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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왕의 지근거리에서 국정을 보좌하다

1400년(태종 1) ~ 1894년(고종 31)

승정원 대표 이미지

승정원일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승정원(承政院)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조선 시대의 국왕 비서기관이다. 국왕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관서였기 때문에 국왕의 혀와 목구멍 같은 기관이라는 뜻에서 후원(喉院)으로 부르고, 여기에 속한 관리들은 후설지직(喉舌之職)이라고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승정원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승선방이 중추원에 소속되어 독립기구로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1400년(정종 2)에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이 성립되어 이후 서서히 그 업무와 소속 관원이 정해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문화 되었다. 조선후기에도 승정원의 업무와 관원의 숫자에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큰 틀은 지켜지면서 유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기점으로 승선원으로 개편되고, 1907년(융희 1) 폐지되었다.

전근대 시기 조선의 정치체계에서, 국왕은 관료제의 정점에서 국정의 모든 사항을 신료들과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존재였다. 당연히 관료 체계 안에 속한 관서의 수와 업무가 방대해 질수록 국왕의 업무 수행 강도는 세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곁에서 제반 사항을 정리하여 전달하고 모든 일정을 보좌할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승정원이 한 역할이 이것이다.

2 승정원의 역할

『경국대전』에 규정된 승정원의 법제적 기능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승정원이 수행하는 기능은 더 많았다. 승정원의 관리는 승지 6명과 주서 2명, 서리 28명으로 승지와 주서들이 수행 하는 업무가 곧 승정원의 기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승정원의 업무 규정은 『은대조례(銀臺條例)』나 『은대편고(銀臺便攷)』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의 업무 중 국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국왕이 수행하는 일을 보좌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승정원의 승지는 국왕이 신료들과의 면대나 조회를 통해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 꼭 배석하였으며, 활을 쏘거나 무예를 익힐 때,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가거나 사냥을 위해 궁 밖을 나갈 때 등 거의 모든 활동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국왕이 주관하는 종묘(宗廟)・왕릉・사직(社稷)・선농단(先農壇)・원구단(圜丘壇) 등의 국가제사에 참여하는 것도 승정원의 업무였다. 하루 일과가 끝난 뒤에도 승지와 주서는 국왕의 급한 전령이나 자문에 응하기 위해, 또는 국왕의 신상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갑작스러운 일에 대비하여 도승지를 제외한 승지 5명과 주서 1명이 돌아가면서 관서 내에서 숙직을 하였다. 대궐문을 열고 잠그는 열쇠를 관리하는 일도 승정원의 임무였다.

승정원은 국왕이 관료들을 이끌면서 효율적으로 국정에 관한 사안을 처리하도록 도와야 했다. 즉, 각 부서가 국왕에게 전달하는 구체적인 사안을 알기 쉽게 정리하여 전달하는 일을 승정원이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6조의 업무를 승지 6명이 하나씩 나누어 관장(분장)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료들이 국왕에게 올리는 계문과 상소 등은 국왕에게 바로 가지 않고 반드시 승정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고, 반대로 국왕이 관료들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과 문서 또한 승정원을 경유하였다. 승정원이 왕명의 출납을 통해 국왕이 수행하는 모든 국정의 창구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국왕은 국정 사무와 기타 사안에 대해 궁금한 것이나 시킬 것이 있으면 수시로 곁에 있는 승지에게 묻고 그의 말을 참고하였다. 대부분 일반 사무에 관한 일이었겠지만, 다른 신료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기밀이나 중대사가 소재가 될 때가 있었다. 승정원이 처리했던 일 중에는 죄인을 심문하거나 형옥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다. 탄핵을 받거나 가벼운 죄를 범한 관료를 문책하거나, 중죄인의 경우는 국왕의 명을 받고 승정원에서 추국하였다.

승정원의 업무 중에는 승정원 내부의 문서를 관리하는 일도 있었다. 승정원에는 국왕이 수시로 하사하는 전적이나 국정관련 기밀문서와 인사 관련 기록 등이 상시로 보관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일목요연하게 관리하는 일이 승정원 주서의 업무였다. 승정원의 문서 관리 업무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바로 매일매일 일지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주서가 하루 동안 이루어졌던 국왕과 신료의 면대 내용과 논의 되었던 상소의 내용 등을 정리하여 남긴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지금까지 정리한 승정원의 업무가 승지와 주서가 본업으로 수행하는 일이었다면, 이 외에도 겸직을 통한 임무도 주어졌다. 승지는 경연에 항상 경연관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승지는 춘추관수찬관을, 주서는 춘추관기사관을 겸하고 있어서 사초를 작성하고 실록을 편찬할 때 동원되었다. 승지는 내의원・상의원・시옹원 등의 부제조로서 맡은 업무도 있었다.

이와 같이, 승정원은 국왕이 원활하게 국정을 살피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제반 사항을 관리하고 보좌하는 업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승정원이 국왕과 모든 관료들을 연계하고, 국왕 곁에 항상 머무르며 시종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한 조선의 관료 시스템은 잘 돌아갈 수 있었다.

3 승정원의 관원, 승지와 주서

승정원은 잡일을 하는 서리를 제외하고는 정3품 당상관인 승지 6명과 정7품 주서 2명으로 구성된 기관이었다. 승지는 항상 국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큰 요직이었으며, 더 높은 관직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이 자리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조선전기 1400년부터 1490년(성종 25)까지 승지에 임명된 사람들의 출신성분과 입사경로를 살펴본 연구는 승정원의 승지가 당시 귀속적・성취적 지위를 다 가진 엘리트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기간 승지를 역임하였던 274명의 입사경로는 주로 과거(문과) 시험을 통해서였다. 50퍼센트가 넘는 인원이 개인의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시험을 수단으로 관로에 들었고, 집안을 배경으로 음서의 혜택을 입어 관직을 얻었더라도 그 이후에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20퍼센트가 되기 때문에 사실상 문과를 통과할 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승지를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분제 사회였던 전근대사회에서 관직은 가문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었다. 조선은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어 양인이면 원칙적으로 과거를 보아 관직을 갖는 것이 문제없었지만, 실제로는 양반 계층 중에서 과거 합격자가 배출되고 이들이 관로에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승지는 요직이었기 때문에 이 중에서도 당대 명문가의 출신들이 많이 들어가는 자리였다. 승지 자리를 거친 관원들은 대부분 종2품 이상으로 승진하였기 때문에 고위직으로 가기 위한 좋은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승지의 업무는 승정원의 본래 직으로 수행하는 임무 외에도 겸직을 통하여 소화하는 일정도 있었기 때문에 업무가 다양하였다.

숭정원의 주서는 고려시대에는 당후관으로 불리던 직책인데, 1405년(태종 5) 주서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주서는 정7품의 비교적 낮은 위계에 있지만 근무를 15개월 하고 난 뒤에는 승육(昇六) 또는 출육(出六)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혜택이 좋은 자리였다. 승육이란 6품으로 승진하여 참하관에서 참상관으로 올라가는 것인데, 조선 시대 관료제에서 6품은 승진의 가장 중요한 문턱이었다. 6품 이상부터는 작은 관서의 장이 될 수 있으며, 지방의 수령직으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승정원 주서는 이러한 6품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이고, 게다가 7품에서 6품으로 승진하는 기간 또한 15개월로 매우 빠른 승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가 16세기 이후부터는 자기 후임을 자기가 추천하는 자천제(自薦制)로 운영되어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주서의 자리는 남의 입방아에 오를 만큼 행실에 문제가 있거나 문음으로 출사를 한 경우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왕의 곁에서 머무르며 국왕과 신료가 나눈 말을 받아 적고 이를 정리하는 임무가 있었으므로 반드시 문재가 있고 필기 능력이 탁월해야 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오류 없이 기록하는 일은 매우 고되었기 때문에 업무를 회피하고 자리를 갈아주기를 원하는 사례가 점점 늘었다. 주서는 원래 2명이 번갈아가며 들어가 기록을 담당하지만 2명 다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생기기 쉬웠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임시로 가주서(假注書)를 차출하여 일을 맡게 하는 경우가 보편화 되었다.

주서가 하는 역할은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것을 비롯하여 승정원 내부의 문서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승정원의 기능은 사실상 승지가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주서가 하는 일 중에 승지가 직접 간여하지 않는 승정원의 일이 바로 문서관리 업무였다. 주서의 업무는 사실상 이 업무에 특화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주서는 승지의 지휘 아래 승정원에 보관된 여러 서적과 군사 기밀・인사이동・전례 등과 관련된 문서들을 관리하였다. 『승정원일기』는 미리 승정원 내에서 또는 승정원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들을 주서가 기록하였다가 이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또한 주서는 승정원과 여러 관서, 승지와 다른 부서의 관료들 사이의 사무연락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4 승정원의 업무일지,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작성한 업무일지이다. 따로 가공을 거치지 않은 1차 사료이기 때문에 필사본으로 남아 있으며, 당시 관료들이 실무에 사용하던 이두와 문서 형식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303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 전기의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대부터의 기록이 3,245책의 분량으로 남아있다.

『승정원일기』의 하루 기사 앞에는 반드시 날짜와 그 날의 날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좌목에는 6명의 승지와 2명의 주서 외에도 가주서와 사변가주서 1명씩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국왕과 중전・대비전・왕세자내외에 대한 약방의 문안과 입진 기사로, 왕실 주요 구성원의 안부에 대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매일매일의 기사에 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다. 이다음에 기록되는 내용은 국정 업무에 관한 것이다. 우선 6조의 업무를 분장한 승지들이 6조를 비롯한 각 관사의 보고를 받아 관련 문서를 정리하여 올린 내용, 이에 대한 국왕의 재가 사항이 기록된다. 이어서 이조와 병조에서 행해진 문무관의 인사행정 관련 내용이 기록된다. 관료들이나 유생들의 상소, 지방관의 장계의 내용과 이에 대한 국왕의 비답이나 하유는 그 다음에 기록한다. 특별히 국가의 의례가 있는 경우, 국왕이 밖으로 행차한 경우 이와 관련된 일체의 행사 등도 당연히 기록하였다. 그 밖에도 국왕과 신료들이 경연과 약방, 조회 등으로 면대할 때 있었던 일이나 대화 일체도 기록 대상이었다.

이와 같이 『승정원일기』에는 승정원의 관료들이 국왕의 가장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있었던 거의 모든 사항을 기록했기 때문에 매우 자세하고 생생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이 일을 맡은 주서들의 업무 강도는 다른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주서가 엎드린 채로 정제되지 않은 국왕과 신료들의 대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여 속기할 때의 곤욕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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