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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중국을 배우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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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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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청을 배워 나라를 개혁하자

북학파(北學派)는 조선 후기 청(淸)의 학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의 학자들을 지칭한다.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낙론계(洛論系)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들은 청을 야만시하고 적대시하였던 관념에서 벗어나 청 문물의 선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였으며, 청의 문물을 수입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북학이란?

북학(北學)이란 용어는 유학 경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맹자(孟子)』 「등문공장구(騰文公章句)」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학문을 배우러 온 사람의 사례가 등장한다. 남쪽에 위치하여 오랑캐 취급을 받던 초나라 사람 진량(陳良)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道)를 좋아하여 북쪽 중국으로 유학하여 공부하였다. 그 결과 북방의 학자들 가운데 진량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맹자가 이 사례를 들면서 강조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문구이다.

나는 중화(中華)가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중화가 오랑캐에 의해 변화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결국 유학의 전통 속에서 북학이란 오랑캐가 오랑캐로 남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즉 중화 문명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진량이 주공과 공자의 도를 배웠다는 중원이 오랑캐에게 점령당한 경우라면 어떨까? 과연 그 중원에서 배울 만 한 중화 문명이 남아있을까? 또 그 오랑캐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면 어떨까?

3 북학파 형성의 배경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중화 문명의 담지자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점령한 오랑캐 국가 청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개심은 관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하던 조선의 국왕이 오랑캐에게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절을 하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었기 때문에 그 적개심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청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외교적 차원에서 그러한 적개심이 문제가 되어 청의 군사적 위협을 받는 일은 없었다. 조선은 청으로부터의 문물 수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양의 천문학‧역학(曆學) 지식을 반영한 청의 시헌력(時憲曆) 체계를 끊임없는 노력 끝에 조선에 도입하였던 것이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이 중국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는 사실이나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청이 오랑캐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감추어주지는 못하였다. 여전히 조선 지식인들에게 청은 오랑캐에 불과했다.

변화는 조선 집권 세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일련의 지식인들은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당시 집권세력의 핵심이던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으며, 또한 당시 조선 사상계를 주도하던 낙론계의 맥을 잇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수차례 북경(北京)으로 연행(燕行)을 다녀오며 청의 문물 및 학술에 익숙했다는 것도 공통적이었다. 비록 스스로를 ‘북학파’라는 명칭으로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서로 교류하며 청의 선진적 문물을 도입하여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 하였다.

청의 문물 도입은 이전부터도 지속되어 왔던 것이지만, 북학파의 주장은 기존 지식인들의 명분을 중시하던 화이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그들에게 청은 오랑캐 국가가 아니라 중화의 제도가 남아 있는 중원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물론 북학파의 인식이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 인식은 조선 사회가 쌓아온 철학적 논쟁 속에서 배태되었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볼 때, 북학파의 청에 대한 인식 전환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동일하다고 하는 낙론계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낙론계의 김원행(金元行), 김창흡(金昌翕) 등이 당시 조선의 정치‧사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 사회의 핵심부에서 새로운 사상적 기류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4 바른 덕을 유지하기 위한 ‘이용후생’

북학파가 청으로부터 배워 조선에서 달성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구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구호는 바로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제민(經世濟民)’이다.

먼저 북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홍대용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먼저 당시 조선의 학문과 사상계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홍대용이 당시 조선 사상계의 주류였던 주자학의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공자와 주자의 참된 뜻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하며, 특히 주자를 존숭하는 조선의 학자들은 그저 떠받들기만 할 뿐 의문이 생기는 구절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고 엄호하기만 한다고 한탄하였다. 그는 주자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절강 출신 중국인들과 토론하면서, 비록 주자학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이 너무 지나친 것 같기는 하지만 조선 학자들의 고루함보다는 훨씬 낫다고 평가하였다.

홍대용은 학문이란 의리(義理)를 근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경제(經濟)나 사장(詞章)이 아니라면 의리를 펴고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며 의리, 경제, 사장의 학문을 하나라도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의리의 학문이 근본이라는 전제 하에서 의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통치에 필요한 경제와 사장의 실용적인 학풍 또한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학풍은 그가 교류하던 박지원, 박제가 등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박지원은 유학의 경전 『서경(書經)』에 나오는 구절인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구절을 이용하여 홍대용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이 가능하며, 후생이 된 연후에야 바로 정덕이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은, 박지원이 왜 이용후생에 주목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음을 바로 지니기 위해 생활의 넉넉함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이은 것이며, 경제나 사장을 통해 의리를 펴고 드러내야 한다는 홍대용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박제가의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 학문이란 경세제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용하고 후생함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있다면 위로 정덕을 해친다고 하여 정덕을 이루기 위한 이용과 후생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는 공통적으로 이용과 후생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이용후생학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5 무엇을 배울 것인가?

북학파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을 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을까? 여기에서는 북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儀)』를 통해 북학파의 주장을 알아보고자 한다.

당시 조선은 농업 중심의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농업 생산력이 국력의 척도가 되었다. 따라서 박제가도 농업 생산력 증진을 위한 여러 방법을 논하였고, 이를 위해 중국의 선진 농업 기술과 제도가 소개 되었다. 농업을 중시한 박제가의 생각은 조선 중기 이래로 지속되었던 토지개혁론, 부세개혁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박제가가 농업 생산력의 증진만큼이나 중요시한 것은 상업과 유통 및 외국과의 통상이었다. 그는 당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되어 왔던 상업에 주목하여, 상업을 발전시키고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수레・선박・도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용한 물건을 유통시키고 거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쓸모 있는 물건이라도 대부분 한 곳에 묶여 있거나 홀로 떠돌다가 쉽게 고갈될 것이며, 상인들이 교역을 하지 않고 놀고먹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이 할 일을 잃게 될 것이었다. 박제가가 상행위를 통한 물자의 유통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업이 발달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국가의 지속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유통과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기반시설이 확보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교량이나 도로와 같은 기반시설은 개인의 힘으로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국가가 주도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인데, 자원의 소유 및 이동의 권한이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박제가는 상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유통 수단을 정비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수레나 선박과 같은 유통 수단이 잘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에도 도입하고자 하였다. 수레와 선박의 운용을 위해서는 도로와 교량을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수레바퀴의 크기가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르다면 그 운용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효율성을 위해서는 일정한 규격과 통일된 크기를 유지해야만 한다. 효율적인 건축을 위해 벽돌의 크기를 일정하게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시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량형을 일정하게 한다는 것은 국가의 장악력이 필요한 일이다. 상품의 유통, 도량형 통일에서부터 화폐 사용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구상은 강력한 행정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박제가를 중국의 강력한 국가주의적 개혁론자인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제가의 개혁론은 국가의 역할을 제외하고 논할 수는 없다.

비록 북학파가 ‘이용후생’을 강조하고 통치의 실용적인 수단에 주목하여 조선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의리나 정덕에 두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학이 조선 정치의 핵심 세력에서 배태된 학풍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북학파의 가치관이 새로운 것이기는 하였으되 조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그것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의 문물을 배우자고 주장하면서도, 청이 오랑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비록 청이 중원을 점령하여 천하 백성들이 변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중원에는 중화의 유풍이 온존하고 있었다. 박제가가 보기에 오랑캐가 중원을 점령하고 있다고 해서 중원에 남아있는 중화의 제도까지 내팽개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북학파 지식인들이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이유는 문화적 상대주의나 근대적 실용주의 사고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북학파의 개혁론의 의의를 평가 절하할 필요도 없다. 북학파는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중화’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청의 문물을 도입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이후 청의 인물과 제도, 문물 교류를 보다 확대시키는 촉진제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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