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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전

국가에서 공인한 독점 상권

미상

육의전 대표 이미지

육주비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의 중앙시장, 육의전

시장은 인류 역사의 발달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소비할 모든 품목을 생산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인지라, 사람들은 시장이라는 약속된 공간에서 자신이 생산한 물건의 잉여물과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발달해감에 따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었고, 생산자들에게 물건을 사들여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사회에서도 시장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특히 수도인 한성(서울)은 왕궁과 각종 관청들로 가득 찬 협소한 공간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물화를 생산해내기 어려운, 소위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과 각종 물화를 외부로부터 조달해야 했기에 이를 담당하는 상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한성의 종로(鐘路)에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상인들이 합법적으로 상행위를 할 수 있는 공간인 시전(市廛)이 마련되어 있었다. 국가는 농민들에게 토지로부터 산출된 생산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둬가듯 시전의 상인들에게 그 운영 규모를 기준으로 일정 금액의 세금을 걷어갔다.

조선 후기에 궁궐과 각종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보다 안정적으로 조달받기 위하여, 몇몇 규모가 큰 상점들에게는 세금을 대신하여 취급 물품의 일정량을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으며, 그 대신 그들이 취급하는 품목들을 독점적으로 취급하고 판매할 수 있는 권한과 이를 방해하는 난전(亂廛)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였다. 육의전(六矣廛)은 이러한 시전 중에서 특히 으뜸가는 여섯 가지 품목을 판매하던 상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2 육의전의 탄생

한양의 사대문 안에 시장 터가 제대로 닦이기 시작한 것은 1410년(태종 10)이었다. 2월에 시전 대시(大市)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 현 종로1가에 있었던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昌德宮) 동구에 이르는 장소에 800여 칸 규모의 행랑을 짓기로 정하고 , 행랑조성도감을 두어 시전 공사를 시작하였다. 약 2년 반의 공사를 거쳐 1412년(태종 14)에 그 완성을 보게 되었다. 태종은 공사 기간 동안 여러 번 인부들에게 술을 내리는 등 은전을 베풀었고, 공사에 대하여 흡족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이렇게 서울 종로에 자리 잡게 된 시전 중에서도, 국역의 부담을 지면서 독점권과 난전 단속 권한을 가지게 된 육의전이 뚜렷하게 자리 잡게 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변화된 사회경제적 환경에 따라 조세 수취 체계가 변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시전상인들이 세금을 납부하면서도 동시에 관에서 필요한 물품을 대량으로 조달하는 역을 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시적고(市糴考) 1 경성시전(京城市廛)에 따르면 시전 중 넉넉한 자들로 하여금 국역에 응하게(국역을 부담하게) 하여 이들을 유분각전(有分各廛)이라 불렀고, 그 중에서 최고액을 부담하는 6개의 점포를 육주비전(六注比廛)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중한 국역 부담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는 해당 상인들에게 독점적 상행위를 허락하고, 이를 방해하는 난전을 금지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정부로서는 막대한 자금력이 있는 상인들과 결탁하여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상인들로서는 국가의 비호 하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정적인 이윤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조치였다고 하겠다.

3 육의전의 취급 품목

앞서 언급했듯 육의전은 육주비전이라고도 불렸으며, 말 그대로 여섯 가지의 품목을 취급하는 가게이다. 품목의 종류는 대체로 비슷하였으나 시간에 따라 다소간의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말 저술된 『증보문헌비고』 시적고(市糴考)1 경성시전(京城市廛)에 따르면 육주비전은 ①비단을 파는 선전(縇廛), ②무명을 파는 면포전(綿布廛), ③명주를 파는 면주전(綿紬廛), ④각종 어물을 파는 내어물전(內魚物廛)과 모자를 파는 청포전(靑布廛), ⑤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⑥모시베를 파는 저포전(苧布廛)이다. 19세기 초에 저술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육의전은 ①선전(線㕓), ②면포전(綿布㕓), ③면주전(綿紬㕓), ④내외어물전(內外魚物㕓), ⑤지전(紙㕓), ⑥저포전(苧布㕓)과 포전(布廛) 등이다. 정조 대에 청포전이 빠지고 포전이 새로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동국여지비고』에서는 ①면전, ②면포전, ③면주전, ④내외어물전, ⑤지전, ⑥저포전, ⑦포전을 꼽고 있으며, 『육전조례』(1866)에서는 ①입전(=선전), ②면포전, ③백목전, ④저포전, ⑤포전, ⑥내어물전, ⑦외어물전 등을 꼽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규모에 따라 4~10분(分)의 국역을 부담하게 되어있었다. 각 전의 상인들은 도중(都中)을 결성하고, 공동 관리 사무소인 도가(都家)를 두어 이를 통하여 세금을 납부하였다. 시전을 관리·감독하는 경시서(京市署)에서 육의전이 상납해야 할 품목과 수량을 각 전의 도가에게 알리면, 도가가 이를 각 점포에 분배하고 거두어들여 상납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납세 품목과 수량이 점차 일정해지자 미리 각 전 도가에 물품을 내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상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육의전에서는 이처럼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정기적으로 혹은 수요에 따라 납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폐(歲幣)·방물(方物) 등 청(淸)에 방문하는 사신들이 가져가는 물품 조달도 담당하고 있었다.

4 영욕과 쇠락의 역사

육의전은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특권은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었다. 18세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국가로부터 공인된 시전상인들과 서울 근교에서 새롭게 성장하던 사상(私商)들이 서울 상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시전상인들은 난전을 금하는 권리인 금난전권으로 사상을 단속하면서 그들의 상권 잠식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면서 폭증하는 한성의 소비 수요를 시전 상인들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독점 상인들로 인하여 물가가 폭등하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공식적으로 폐지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신해통공). 그러나 당시 조치에서 국역 부담을 지고 있는 육의전에 한해서는 금난전권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육의전은 국가의 공인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육의전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개항이었다. 개항은 곧 육의전을 비롯한 기존 시전 상인들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외국 상품들이 몰려오면서 육의전 상인들이 전통적으로 취급하지 않던 품목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외국인들은 사대문 안의 기존 상권까지 침식해가고 있었다. 시전 상인들은 이에 대하여 총상회(總商會)를 결성하는 등 단체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이러한 흐름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가 역시도 이를 해결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육의전은 이렇듯 개항 이후 외국 상품과 자본의 힘에 밀리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시전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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