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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정조 개혁 정치의 산실(産室)

1776년(정조 1)

규장각 대표 이미지

창덕궁 주합루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정조는 학문의 진흥을 통해 의리(義理)를 밝히고 흐트러진 정치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은 규장각 설립으로 이어졌다. 즉위 직후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규장각신(奎章閣臣)을 등용하여 근신(近臣)으로 우대하면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통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2 정조는 왜 규장각을 세웠을까?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 3월, 즉위 직후 창덕궁 후원(後苑)에 어제존각(御製尊閣)을 건립하게 했다. 처음에는 영조의 어제(御製)를 봉안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하여 어제각(御製閣)이라고 하였다가 이후 규장각(奎章閣)으로 개칭했다. 어제를 봉안하는 장소를 궁궐 안에 두는 것은 중국 송의 제도를 본받은 것인데, 세조(世祖) 때 송의 예에 따라 규장각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제로 규장각 건립은 숙종 때 이루어졌다. 숙종은 역대 왕의 글과 서책인 어제(御製)‧어서(御書)를 봉안하기 위해 종부시(宗簿寺)에 작은 전각을 별도로 건립하고 친필로 ‘규장각(奎章閣)’이라 써서 편액에 걸었다. 그러나 이때의 규장각은 규모나 제도가 갖추어진 기관이 아니라 단지 종부시의 부속건물에 불과했다.

정조는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여 사업을 이어나간다는 ‘계지술사(繼志述事)’의 원칙에 따라 유교적인 정치질서를 확고히 정착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숙종 때의 선례를 본받아 규장각을 설립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정조대의 규장각은 설립 당시부터 숙종대의 규장각을 넘어서는 큰 규모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역할을 갖게 되었다. 창덕궁 후원에 위치했던 규장각의 규모를 살펴보면 본각(本閣)인 규장각에 정조의 초상화 및 글‧글씨‧도장 등을 봉안하였고, 서남쪽의 봉모당(奉謨堂)에는 역대 왕들의 다양한 글‧글씨‧그림과 족보, 왕의 치적을 기록한 문서 등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정남쪽의 열고관(閱古館)과 그 북편의 개유와(皆有窩)에는 중국의 서적을, 서북쪽의 서고(西庫)는 우리나라의 서적을 각각 소장하였고, 서쪽의 이안각(移安閣)은 포쇄를 위해 사용하였다. 어제와 서적의 소장만을 담당하던 규장각은 1777년(정조 1) 12월 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건의로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귀속함에 따라 그 업무가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 국왕 관련 기록 및 각종 서적의 인쇄부터 반포‧소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목적은 단순히 선왕(先王)의 글과 서적을 보관‧제작하는 임무를 넘어서서 관료기강을 쇄신할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신을 가장 가까운 신하로 둠으로써 관료기강을 쇄신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1781년(정조 5) 2월 규장각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3월 전‧현직 각신(閣臣)들과 내각(內閣)의 이문원(摛文院)에서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한 후 각신들에게 정치적 혁신을 위한 보좌를 당부하면서 시상(施賞)했는데, 이는 근신(近臣)을 통해 척족(戚族)으로 인해 해이해진 관료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조가 내각을 설치한 후에 비로소 관각(館閣), 곧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이 갖추어졌다는 말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규장각은 여타 관사(官司)의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한 선도 기관이었다. 정조는 각신을 가까이 두고 문풍(文風)을 일으켜 학문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규장각신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런데 정조에게 학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의리(義理)를 밝히고 유교적 정치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문관(文官)이 학문적 소양이 없고 의리에 어두우면 반드시 나라는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함으로써 왕조를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3 규장각의 조직

규장각의 각신은 제학(提學) 2명, 직제학(直提學) 2명, 직각(直閣) 1명, 대교(待敎) 1명의 4개 직위 6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선발 기준은 학식과 덕행의 겸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신으로 임명된다는 것은 바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것이자 역량을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었다.

각신의 임명에 있어 다른 기관의 직임과 뚜렷하게 차이가 있는 것은 직위가 일정한 품계에 고정되지 않고 그 대상의 폭이 넓다는 점이다. 각신의 직위는 종일품(從一品)부터 정구품(正九品)까지 거의 모든 품계가 그 대상이 되었다. 또 제학‧직제학을 2명씩 선발한 것은 다른 직임에는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의 탕평원칙을 지키고 제때에 인재를 활용하려는 정조의 의도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내각에는 실무(實務)를 분담한 잡직(雜織)이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서적을 검토‧교정하고 필사(筆寫)를 담당한 검서관(檢書官) 4명이다. 이들은 모두 서얼(庶孼)에서 임명되었으며 비록 잡직으로 각신의 대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 재능을 인정받는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검서관 직제는 홍국영(洪國榮)이 학문을 높이 여기는 우문정치(右文政治)를 강화하기 위해 학문적 능력이 있는 서얼들까지 규장각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처음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던 이들이 바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였다. 검서관에 서얼을 임명하는 것은 신분제도를 뒤엎는 획기적인 조치는 아니었으나 적자와 서자 간의 불만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과정 속에서 추진된 개혁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검서관 제도는 기존 사회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는 범주에서 문명(文名)은 높으나 관직 진출이 불가능했던 서얼을 청요직에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4 규장각의 특권과 의무

규장각은 정조의 정책의지를 반영하는 선도기관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왕과 가장 가까운 기관이었던 승정원이나 홍문관보다도 더 가까운 기관이었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론보다도 각신의 언론이 더 중시되었다. 각신들은 수시로 왕과 접촉하면서 왕을 보좌하는 한편 일반정사에도 관여하였으며, 승지가 공적인 일로 임금을 대면할 때에도 함께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각신은 신분적으로도 보장을 받았는데, 각신이 잘못을 범하여 조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승정원을 통해 왕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각신은 관리의 죄를 물을 수 있는 탄핵권도 갖고 있었다. 이렇듯 각신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당시 관료사회에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782년(정조 6) 5월 이택징(李澤徵)이 모든 관료가 국왕을 대면할 때 반드시 승정원을 먼저 경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신들만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규장각이 국왕 개인의 사사로운 기관에 다름없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관료사회의 반응을 보여주는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각신에게는 왕의 근신(近臣)으로서 상당한 특권이 부여되기는 했지만 그에 따라 정해진 규정 또한 엄격하게 요구되었다. 이는 해이해진 관료기강을 쇄신하고 새로운 관료질서를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각신을 조정 신하의 표상으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과 가장 가까이 있는 각신에게는 행동에 규범을 갖추고 언행을 바르게 할 것이 더욱 강조되었다. 각신의 의례(儀禮) 규정(規定)은 자리의 위치부터 어떻게 기거할 것인가 까지 다양한 범위를 포괄하고 있었다.

5 초계문신의 교육

1781년(정조 5) 2월에 확립된 초계문신 교육은 각신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초계문신제는 과거를 거친 문신(文臣) 가운데 참상관(參上官)‧참하관(參下官)을 막론하고 37세 이하의 사람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40세가 될 때까지 교육하는 제도였다. 이렇듯 관료의 재교육을 실시한 목적은 경학(經學)과 역사(歷史)에 밝은 인재를 주축으로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이들을 내각에서 교육한 까닭은 바로 내각이 정조가 의미하는 인재 양성을 위한 총본산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내각에서 경전을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초계문신들은 매월 한 번씩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친시(親試)‧친강(親講)을 통해 시험을 봤다. 정조 때의 초계문신은 모두 10회에 걸쳐 138명이 선발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이후 높은 관직에 진출했으며 각신으로도 18명이 진출했다. 유학적인 정치사상을 관료사회에 부식시키려 했던 정조의 노력과는 달리 정조가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던 서학(西學)과 패관소품(稗官小品)이 관료사회에까지 침투하고 심지어는 초계문신 출신인 정약용(丁若鏞)‧정약전(丁若銓) 등이 서학에 연루 되는 등 정조의 의도와 다른 모습이 나타나자 정조는 실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 사후 김조순(金祖淳), 김재찬(金載瓚), 서유구(徐有榘) 등 많은 초계문신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의 주도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6 정조 사후의 규장각

정조대의 규장각은 문풍(文風)을 주도하면서 관리의 선발, 왕명(王命)의 작성, 역사서(歷史書)의 편찬 및 경학(經學) 연구 및 원자(元子)의 교육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정조 시대 중심기관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면서 규장각은 도서를 수장하고 관리하는 기관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고 편찬되는 서적의 양과 질 역시 현저히 떨어졌다. 규장각의 서적을 전란(戰亂)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1782년(정조 6)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설립하였지만, 외규장각 도서들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약탈되지 않은 도서는 전부 불에 타버렸다.

규장각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의 부속기관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명칭이 규장원(奎章院)으로 바뀌었다가 1897년(고종 34)에 규장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 1907년(고종 44) 봉상시(奉常寺), 종부시, 홍문관이 폐지되면서 그 사무가 규장각으로 이관되었고, 이후 규장각은 제실도서(帝室圖書)라는 이름으로 왕실과 각 관청의 도서를 수집하여 관장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규장각이 폐지되고 이왕직(李王職)의 임시도서실, 곧 장서각(藏書閣)에서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 산하 취조국(取調局)에서 규장각 도서를 접수하였고, 1912년 취조국이 폐지되고 참사관실(參事官室)이 생겨 이곳으로 규장각 도서가 이관되었다. 1919년 규장각 도서는 학무국(學務局)에서 수장하다 1930년에는 경성제대(京城帝大)에 신축된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규장각 도서들은 이처럼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혼란한 시기, 이관을 거듭하면서 증감을 거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규장각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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