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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사림 정치의 전개

미상

붕당 대표 이미지

영조의 탕평비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붕당(朋黨)은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같은 인연을 매개로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국가의 공식적인 조직과 별개로 사사롭게 결성한 모임을 뜻한다. 붕당은 한 번 결성되면 몇 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들의 대립을 당쟁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 이후 사화(史禍)의 시련을 극복한 사림파(士林派)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사안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지역적, 학문적 연원의 차이로 인해 사림 세력 사이에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고, 그에 따라 조정에 붕당이 형성되게 된다.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을 시작으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서고 이후 서인 또한 노론과 소론이 분립하게 되어 이른바 사색당파가 성립되었다. 붕당간의 정치 투쟁인 당쟁은 조선 후기 이후 나라의 커다란 폐단으로 지목되어 영·정조 때에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어 당쟁을 해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고, 정국은 노론 일당의 장기 집권 체제가 지속되다가 세도정치로 변질되게 된다.

2 붕당의 개념

조선 시대 권력의 근원은 국왕이었고 국왕 중심의 왕조 국가에서 관료들이 붕당을 결성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중국 명의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에는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모두 목을 베어 죽이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 하고 규정되어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형법은 대명률을 준용한다고 하였으니 이 규정은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붕당을 형성하면 참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사화기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이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는 모두 붕당을 결성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은 바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존숭하는 주자학(朱子學)에서는 붕당을 긍정하였다. 주자학의 붕당론은 본래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에서 비롯되었다. 북송의 구양수는 붕당론에서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를 같이 함으로써 붕(朋)을 삼으며, 소인은 소인끼리 이를 같이 해 붕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구양수에 따르면 진정한 붕당은 군자에게만 있고, 소인은 이익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므로 소인의 붕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임금이 소인의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붕당을 기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붕당론은 북송대 신법당과 구법당의 투쟁 과정에서 이론적으로 발전하여 주자에게까지 이어졌다. 주자를 존숭하였던 조선의 사림 세력은 이러한 붕당론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처한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구조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3 붕당 정치의 전개

1) 동서분당; 붕당 정치의 시작

동서분당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자리를 둘러싼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 심의겸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의 손자이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였고 명종(明宗) 때의 권신 이량(李樑)의 조카였다. 그는 이량에 맞서 사림을 적극 보호함으로써 사림의 신망을 얻었지만 김효원은 그를 척신이라고 배척하였다. 한편 김효원은 문장으로 이름 높은 선비로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신진 사림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심의겸은 김효원이 명종조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던 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비난하였다.

당시 이조정랑은 문관의 인사와 관련하여 정승, 판서를 제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또 언론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추천하고 재야인사에 대한 추천권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이 있었다. 자신의 후임을 스스로 지명하는 이른바 자대권(自代權)도 주요한 특권이었다. 이처럼 인사권과 언론권이 집중된 직책이기 때문에 이조정랑을 누가 차지하는가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갈릴 수 있었다.

이때 심의겸을 옹호했던 이들은 서인(西人), 김효원을 옹호했던 이들은 동인(東人)이 되었는데, 김효원의 집은 한양 동쪽에, 심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동인들은 대부분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계통의 인물이 중심이 되었고, 서인과 그 자제들은 대개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교우 및 문인들이었다. 동인 가운데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우성전(禹性傳) 등은 퇴계의 문인이고 김효원, 김우옹(金宇顒),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곽재우(郭再祐) 등은 남명의 문인이었다. 정구(鄭逑), 정탁(鄭琢) 등은 퇴계와 남명의 양쪽 문하를 모두 출입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 가시화되자, 이이(李珥)는 극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해 조정책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멀고 가까운 차이 때문에 그러한 조치조차 분란의 요인이 되었다. 이이는 당시 보다 우세한 세력이었던 동인을 억눌러 균형을 맞추려 하였기 때문에 서인을 편든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이는 힘닿는 데까지 동서 분당을 조정해 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정을 떠났고, 그가 물러난 뒤에는 더 이상 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2) 당파의 분열과 광해군대 북인의 집권

동서가 분당될 당시 동인의 세력이 강해 많은 사람들이 동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동인은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기축옥사 이후 동인에 비해 열세였던 서인은 정철(鄭澈)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분노를 입게 되자 정국은 다시 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은 정철을 논죄하면서 그뿐만 아니라 서인 모두를 대거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처벌의 범위를 가급적 줄여야 한다는 류성룡, 김성일, 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갈라졌다. 이때 강경파를 북인이라고 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치면서 의병을 많이 배출했던 북인 세력은 광해군(光海君)을 옹립하면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광해군을 옹립한 세력은 북인 가운데서도 대북(大北) 세력이었는데, 대북 정권은 광해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의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배다른 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계축옥사(癸丑獄事)와 같은 극단적인 정책에 더하여 광해군이 추진한 명나라와 여진 사이의 중립 외교는 사대부 사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3)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대북 정권을 무너뜨리고 인조(仁祖)를 추대한 세력은 기본적으로 서인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북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남인과 소북 세력까지도 정권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인조대 정권의 실세는 공신 출신의 서인들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과 혼인을 잃지 말고 산림을 우대한다.”는 방책을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인들 가운데서도 반정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재야 세력은 이들의 독주를 비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공서(功西)와 청서(淸西)의 대립이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공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화의를 주장한 반면, 청서는 척화를 주장했다. 정권을 잡은 입장에서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화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존주대의(尊周大義)의 명분을 고수한 청서는 이에 극력 반대했다. 결국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책을 관철시켰던 주화파는 오히려 명분을 잃고 쇠퇴하고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의 문인들로 구성된 호서산림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들 중 대표적인 정치가가 송시열(宋時烈)이다.

인조 이후 국왕에 오른 효종(孝宗)은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로 보아 북벌론(北伐論)은 실행될 가능성이 많지 않았다.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면서 군사를 길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송시열 또한 청에 복수하고 치욕을 갚자는 명분을 가지고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효종은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호서산림 중심의 산당(山黨)을 중용하지 않았다. 대신 김육(金堉)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한당(漢黨)에 의지하였다.

4) 현종대의 예송

현종대에도 효종대와 마찬가지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인조대 이후로 성장한 남인들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들의 도전과 응전은 두 차례의 예송(禮訟)으로 드러났다. 예송은 왕실의 장례 의식과 관련하여 어떤 학설을 따라야 하는지를 놓고 벌인 논쟁이다. 하지만 예송은 단순히 의례 절차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국왕과 사대부의 위상이나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관점을 놓고 벌인 논쟁이었다. 따라서 예송은 그 결과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는 심각한 정치투쟁이었다.

첫 번째 예송은 효종이 죽었을 때 인조의 왕비인 조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고, 남인들은 효종이 차자이지만 왕이 되었으니 장자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아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의 예송은 서인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선왕후는 둘째 아들의 부인으로서 9개월의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하지만 현종은 경국대전을 적용해 1년복을 입도록 하고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5) 노소분당

현종조의 예송 당시 서인의 이념적 주도자는 송시열이었고, 그에 맞서는 남인의 대표자는 윤휴(尹鑴)였다. 송시열은 주자를 숭배하여 주자의 해석을 있는 그대로 따르려고 하였다. 반면 윤휴는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경전 해석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주자를 신봉하는 송시열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동문인 윤선거(尹宣擧)는 송시열과 윤휴를 모두 뛰어난 학자로 존경하며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송시열과 윤휴가 극단적으로 대립하자 둘 사이를 중재할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중재하던 윤선거와 두 사람의 관계도 불편해지고 말았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은 원래 송시열의 제자였는데 아버지에 대한 스승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다가 결국 스승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시열을 비판하던 서인의 소장파들이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인은 결국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였다. 노론은 이이·송시열 계열이었고, 소론은 성혼·윤선거 계열이었다.

6) 숙종대의 환국 정치

숙종(肅宗)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척 세력으로 당파를 공격하거나, 이 당파로 저 당파를 쳐서 정권을 바꾸는 등의 파행적인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를 환국이라고 부른다. 예송을 거치면서 당쟁의 골이 깊어진 탓에 환국을 거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숙종은 처음에 외척인 김석주(金錫冑)를 끌어들여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 정권을 성립시켰다. 남인은 정권을 잡게 되자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가진 윤휴, 허목(許穆) 등의 청남(淸南)과 서인들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온건한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등의 탁남(濁南)으로 분열하였다. 당시 정권은 탁남이 장악하였다. 탁남의 대표자인 허적은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였다.

숙종은 남인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자 다시 김석주를 시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경신환국으로 허적과 윤휴를 비롯하여 많은 남인 인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김석주는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남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김익훈(金益勳) 등을 시켜 역모 사건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지나친 처사는 서인 세력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송시열이 김익훈을 두둔하자 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비판하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것은 노론과 소론이 분립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송시열, 김석주가 주도하는 서인 정권은 장희빈(張禧嬪)이 낳은 아이의 원자 책봉 문제로 숙종에 반발하다가 다시 축출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를 폐위하고 송시열을 사사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한다. 그러나 숙종은 다시 5년 뒤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단행하여 서인 정권을 회복시켰다. 이후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말년에는 노론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러나 세자의 보호를 명분으로 소론이 집결하고, 이에 대해 연잉군(延礽君)을 중심으로 노론이 집결하자 새로운 당쟁의 불씨가 피어오르게 되었다.

7)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결국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불러와,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 사대신을 비롯하여 수많은 노론 인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재위 5년 만에 경종이 죽고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그는 당쟁의 폐단을 극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탕평정치를 추진하였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고르게 등용하려고 노력하였고, 붕당 정치의 제도적 기반이었던 전랑의 자대권과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였다.

영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켰지만 기본적으로 노론 중심의 정치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세자를 중심으로 소론계의 인물들이 집결하였고 이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후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입장을 놓고 그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렇지 않은 벽파(辟派)의 대립이 생겨났다. 영조를 이어 즉위한 정조(正祖)는 선대인 영조를 이어 탕평정치를 추구하면서도 노론 벽파의 압력을 뚫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였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정책을 되돌렸다. 하지만 정조로부터 순조(純祖)의 보호를 부탁받은 김조순(金祖淳)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었다.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많은 산림의 배출한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은 자신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낸 이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는 붕당 정치가 의미를 잃고 몇몇 세도 가문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세도정치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4 붕당에 대한 인식의 변화

조선 시대 정치사에서 사화와 당쟁이 중시된 것은 아미 일제 강점기부터였다. 일제 학자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기 위하여 사화와 당쟁을 지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들은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주위가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였기 때문에 타율성, 의타성이 강한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한국인은 타율적 권위에 의존하는 버릇이 생겨 당파성, 뇌동성이 강한 민족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들은 사화와 당쟁의 시시콜콜한 대립상과 반복성, 계속성, 잔인성을 자세히 서술함으로써 이것이 한민족의 분열적인 민족성에서 연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고질적인 분열성을 가진 한민족은 독자적인 역사발전을 지속할 수 없으니 이웃 나라인 일본 제국이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한 이론이었다.

반면에 광복 후의 한국 학자들은 사화와 당쟁을 조선시대 정치사의 중요한 줄기로 보고 이것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과 연관시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화와 당쟁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조선시대 문치정치, 사림정치의 특성을 나타내 주는 권력투쟁의 소산이었고, 특히 17세기 이후의 당쟁은 붕당간의 공존을 바탕으로 공론에 입각하여 상호비판, 상호 견제하는 붕당정치를 구현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쟁에는 사회의 역기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순기능이 있었으며 오히려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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