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인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불렀다. 삼별초는 최우, 최항(崔沆), 최의(崔竩), 김준(金俊), 임연(林衍)으로 이어지는 무신집정자들의 무력기반으로서, 강화 천도 시절의 강화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무신정권의 수호집단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김준, 임연, 송송례(宋松禮)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집권할 때마다 그들의 무력기반이 되었던 것은 언제나 삼별초였다.

한편 삼별초는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몽골의 거듭된 침입에 맞서 고려의 정규군이 거의 궤멸된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 정부가 보유한 유일한 정예군 조직이었던 삼별초는 기동성을 발휘하여 적진을 기습하거나 매복, 정탐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무신 집정자들이 사병의 성격으로 길러낸 부대가, 고려의 대몽항전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셈이다.

2 고려․몽골 강화의 성립과 삼별초의 봉기

1231년(고종 18) 시작되어 거의 30년 동안 이어졌던 고려․몽골의 전쟁은 고종 치세의 마지막 해인 1259년(고종 46) 드디어 종식되었다. 그동안 몽골이 꾸준히 요구해오던 항복의 조건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국왕이 몽골의 조정에 친히 오라는 것, 즉 친조(親朝)였고, 다른 하나는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라는 것, 출륙환도(出陸還都)였다. 이 가운데 국왕 친조의 문제는 당시 고종이 노쇠하였다는 이유로 태자가 대신 입조하는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양국은 일단 강화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이었던 출륙환도가 단행된 것은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170년(원종 11)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 집권자들이 한때 국왕을 폐위시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개경으로의 환도를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별초가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林惟茂)를 체포, 처단함으로써 무신정권의 종언과 개경 환도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막상 환도가 확정되면서 삼별초는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무신정권의 정치적 기반이자 몽골과의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아왔던 삼별초로서는 강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의군은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까닭에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1270년(원종 11) 5월, 환도 날짜를 확정하고 공표하자, 삼별초는 “다른 마음을 품고 명을 따르지 않으며 멋대로 창고를 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6일 후, 정부는 삼별초를 혁파해버렸다. 이에 바로 다음날인 6월 초하루, 삼별초는 반란을 공식화하였다.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 등의 지휘 하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삼고 관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러자 강화도에 머물던 관료 및 군사들의 상당수가 개경으로 탈출해버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삼별초는 관청과 개인 소유의 물건들을 거두어들이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반란을 공식화한 지 이틀 후의 일이었다. 삼별초 일행의 배가 1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3 진도에서

6월 3일에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가 진도에 도착한 것은 70여 일이 지난 그해 8월의 일이었다.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삼았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진도는 연해안의 가장 큰 섬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전부터 무신정권의 경제적, 종교적 기반이었던 전라도 남부 지역과도 가까웠다. 무엇보다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 지역으로부터 개경으로 올라가는 조운선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진도를 장악하면 한반도 서남해 연안의 지역들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해로를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개성을 압박할 수 있었다. 진도에서도 삼별초가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용장성(龍藏城)이었다. 이곳은 진도의 동쪽, 해상교통의 관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삼별초는 이곳에 둘레 약 13km의 석성을 쌓고 궁전을 지었다. 지금도 그 유적지가 잘 남아있다.

진도에 자리를 잡은 초기, 삼별초의 활동은 비교적 활발했다. 삼별초는 서남해안 일대는 물론, 동쪽으로는 김해까지, 그리고 배후지역으로 제주도까지 세력권 안에 넣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 몽골에 대한 연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내륙지역에서도 삼별초에 호응하려는 움직임이 일기도 하였다.

한편 개성의 고려 정부는 곧바로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를 편성하였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은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난 직후부터 추격을 시작하였으나, 본격적인 전투는 삼별초가 진도에 자리잡은 후인 그해 11월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첫 접전에서 몽골군의 원수 아해(阿海)와 고려의 원수 김방경(金方慶)이 모두 완패하면서 삼별초의 기세는 더욱 달아올랐다. 이에 고려는 몽골 황제의 조서를 앞세워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삼별초는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4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 준비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군사 6천 명에 군선 400척이 동원될 예정이었다.

5월, 1백여 척의 배에 실린 연합군은 3군으로 나누어 일시에 진도를 공격하였다. 김방경과 흔도(忻都)가 이끈 중군이 용장성에서 가까운 벽파정(碧波亭)으로 진입하였고, 홍차구가 지휘한 좌군이 장항(獐項)으로 상륙하였다. 연이은 승전으로 방심하고 있던 삼별초는 이 한 번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결국 진도를 내주고 말았다. 진도에 남아있던 수많은 군민이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고, 후퇴하던 자들도 1만여 명이나 붙잡히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 삼별초가 국왕으로 내세웠던 승화후 왕온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진도에서의 삼별초의 활동은 약 9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제주도에서

진도에서 참패를 겪은 삼별초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거점을 옮겼다. 동시에 남해(南海)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유존혁(劉存奕)도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합류하였다. 앞서 1270년(원종 11) 11월, 삼별초는 제주를 함락하여 진도의 배후기지로 삼고 있었다. 삼별초는 제주로 옮겨와서 곧바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이때 그들의 근거지가 된 것은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항파두성(缸波頭城)이었다.

제주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 전열을 정비한 삼별초는 이듬해 초에 다시 본격적으로 남해안 등 연안 지역에 출현하여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개경으로 운송되는 조운선을 공략하거나 고려군의 전함을 습격하는 등의 방식으로 고려 정부의 골머리를 썩게 하였다. 이들이 습격하여 빼앗아 간 미곡만도 수천 석에 달할 정도였다. 나아가 삼별초는 서해안을 타고 북상하여 충청도를 지나 경기 지역까지 위협하였고, 남해안을 타고 동진하여서는 몽골군이 주둔하고 있던 마산, 거제 등에까지 이르러 수십 척의 전함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삼별초가 제해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해안 지역이 텅 비어버리고 도로가 막히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몇 차례의 회유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몽골은 결국 삼별초 진압을 결정하고 고려에 군사 6천 명과 선원 3천 명을 선발, 준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흔도와 김방경을 원수로 한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개경을 출발하였다. 전라도의 함선 160척과 수군과 육군 총 1만 여 명이 나주에 집결하였다가 추자도(楸子島)를 경유하여, 4월에 이르러서는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곧바로 삼별초의 근거지인 항파두성을 공격하자, 김통정을 비롯한 지휘부 70여 명은 도망하였고, 대부분의 군사는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투항한 삼별초 1,300여 명은 내륙으로 보내졌다. 그 가운데 일부는 처형하였으나, 가담자 대부분은 불문에 붙였다고 한다. 이어서 윤6월에는 달아났던 김통정 등도 모두 시체로 발견되거나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삼별초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투가 마무리되자 흔도는 몽골군 5백 명을 머물러 있게 하고 김방경도 군사 1천여 명을 머물러 있게 하여 제주도의 백성들을 진무하게 하였다. 이후 몽골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황실 직속의 목마장을 설치하고,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관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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